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 많으면 반드시 설화(舌禍) 부른다
글. 박정원  월간<산>부장·전 조선일보 기자

  ‘악한 말을 말며’ ‘다른 사람의 과실을 말하지 말며’ ‘두 사람이 아울러 말하지 말며’ ‘한 입으로 두 말 하지 말며’ ‘망녕 된 말을 하지 말며’….
  원불교의 보통급, 특신급, 법마상전급 30계문에 나오는 말과 관련된 계문만 뽑아봤다. 30계문 중 말과 직접 관련된 문항이 5문항이니 전체의 약 17%가량 된다. 단일 항목으로 가장 많은 셈이다. 가장 많다는 건 사람들이 가장 범하기 쉬우며, 따라서 가장 조심하고 가장 중요하다는 의미일 것이다.

  사람은 평생 얼마나 많은 말을 할까? 그 많은 말 중에 계문을 범하는 말은 얼마나 많을까? 말로 인한 구설이나 설화는 또한 얼마나 될까? ‘세치 혀가 사람 잡는다.’거나 ‘역사를 바꾼다.’거나 하는 말은 결코 헛된 표현이 아니지 싶다. 
고사성어에서도 말의 문제점과 관련된 내용이 많다. <논어>에서 ‘말을 잘 하고 낯빛을 착한 듯이 하면서 어진 사람은 드물다.’고 한 경구는 교언영색(巧言令色)을 말한다. 교언영색은 교묘한 말을 하면서 착해 보이는 얼굴빛을 가리킨다. 구밀복검(口蜜腹劍)도 이와 별로 다르지 않다. 
 
  입에는 꿀을 바르고 배에는 칼을 품고 있다는 뜻으로, 겉으로는 친한 척 말을 정답게 하지만 속으로는 해칠 생각을 지닌 것을 의미한다. 상대방을 현혹시키기 위해 달콤하게 꾸민 말과 이득을 내세워 속이는 말을 나타내는 감언이설(甘言利說)도, 세 치 혀로 대부분 남을 속이기 위한 거짓말이라고 보면 된다. 그 외 조삼모사나 도청도설 등도 유사한 의미를 가진 고사성어들이다. 이들은 전부 일구이언을 뜻한다. 한 입으로 두 말하는 것이다. 일구이언은 특히 원불교 30계문 중 특신급 십계에 들어있는 ‘한 입으로 두 말하지 말며’와 똑같은 의미다. 고사성어의 내용에서 보듯이 구설(口舌)은 반드시 설화(舌禍)를 부르게 마련이다.

  사람 사는 세상에 말로 인해서 많은 인과가 생긴다. 얼마 전 내가 속한 어느 단체에서 말로 인한 구설이 안타깝게 만들어졌다. A라는 사람은 봉공을 하면서 여기저기서 말을 하고 말을 만들기 좋아하는 부류다. 오랫동안 봉공을 한 사람치고는 입이 너무 가벼운 사람으로 평가를 받고 있었다. 그의 평소 말을 보면 어느 정도 이해가 가는 면이 있다. “지도자가 조직을 잘 이끌려면 여기저기서 다양한 말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게 그의 평소 생각이다.
반면 총무를 보는 B라는 사람은 매사에 꼼꼼히 따져 조직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도록 애쓰는 사람이다. 국립 명문대학 4년 동안 등록금을 한 번도 내지 않았고, 수석 졸업까지 할 정도로 성실했다.

  문제는 A가 본인이 하고 싶은 대로, 본인의 의지대로 이끌어 가려고 하는 데서 발생했다. 수년간 봉공을 한 뒤 책임자가 되다보니 본인이 원하는 대로 하고 싶은 욕심이 생겼을 수도 있을 것이다. A가 여기서 이 말, 저기서 저 말 하는 상황을 B를 포함한 주변 인물들이 다 알고 있었다. 그리고 간혹 한 번씩 B와 주변 인물들은 “그게 아니다. 그렇게 하면 별 도움 안 된다.”고 지적했다. A는 그 상황이 심적으로 조금 불편했던 듯하다. A는 그를 옹호하는 인물들과 어울리면서 B와 그 주변 인물들에 대해서 뒷담화를 마구 하기 시작했다. 급기야 편이 나뉘었다. A를 지지하는 인물 중에 몇 살 어린 사람이 B를 포함한 주변 사람들에게 말을 함부로 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그 어린 사람은 손윗사람들에게 호칭을 부르지 않고 “저기요.”라는 무례까지 범했다. 

  더한 상황이 결국 벌어졌다. 매사에 꼼꼼히 장부를 정리하는 B에게 꼬투리를 잡으려 호시탐탐 노리고 있던 A는 어느 날 실수 아닌 실수를 한 B에게 말을 함부로 했다. 그 단체에 나오는 어른들이 대개 연세가 많아 본인이 주문한 걸 깜빡하는 경우가 많다. B는 그런 경우까지 일일이 체크해서 장기간 가져가지 않을 경우 본인에게 통보해서 확인시켜주곤 했다. 하지만 깜빡한 분들은 “나는 그런 적 없다.”며 순간 발뺌한다. 직접 사무실까지 가서 물건을 보여주며 확인시키면, “내가 여태 잊고 있었네.” 하며 고맙게 돈을 지불하며 가져가곤 했다. 그 날도 그런 상황이 일어났다. 연세 드신 분이 깜빡하고 “모른다.”고 답하니, 그 즉시 A가 나타나 B에게 “주문을 안 했다고 하는데 왜 물건을 가져가라고 다그치냐.”고 여러 사람 보는 앞에서 면박을 줬다. B는 참고 있다가 어르신을 사무실로 데려가서 주문 내용을 확인시켰고, 어르신은 “내가 잊고 있었네.”라고 말하며 돈을 내고 가져갔다.

  합창단까지 하는 B는 정산을 한 뒤 합창단모임에 가서 ‘내가 뭣 때문에 이런 모욕을 당하면서 해야 하나.’라고 생각하며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을 줄줄 흘렸다. 주변 사람들이 놀라 물으니 “아무 것도 아니다.”라며 눈물을 훔치고 무사히 끝냈다. 그리곤 총무를 그만 뒀다.
그런데 A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B가 하기 싫어서 총무를 그만 뒀다.”며 여기저기 떠들고 다녔다. 그 때까지도 A는 본인이 가진 문제점이 뭔지를 전혀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밀교라 불리는 일본 진언종은 심오한 경지를 말이나 글로 도저히 표현할 수 없다며 경전을 외움으로써 그 의미를 깨닫게 하고 마음을 정진해서 정각에 이르고자 표방한다. 글자나 언어의 한계를 직시한 것이다.

  말이 많으면 쓸 말이 없다. 쓸 말이 없으면 들을 말도 없다. 아니, 들을 가치도 없다. 인간이 평생 쓰는 말은 500만 단어 가량 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만약 여기서 인간이 평생 할 수 있는 말의 양을 100만 단어로 줄인다면 어떤 상황이 벌어질까? 함부로 여기저기서 말을 할 수 있을까? 함부로 쓰는 단어만 남을까, 아니면 말을 함부로 하는 인간과 그렇지 않은 인간, 두 부류로 나뉠까? 한계를 정해놓지 않은 건 인간 스스로 알아서 절제를 하라는 의미가 아닐까. 
  그런데 세상에는 말을 함부로 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절제의 미가 없어진 듯하다. 강아지는 한 번 짖는 것으로 사랑을 받기도 하지만, 동시에 미움과 증오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한 마디의 말도 충분히 그럴 수 있다. 한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면서 자신이 내뱉은 말을 돌아보는 시간을 한 번 가져보자. 남에게 상처 주는 말을 하지 않았는지 돌아보고 남이 나에게 상처를 준 말은 다시 반복되지 않도록 나는 쓰지 말아야겠다는 각오를 하는 계기를 다져보자. 모든 사람이 좋은 말로 서로 사랑 받고 은혜가 가득한 2018년이 됐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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