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전달됐을까?
글. 구나연

거리에 불빛들이 점점 많아지기 시작하고 종소리와 크리스마스 캐럴이 간간이 들리기 시작했다. 연말 풍경이 하나둘 나를 스치고, 새해의 이야기가 들리기 시작할 때쯤, 2017년의 마지막 달인 12월을 3일 남겨 둔 그날. 급작스러운 통보가 떨어졌다.
“센터가 문을 닫게 되었으니, 아침에 가면 안내문이 있을 거고 사람들이 그 안내문을 보게 될 것이다.” 힘들겠지만 잘 부탁한다는 회사 측의 당부와 함께, 나는 갑작스럽게 퇴사 처리가 되었다.
일을 시작한 지 이제 막 5개월을 넘긴 시점이었다. 회사가 어려운 사정이었는지조차 당연히 알지 못했다. 그동안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새벽 5시 30분 출근을 해왔는데, 하루아침의 퇴사라니…. 믿기지 않았다. 더구나 내가 원해서 한 퇴사도 아니지 않은가.
하지만 어이없는 것도 잠시. 내가 일하던 곳은 회원제로 운동을 하는 센터였고, 좋은 시설과 좋은 환경, 좋은 위치 덕에 회원권 가격은 저렴한 편이 아니었다. 아니나 다를까 우려와 걱정은 현실로 다가왔다. 소문은 바람보다 빠르게 입에서 입으로 퍼져 거대한 태풍처럼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한 것이다.
계속 전화가 왔다. 하소연하는 사람, 항의하는 사람, 화내는 사람, 욕하는 사람, 그냥 받아들이는 사람, 처음 보는 사람 등. 나는 그들의 화를 계속 들으며 그들을 이해시켜야 했다. 계속 같은 말을 반복하며 설명해 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미 화가 나 있는 사람들에게 내 말은 그저 한 귀로 듣고 흘릴 내용이었다.
그렇게 1일, 2일…. 감정노동에 지쳐 가고 있을 때쯤 어떤 분이 오셔서 “이거 너희가 짜고 치는 고스톱 아니냐. 지금 모든 사람이 너희의 말을 믿고 있지 않다.”라고 말했다.
그때의 나는 ‘내가 자발적으로 여길 나오긴 했지만, 사람들 얘기를 들어주느라 밥 한 끼도 못 먹고 일하면서, 한순간 실업자가 된 내 상황조차 못 챙기고 있다.’는 생각과 함께 답답함과 욱하는 마음이 계속 내재되어 있던 상황이었다. 그러던 중 그런 말을 들으니 순간 참을 수 없었고, 오히려 나의 억울한 점을 말했다. 그리고 몇 번이고 그분이 이해하고 감정이 진정될 때까지 설명해 드렸다.
그 후 몇 시간이 지나자, 그분이 피자를 사 들고 센터를 다시 찾아왔다. “힘들겠지만 이것도 시간이 지나면 별거 아닌 일이 될 거고 경험이 될 거다. 그리고 미안하다.”면서 말이다. 사실 그분은 내가 일하면서 불편해하고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분이었는데, 그런 말을 들으니 오히려 내가 더 죄송했다. 생각지도 못한 분에게 이런 이야기를 듣게 돼서 놀랐고, 진심은 정말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구나를 느끼게 된 2017년 끝자락이었다.


너희들을 위한 액땜
글. 양수안

올겨울 가장 추운 한파가 몰아치던 날.
나는 승용차 대신에 달리는 열차 안에서 아름다운 눈이 내리는 풍경을 감상하고 있었다. 목적지는 충남대학교 변호사시험 고사장. 우리학교 법학전문대학원생들이 보따리를 싸가지고 가서 치르는 5일간의 고된 시험. 3,500여 명이 응시한다는 이번 시험. 경쟁률만 해도 어마어마하다. 그 가운데서 살아남아야 하니 당사자인들 오죽할까 싶어, 내 마음은 엄마가 된 양 더욱 간절해진다.
가는 내내 한 생각이 맴돈다. ‘연말부터 새해까지 내가 액땜은 다 했으니, 너희들은 제발 시험에만 철썩 붙어라.’ 연말 어느 출근길, 주차선을 떡하니 물고 있는 옆차를 생각지도 못한 채 무심코 차를 쭉 빼는데 뒤꽁무니에서 ‘드르륵’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순간 ‘돈 벌었네.’ 하는 생각과 ‘이건 뭐지?’ 하는 생각이 교차했다. 액땜은 그때부터가 시작이었다.
무술년 1월 1일 새벽, 어른들께 세배를 올리며 힘찬 신년을 맞이했다. 2일에는 학교 시무식과 종법사님 신년하례까지 잘 마쳤는데…. 갑자기 으슬으슬 몸살이 오는가 싶었다. ‘아이들 시험 치를 때까지는 감기 걸리면 안 돼.’ 얼른 비상약을 먹었다. 그런데 사전 예방으로는 될 턱이 없다는 듯, 목이 아파오기 시작했다. 병원에 찾아갔더니, “다행히 인플루엔자는 아니네요. 주사 두 대 맞고, 링거도 맞고 가세요!”라고 했다. 그렇게 변호사시험을 앞두고 감기와 사투를 벌이며 남은 일주일 기도를 있는 정성, 없는 정성을 다해 올렸다.
변호사시험 전날이었다. 교감님 사무실에 들어가 출가단보 가방을 찾아들고 나오는데…. ‘허걱, 이건 또 뭘까?’ 사무실 안쪽과 입구 쪽의 높낮이가 한참이나 달랐던 것을 금세 까먹고 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왼발을 디뎠는데, 잠시 몸이 허공에 머문 채 갈 길을 몰라 하더니 급기야는 발목을 접지르며 넘어지고 말았다. 그날따라 이임하는 교무 송별회까지 하다 보니, 너무 늦어 한의원도 못갈 신세가 되었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 헛웃음만 자꾸 삐질삐질 새어 나왔다. ‘감기가 나갈 때쯤 되니, 이제는 내 발목을 잡는구나.’ 싶었다.
괜스레 아무 죄 없는 옆방 선배교무에게 찾아가 죽는 소리를 쳤다. “나 발목 삐었어요. 찜질팩 없어요?” 그렇게 호들갑을 떨며 졸라댔더니, 이곳저곳 연락을 해보는데 역시나 찜질팩은 아무도 갖고 있지 않았다. ‘아. 이게 무소유의 삶이란 말인가.’ 그러나 한 가닥 희망은 있었다. 그 시각 퇴근을 하던 선배가 내 소식을 듣고 고가의 원적외선 기기를 가지고 내 방을 찾아왔다.
다음날 변호사시험 첫날. 이번 신년엔 웬일로 눈이 안 오나 했더니, 아예 시험기간에 맞춰서 오려고 하늘이 작정을 했나보다. 그럼에도 나는 아침 일찍 기도를 올리고, 한의원에 가서 침을 맞고 처방전을 받아 돌아왔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내일 아이들 얼굴을 보러가야 하기 때문이다.
“얘들아, 걱정마라. 액땜은 내가 다 했으니, 너희들은 합격만 해다오.” 


꿈을 갖게 만드는 학교
글. 박서현

꼬꼬마였던 우리들이 이만큼 커서 졸업식까지 오게 되었네요. 문득 돌이켜 봅니다.
처음 이 시골에 와서 맛보았던 신선한 공기! 너무나도 예뻤던 작지만 큰 학교! 처음 들었던 학교 일정, 어마 무시한 규칙들, 하지만 이젠 몸이 다 기억하는 학교생활!
‘내 성적은 어느 정도일까? 나는 몇 등급일까?’ 이런 것들이 주가 아닌 ‘나는 누군가. 내 꿈은 무엇인가. 내가 좋아하는 것은 뭘까?’ 라는 생각을 하게 만들어 준 학교.
공부하는 기계가 아닌 인간으로서의 사는 법, 사람과 사람 간의 따뜻한 정을 배운 우리들. 그 순간마다의 그 느낌들을 저는 잊을 수가 없습니다. 다들 학교에서 느꼈던 서로 다른 추억들로 상영되고 있을 그 느낌을, 잊지 않고 간직하고 싶습니다.
놀기만 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결코 헛되지 않았던, 잊을 수 없는 학창시절의 아름답고 즐거운 추억들! 부모님의 의지가 아닌 내 의지와 자유대로 살아온 시간들. 우리 학교는 유난히 졸업생들이 많이 찾아옵니다. 그만큼 그립고, 소중하다는 것이겠죠.
졸업생들, 이렇게 잘 키워주신 선생님들, 모두 모두 정말 감사했습니다. 고맙습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또 자신의 이름이 아닌 ‘부모’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든든하고 영원한 우리 편 부모님! 부모님들이 흘린 눈물과 사랑에 보답해 하나의 별이 되어 빛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 그리고 후배님들! 각자 1년, 2년 동안 함께 동고동락하느라 수고했습니다.
우리 자랑스러운 졸업생들! 앞으로 힘들고 지치는 순간이 많을 텐데 그 순간 마다 우리 학교에서의 추억을 떠올리며 치료제 삼아 한 발짝 더 앞으로 나아갈 수 있길 바랍니다. 우리 학교에서의 추억을 가슴 한켠에 소중히 잘 간직하길 바랍니다.
1, 2, 3학년 동안 정들었던 얼굴, ‘우리’라는 단어가 어색하지 않은 ‘함께’라서 좋았던 성지송학! 봄에는 따뜻한 햇살이 교실로 들어오고, 여름에는 여름밤의 별이 아름답게 비추어 주고, 가을에는 시원하고 맑은 바람이 불어오고, 겨울에는 눈이 소복하게 쌓인 그런 아름다운 학교에서 처음 1년은 모든 게 새로워 설레었고, 그 후 2년은 모든 게 즐거웠고, 지금 3년은 그저 모든 순간이 아쉬울 뿐입니다.
우리는 가도 또 누군가가 들어옵니다. 그 누군가도 우리 성지송학인의 정신, 따뜻하게 사는 법을 배우고 갔으면 좋겠습니다. 여리고 자그마한 새싹에서 그늘을 드리울 수 있는 나무로 우리를 가꾸어준 모든 성지송학인들에게 정말 감사드립니다. - 아쉽고 고마운 마음을 가득 담아 성지송학중학교 졸업생 대표 박서현 올림 -


마음이 풍요로운 삶
글. 정효원

“무얼 먹고 사노?” 이 근심스런 아버지 말씀이 사라진지 두 해가 넘어간다. 내 나이가 50 중반. 이제야 정말 먹고 살 걱정은 하지 않는다. 돈이 많아서? 아니다. 마음만 잘 먹으면 되는 일체유심조의 이치! 이것이 내 인생의 보물이다.
나의 부모님은 정말이지 자력이 대단한 분이셨고 사랑도 많으셨다. 나의 유년시절은 부모님 덕분에 풍요로웠지만 꾸준히 가세가 기울었다. 친정을 먹여 살리려고 아버지와 결혼했다는 어머니의 아픔은 바로 장녀인 나의 한이 되었다.
그러다가 2006년, 원디대 마음공부방법론을 기적의 행운처럼 만났다. 하지만 그 해부터 인생의 위기는 절정에 다다랐다. 신용불량에 가진 재산도 없고, 고정적인 수입도 없고, 가족·이웃 간의 신뢰도 잃고, 정말이지 내 인생도, 나 자신도 만신창이가 되어 정신이 이상할 정도였다. 수시로 삶을 포기하고 싶었다. 내가 지닌 것은 오직 마음일기법뿐이었다. 매일 밤 일기를 쓰지 않으면 잠을 잘 수도, 생활을 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고난이 축복이라는 말은 사실이었다. 마음일기라는 뗏목은, 나에게 죄의식과 피해의식을 벗고 자등명할 수 있는 절대적인 마음의 권능을 발견하게 했다. 돌아보면 너무도 큰 사랑과 관심으로 보이지 않는 손이 항상 나를 밝은 길로 안내하고 있었다는 것을 지금도 느낄 수 있다.
‘당신은 나입니다.’ 세상을 거울로 보니 너무도 오랜 세월 부정하고 거부하고 무가치하게 버렸던 아버지, 어머니, 형제, 배우자, 가까운 인연들의 모습이 나였다. 가슴을 치고 눈물이 쏟아졌다. 불평불만하고 시비하며 나를 부정하고 학대하면서 오직 내가 나에 의해 만신창이가 되었구나! 현실은 모두 내 책임이었다. 나를 사랑하는 일이 가장 시급하고 절실했다. 불만스러운 감정이 일어날 때마다 미친 듯이 마음일기를 썼다. 인생의 금쪽같은 비결이 이렇게 지옥 같은 깜깜한 아픔 속에 감추어져 있었다니! 경이로웠다.
수시로 쌀이 떨어지고 관리비를 내지 못해 전기, 수도가 끊어졌다. 빚을 갚지 못해 곤욕을 치르기도 하며 그때마다 부부다툼으로 나의 가정은 수시로 흔들렸다. 그러다가 내가 남편이 아닌 돈을 잡고 있다는 것과, 그렇게 나를 무가치하게 버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순간, 결국 끈질기게 집착하던 돈을 포기하고 남편을 선택하며 우리 가정의 행복은 시작되었다. 돈을 포기하며 집착을 놓는 느낌은 마치 뛰어내려 죽음을 선택하는 듯했다. 하지만 죽고자 하니 사는 길이 열렸다. 
행복가족캠프 10년, 고집멸도의 길, 마음일기를 쓰며 내면을 탐구한지 10년, 정말 내 마음의 강산이 아름답게 변했다. 나의 가정은 이제 나날이 풍요롭고 윤택하며 화목하다. 남편과 함께 하는 사업은 오직 감사의 마음먹기로 술술 풀려가고, 무엇보다 만나는 인연들과의 만남이 즐겁고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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