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래기 사랑
글. 박성철


  며칠 전 김장을 하려고 배추와 무를 뽑으러 ‘백 리 먼 길 텃밭’에 갔다.
내가 살고 있는 전주와 옥정호 주변에 있는 텃밭이 백 리나 되도록 멀리 떨어져 있기에 내가 붙인 이름이다. 그 먼 곳을 마다하지 않고 다니며 보살핀 덕에, 늦가을의 가뭄을 견딘 배추는 속이 꽉 차고 무는 살이 통통하게 올라있었다. 함께 간 딸이 한마디 했다. “아빠, 연로하신 아빠 엄마가 다니며 키우는 것을 배추가 보고 ‘우리끼리 잘 자라주자.’며 스스로 자라준 것 같은데요?”
 
  배추가 잘 자라도록 밭에 거름을 넣고 멧돼지가 짓밟지 못하도록 울타리를 치고 잡초도 뽑아주며, 때로는 농약도 치는 것은 나의 몫이었다. 또 따뜻한 햇볕을 주고 목말라할 때 수시로 비를 내려주는 등 잘 자랄 수 있도록 한 것은 우주만유의 몫이다. 그에 힘입어 배추는 땅에 튼튼한 뿌리를 내려 영양분을 섭취하고 속이 꽉 찬 배추로 자라 김장을 잘 하도록 은혜를 베풀고 있다.
 
  김장 때마다 옛일이 엊그제 일처럼 떠오르는 것은 백 리 먼 길 내 고향 텃밭의 진한 향수 때문인지도 모른다. 지금도 그렇지만 내가 어릴 땐 김장배추나 무를 거둔 밭에 시래기가 남았다. 아버지는 시래기를 주섬주섬 주워다 무시래기는 볏짚으로 엮어 헛간에 줄줄이 매달아 놓고, 어머니는 배추시래기를 소금물에 절여 항아리에 가득 담아놓았다. 그땐 시래기가 김치와 더불어 겨울양식의 하나였기 때문이다. 그것으로 우리는 겨우내 국을 끓여 먹거나 때로는 밥도 해먹었다. 허기진 배를 채우고 모자란 양식을 늘려 먹는 데는 그만한 것도 없다며, 시래기까지 준비하고서야 겨울양식 준비를 다했다며 어머니는 긴 숨을 내쉬셨다.

  한겨울 바람에 문풍지가 떨 때 따뜻한 물에 세수하고 문고리를 잡으면 손가락이 문고리에 얼어붙었다. 그렇게 추운 겨울에도 어머니가 끓여준 뜨끈한 시래기국에 밥 한 그릇이면 땀이 후줄근하도록 잘 먹었다. 시래기 밥을 양념간장에 비벼 먹으면서 허기진 배를 채우기도 했다. 7남매나 되는 우리 형제들은 배가 불러 만족하고 어머니는 그런 자식들을 보며 기뻐하셨다.
  그러던 시래기가 물질문명의 발달로 먹거리가 풍부해지면서 가난한 사람이나 먹는 먹거리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러나 돌고 도는 것이 세상이라 했던가? 옛날에는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함이었다면 요즘엔 영양가와 무공해로 따진다. 무시래기만을 전문적으로 말리는 덕장이 있는가 하면 농촌 수익의 한몫을 톡톡히 하는 농민의 수입원이 되기도 한다.

  며칠 전 옥정호 순환도로를 지나다가 무를 수확하는 것을 보았다. 무는 버리고 시래기인 잎만 수확하고 있었다. 시래기를 재료로 만드는 음식도 많이 개발되었다. 옛날에야 시래기국이나 밥이 전부였지만, 지금은 시래기 나물볶음을 비롯하여 지짐, 나물, 무침, 조림 등 요리법도 다양하다. 옥정호 주변에 있는 민물고기 매운탕 집은 엄청난 양의 시래기를 말리기도 한다. 누가 그 많은 것을 다 먹을까 해도 봄이면 다 소진된단다.
  먹을 것이 풍족한 요즈음도 나의 시래기 사랑은 유별나다. 매년 김장을 하고나면 시래기 챙기는 게 나의 몫이다. 지금부터 내년 봄까지 먹을 시래기를 준비해야한다. 일부는 삶아서 먹기 좋게 비닐 팩에 넣어 냉동실에 보관하고, 일부는 어머니가 그랬듯 소금물에 절여 항아리에 담아 시원한 곳에 내어놓는다.

  배추와 무를 수확하고 난 밭에서 내 아버지가 그랬듯 널려 있는 배추와 무시래기를 챙긴다. 배추와 무를 길러낸 시래기는 영양과 무공해 식품으로 다시 탄생되어 식탁에 오른다. 값비싼 선물을 주면 더 힘주어 감사하다고 하지만 보잘 것 없는 것을 주면 오히려 주고도 욕을 먹는 세상이다. 성의와 배려 없이 물질만능주의가 되어버린 탓 일게다. 값비싼 물건에만 감사할 일이 아닐 성싶다. 
 
  비록 보잘것없는 시래기지만 때로는 허기진 배를 채워주기도 했던 고마운 먹거리가 아니었던가? 그런 시래기를 주우면서 ‘감사하다.’고 생각한 것은 나 혼자만의 생각일까? 곁에 있던 아내의 손에도 어느새 시래기가 한 줌 쥐어 있었다. 우리의 손에서 새로 태어난 그 시래기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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