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산성지의 설경
감추고 감추어 아름답다
취재 노태형 편집인

  눈이 내립니다. 폭설이라고 합니다.
  문득 그리운 이가 떠올라 전화를 겁니다.
  “형, 거기 눈 내려요?”
  “앞이 안 보여. 어? 그런데 방금 해가 났네.”
 
  그 한 마디에 이곳저곳 떠돌던 발길을 멈추고 영산성지로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다시  울린 전화. “오지 마. 폭설이라 앞이 안 보여.” 이왕 내친걸음이니 멈출 수도 없습니다. “정, 사진 찍기가 어려우면 형 얼굴이라도 보고 오죠 뭐. 허허.”
우리나라 최대 다설 지역으로 이름난 영광 땅에 들어서자 눈은 굵은 꽃송이가 되어 날립니다. ‘계 탄 날’이란 말이 있죠. 생전에 이렇게 많은 눈은 처음인지라 마음은 벌써 흥분이 앞섭니다. 하지만 성지가 점점 가까워질수록 피어나기 시작한 불안의 불씨. 마치 시샘이라도 하듯 한 치 앞을 분간하기 힘들 정도로 퍼붓기 시작하는 눈송이들. 하지만 어떻습니까? 100여 년 전, 소태산 대종사도 이렇게 많은 눈을 보며 생각에 잠겼을 테지요. ‘참 많다. 이 모두가 눈이구나. 결국 녹겠구나.’

  가까스로 만난 지인은 반가움보다는 걱정이 앞서는 모양입니다.
“빨리 나가. 길 막히면 나가지도 못해. 나도 나가기가 어렵겠네. 길 막히면 들어오기가 어렵잖아.” 같은 말의 반복이 묘한 여운을 남깁니다. ‘가고 오는 게 다르지 않다.’는 소태산의 말을 다른 사람의 입을 빌려 여기서 듣다니요.
급한 마음에 기다림도 없이 익산으로 내뺀 게 못내 미련으로 남았습니다.
하룻밤이 지나고 걸려온 전화. “야, 여기 이제 눈이 그쳤네. 해도 나고.”
어제 잠시 만났던 지인의 급한 전화에 다시 마음은 설레이죠.
“네. 바로 갈게요.”

  하지만 애써 달려간 성지는 또 어제와 같은 상황의 반복. 문득 체념이 됩니다. 하지만 체념이란, 기다림을 모르는 급한 영혼의 변명일테죠. 일기는 오락가락할 수 있으니, 한 치를 분간하기 힘든 눈보라 속에서도 어느새 해가 나고, 또 언제 그랬냐는 듯이 눈보라가 치고…. 그런 기다림은 한 폭의 풍경화 같은 세상을 선물합니다. 감출 건 감추고 덮을 건 덮으니 이렇게 세상은 아름다워집니다. 모든 걸 드러낸 세상은 현실이 되지만 적당히 감춘 세상은 동화가 됩니다. 아마, 소태산이 꿈꾼 개벽 세상도 동화가 아니었을까요. 동심을 간직한 사람들이 만들어가는 세상, 말이죠.

  문득, 올 한 해를 그려봅니다.
소태산이 9인의 제자와 함께 방언공사를 시작한 지가 올해로 꼭 100년이라고 합니다. 또 올해는 경산 종법사의 시대가 막을 내리고 새 종법사를 맞이해야 하는 한 해이기도 하죠. 그래서 참 많은 기대를 낳는 한 해입니다. 이는 곧 소태산이 9인 제자와 함께 방언공사를 시작했듯, ‘모든 사람들이 함께’ 원불교를 새롭게 만들어가는 한 해의 의미도 담고 있겠죠.
  예로부터 겨울에 눈이 많이 내리면 풍년이 든다고 했습니다. 오랜만에 영산성지에 이렇게 많은 눈이 내린 걸 보면 원불교에도 풍년이 드려나 봅니다. 원불교의 2세기를 더욱 풍족하게 만들 개벽과 혁신의 풍년, 말이죠.
  그러니 우리 부지런히 일할 준비를 합시다. 그래야 부자가 되죠. 정신·육신·물질의 부자 되시게요.

저작권자 © 월간원광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