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의 미학, 옻칠회화
곽나향 옻칠화가

검은 숲에 서 있는 하얀 자작나무. 언뜻 보면 캔버스에 그려진 그림 같지만, 분명히 다르다. 난각기법(달걀과 오리알 등의 껍질을 붙인 기법)과 자개, 순금박으로 표현된 하얀 나무는 마치 살아 있는 듯 입체적이고, 수차례의 칠을 통해 완성된 흑(黑)은 숲의 깊이감을 한없이 깊게 만든다.
아직은 생소한 이름의 옻칠회화. 수 겹의 옻칠과 연마, 적정의 온도와 습도, 건조를 반복해 긴 시간을 통해 완성한 곽나향 작가의 ‘자작나무 숲’이다.
“전통적인 옻칠기법과 공예성을 바탕으로 현대의 조형성을 표현하고자 시도하고 있지요. 전통과 현대, 그리고 공예와 회화의 절충된 경계 영역의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전통공예의 재료로만 이용되던 옻칠을 회화에 접목한 옻칠회화. 그는 10여 년 전, 우연히 갤러리에서 옻칠회화를 처음 봤던 그 강렬했던 순간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고 말한다.

“우리나라의 아름다움은 무엇인지, 또 전통을 바탕으로 현대를 담아낼 수 있는 건 무엇일지  많은 고민을 하던 때였어요.” 한국적인 미를 찾기 위해 도예를 전공하고, 단청 문화재 수리기술자 공부를 해 자격증을 취득했던 그였다. 옻칠 빛에 반해서 옻칠회화에 빠져버린 그는, 옻이 올라 고생하면서도 장갑을 끼지 않고 작업에 몰두했다. 재료 그 자체를 온전히 대하고 느끼고 싶었기 때문이다.
“연마를 하다, 어느 순간 옻칠판 위에 붉은 핏빛이 감도는 거예요. 물 사포질에 손가락 끝이 닳아 피가 나는지도 몰랐죠. 3년 정도 되니, 다행히 옻은 잘 오르지 않더라고요. 지금은 매일 함께하는 친구처럼,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옻칠을 알아가고 있는 중이에요.” 온도와 습도, 건조 상태에 따라 달라지는 옻빛. ‘어쩜 이런 색이 나왔지.’ 감탄하다가도, 곧 뜻대로 표현이 되지 않을 때면, 이것이 얄팍한 재주로만 표현 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느끼며 겸손함을 배운다.

“색이 피는데 몇 년 정도는 걸리니 농사를 짓는 것처럼 계속 지켜보면서 완성해 나가야하죠. 시간과 연마의 예술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느림의 예술이라는 말도 실감하지요.” 더욱이 그림을 그릴 수 있는 나무판 하나도, 수 겹의 생칠과 사포질, 베 바르기, 호칠, 골회칠, 흑칠 등의 공들인 과정을 거쳐야 완성되는 옻칠회화. 장인 정신과 공예성의 가치가 담긴 나무판이 완성되면 비로소 그 다음에야 회화작품이 가진 창의적인 표현이 시작된다. 안료를 개어서 그림을 그리고 새기고, 자개, 순 금박, 은박 등 재료들을 조심히 올려 수 겹의 칠과 연마를 하는 것. 이 인고의 과정과 노력이 꼭 필요한 작업인지, 사람들은 종종 묻는다.

“이렇게 수 겹의 공정을 꼭 거쳐 그림을 완성해야 하는지, 쉽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있지 않은지, 다작을 할 수 없는 불리함 등을 궁금해 하는 거지요.” 오랜 고민 끝에 나온 그의 답은 “옻칠의 아름다운 빛은 정직한 공정과정과 섬세함에서 나온다.”였다. 그리곤 “이 특징을 살리지 않는다면 회화를 하는데 있어 옻칠을 선택한 이유가 없지 않겠느냐?”고 되묻는다. 물론 공예적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현대의 조형성을 담아내기 위해 지금도 끊임없이 고민하고 있다고.

“얼마 전 초등학교 6학년 때 일기장을 찾게 되어 다시 읽게 되었어요. 거기에 ‘우리나라 문화를 표현하는 무언가를 그리고 만드는 사람이 꼭 되겠다.’고 쓰여 있어서 새삼 놀랐지요.” 지금도 그 꿈을 이루어 나가기 위해 노력 한다는 그. 앞으로도 아름다운 옻칠회화 작업을 해나가는 열정 있는 작가로 기억되고자 한다.
옻칠회화의 검은 화판이 우주 같다는 그. 그가 우주처럼 느껴지는 아름다운 흑 위에, 붉은 주사와 금빛을 올리자, 달빛을 온몸으로 입은 자작나무가 마치 도자기처럼 반짝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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