소통은 ‘나’를 벗어야 가능하다.
글. 나종우

인류의 발전사를 돌아보면 과거 농업사회에서는 소통(疏通:생각하는 바가 서로 통함)이라는 단어가 지금처럼 문제가 되질 않았다.
왜냐하면 당시의 문제나 관심사는 어떤 경우라도 개인의 문제나 관심사가 아니라 구성원 모두의 문제이자 관심사였기 때문이다. 그때는 사회생활 자체가 단순했다. 그러나 문명의 발달로 사회가 복잡하게 되면서 공통의 관심사보다는 개인적인 생활과 삶이 더 중요시되고 있는 것이 소통을 어렵게 만들고 있다.
우선 가장 작은 집합체 조직인 가정에서조차도 부부, 부모와 자녀, 형제간에 생각하는 바가 같을 수가 없고 빈부, 학력, 노소, 직장의 상하관계에서도 쉽게 소통이 되질 않고 있다. 그러다 보니 과거에는 생각하지 못했던 여러 가지 문제들이 발생하게 되면서 관심(關心), 조언(助言), 간섭(干涉), 불신(不信) 같은 단어들이 항상 주위를 맴돌며 소통을 어렵게 만들고 있다.

어차피 인간을 사회적 동물이라 하는 것은 혼자서 기능하고 살 수 없기 때문에 다른 여러 사람들과 어울려서 살아가야 하는 존재라는 것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이러한 단어들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우선 관심(마음에 두고 주의를 기울임)과 간섭(남의 일에 부당하게 참견함)을 생각해 보자. 윗사람들은 아랫사람들의 생각과 행동을 항상 불안하게 생각하면서 나름대로 관심을 갖고 조언(도움이 될 수 있도록 말을 거들거나 깨우쳐 주는 일)을 하게 된다.
그런데 여기에 소통을 가로막는 두 가지 문제가 있다. 그 첫 번째는 윗사람들의 관심과 조언의 기준이 자신들의 가치관에 의한 판단이라는 것이다. 본인과 상대방의 세대, 연령, 학식 등의 차이를 고려하지 않고 본인 중심으로 조언을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현재 사회의 가치관에 대한 인식부족이다. 다음으로 소통을 가로막는 두 번째 요인은 윗사람들의 관심과 조언을 받아들이는 젊은층에게 있다. 관심과 조언이 간섭이라는 선입견으로 먼저 작용하여 이를 거부하려 한다는 것이다.

삶의 본질적인 문제에서 부딪치는 것들의 해결책에 있어, 이미 그러한 상황들을 겪은 층들이 하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는 점도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들의 연륜 속에 들어 있는 겹겹이 쌓여있는 빅 데이터(big data)는 알기 쉽게 분석적으로 또는 꼼꼼한 언어로 설명해주지는 못할 망정 그들이 살아온 세월에 대한 통찰력 속에서 형성된 것들이다. 
문제의 답은 의외로 간단할 수 있다. 양쪽 모두가 ‘나’를 벗고 이야기하고 받아들이는가를 깨우치는 데서부터 출발해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지금 진정으로 상대방에 대한 애정과 사랑을 가지고 말하고 듣고 있는가, 행여 ‘나’라는 존재가 두꺼운 갑옷을 걸친 채 상대방에게 다가가려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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