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생·대, 어떻게-무엇부터 할 것인가?
과연 새 시대 새 종교인가?
글. 유정엽

 교단에 대한 걱정을 나누던 중 선배 교무님이 한숨처럼 말씀하신다. “극하면 변한다고, 너무 어려워지면 소태산 대종사님이 다시 오셔서 해결해 주시겠지!” 나는 심술궂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대종사님이 오시면 다시 한 번 교법을 뜯어 고치실 것이고, 그러면 교단에서 신심 공심 없다고 쫓아낼 지도 몰라요.”

 3차 산업혁명을 넘어 4차 산업혁명의 시대를 맞이하고 있는 지금은 개교(開敎) 당시와는 노동·환경·가족제도 등 삶의 방식이 크게 바뀌어 있다. 소태산 대종사님이 다시 오신다면 분명 100년 전처럼 교법을 ‘시대화(時代化)·생활화(生活化)·대중화(大衆化)’ 하실 것이라 확신한다. 그것은 ‘시대화 대중화 생활화’가 단지 교리를 현실에 맞추어 변화시키는 것을 넘어 ‘교법의 본질’에 속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원불교는 초창기부터 ‘후천개벽시대에는 새 시대에 어울리는 새로운 도덕이 필요하기에 과거의 불교와 종교를 혁신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 혁신의 방향이 잘 정리되어 있는 것이 <조선불교혁신론>이다. <조선불교혁신론>은 소태산 대종사의 친저로 1920년에 부안 봉래정사에서 초안하여 1935년에 발간된 초기교서 중 하나이다. ‘시대화 대중화 생활화’를 혁신의 방향으로 제시하였으며, 결론으로는 ‘법신불 신앙’ ‘삼학병진’ ‘실지불공’을 말씀하셨다. 모두 교리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것으로,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교법은 ‘시대화 대중화 생활화’에 의한 결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시대화’는 시대에 맞추어 변화한다는 말로, 소태산 대종사는 <대종경> 교의품 33장에서 “인지가 발달되고 생활이 향상되는 이 시대에 어찌 좁은 법만으로 교화를 할 수 있으리요.”라 하며, 특히 문명의 발달이라는 시대적 상황에 맞추어 새로운 교법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크게 열리어 개인·가정·사회·국가·세계에 두루 활용할 수 있는 가르침이야말로 새로운 시대에 주체가 되어야 한다고 본 것이다. 실제적인 방법으로 과거의 불교와는 달리 ‘출가와 재가의 차별을 철폐하고, 교당은 교도가 많은 곳에 설치하고 남녀 교역자를 두루 양성할 것.’(서품 18장)을 말씀하셨다. 이렇게 시간의 흐름에 따라 가르침과 제도가 바뀌어야 한다는 것은 교단 초기에 국한 된 것이 아니며 좀 더 근본적인 영역에 속한 것이다. 정산 종사는 <정산종사법어> 원리편 34장에서 일원상의 진리를 ‘변하는 이치와 불변하는 이치’로 나누고, 변하는 이치를 공부하는 이유에 대해 시대의 변화를 따라 제도와 자신을 발전시켜서 상황에 끌려 다니지 말고 자신이 ‘변화’를 주재하기 위함이라 하였다. ‘불변하는 이치’에 따라 지켜야 될 가치를 지키되 자신의 마음과 조직의 제도를 갱신하여 ‘역사의 주인’이 되는 것이 시대화이다.

 ‘대중화’는 대중 사이에 널리 퍼져 친숙해지게 하는 것을 말한다. 소태산 대종사는 <대종경> 서품 16장에서 “부처님의 무상대도에는 변함이 없으나 부분적인 교리와 제도는 이를 혁신하여, 소수인의 불교를 대중의 불교로, 편벽된 수행을 원만한 수행으로 돌리자는 것.”이라 하시며, 몇몇 전문가들의 종교에서 널리 대중이 이해하고 함께 실천할수 있는 종교로 변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한문의 권위에 경도되었던 제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경전과 교서를 누구나 쉽게 배울 수 있도록 한글로 편찬하였으며, 제도와 수행법 역시 대중이 쉽게 다가설 수 있도록 하였다. 문자를 모르는 사람도 마음공부를 하게 할 수 있도록 한 ‘태조사법(太調査)’이 대표적이다.

 나아가 소태산 대종사는 일원상을 신앙하는 이유에 대해 ‘근원적인 진리를 현실적으로 대중에게 얼마든지 해석하여 가르칠 수 있기 때문’이라고까지 하고 있다. 원불교의 정체성이라 할 수 있는 일원상 신앙조차도 대중화의 결론이라 하신 것이다. 그것은 대중화가 단지 교세의 확장만을 목적으로 교리에 대한 접근을 쉽게 하고자 함이 아니기에 가능하다. 대중화는 다양한 대중에게 교법이 전달되어 함께 낙원세계를 이루려는 노력으로,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이라는 대승의 이상을 말하는 것이다. 소태산 대종사님은 제자들에게 ‘창생을 제도할 책임이 있다.’고 하셨고, 원불교 교도에게는 입교연원이라는 제도의 의무를 지게 하였다. 우리의 교법은 성불과 제중을 반드시 함께 해야 하는 대승의 바른 길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대중화는 ‘자리이타’라는 보살정신의 핵심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생활화’는 실생활에 응용되거나 생활 습관이 됨을 말하는 것으로, 소태산 대종사는 미래의 불법 혹은 종교의 핵심적 요소라 말한다. 인간의 삶을 떠난 종교는 그 가치를 구현할 수 없고, 도덕의 훈련 없이 욕망을 따르는 삶은 결국 파멸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그러기에 진리는 반드시 인간의 삶에 반영되고 생활화되어야 한다. 생활화는 사농공상이라는 노동과 인간의 삶을 떠나지 않는 교법의 실천을 말하며, 나아가 정당한 의식주를 수용하며 놀이와 여가 등 세간낙을 즐기는 것까지 포함한다. 교리를 일상에 적용하고 또 그로 인해 바람직한 사회생활을 영위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단지 심오한 진리를 생활에 활용하기 위해 수준이 낮은 실천을 제시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원불교가 추구한 생활화란, 진리와 현실이 둘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과거 대승불교 운동에서는 상좌불교가 윤회를 벗어난 피안(彼岸)과 열반(涅槃)의 세계를 추구하는데 비해, ‘생사(生死)를 떠나지 않고 열반(涅槃)을 건립한다.’고 하며 현실과 이상의 합일을 말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출가와 재가’의 엄격한 구분이 있었고, 차안(此岸)이 아닌 피안의 세계를 우월시 하는 경향도 있었다. 원불교 신앙의 결론은 처처불상(處處佛像)이며 수행의 결론은 무시선(無時禪)으로, 각각 불교철학과 선(禪)의 정점이라 할 수 있는 ‘사사무애관(事事無碍觀)’을 보편적인 중생의 관점에서 신앙하게 하고 ‘자성선(自性禪)’을 현실의 직업과 삶을 떠나지 않고 실천하게 하였다. 생활화의 다른 표현인 ‘불법시생활 생활시불법’의 구호는 바로 이곳 천상이 아닌 중생의 세계에서 최고의 경지와 가치를 남김없이 구현하겠다는 선언인 것이다.

 그러나 원기 102년을 맞이한 우리 교단을 보면 ‘일원상 사은사요 삼학팔조’로 문자화 되어 있는 가르침은 소중히 여기지만, 그 안에 담겨진 ‘시대화 대중화 생활화’라는 또 다른 본질 혹은 진리의 모습은 잊고 있는 듯하다. 개교 이후 세계와 우리 한국사회에는 너무나 많은 변화가 있었다. 그럼에도 우리는 삼동윤리 이후 새로운 교리 혹은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언어습관의 변화는 대중화의 결론이라 할 수 있는 <정전>을 예전 불경처럼 국문학 석사조차 이해하기 어려운 경전으로 만들었다. 당연히 <정전>에 나오는 교리용어들을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우리의 모습이 외부 대중들에게는 낯선 모습으로 다가온다.

 실제로 몇 년 전 설문을 보면 출가와 재가 모두 교단의 이미지를 느리고 침체된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우리가 새 시대의 새 종교라고 하기에도 부끄러운 상황이다. ‘시대화·대중화·생활화’로 교단의 한계와 정체를 극복하여야 한다. 그것이 일원상 진리를 통해 우리가 구현하고자 하는 진리의 실천이기 때문이다.



시대화, 어떻게-무엇부터 할 것인가?
불통을 인정해야 답이 보인다
글. 김현욱

 청소년과 청년들 위주로 얘기해 본다. <정전>, <대종경>, 법회, 의식… 한마디로, 어렵다.
몇 해 전 원음방송에 근무하는 절친 교무가 방송국 직원을 데리고 어느 교당 육일대재에 참석했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거룩하고 경건한 대재였지만, 방송국 직원은 1시간 30분 동안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못 알아들었고, 특히 고축문 읽는 시간은 고문 같았다고 한다. 교무인 내게도 대재 고축문은 어렵다.

훈련원에 오는 교도님들이 내게 부탁한다. 친구들에게 원불교를 설명하기 어려워서 한마디로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한다. 차라리 어려운 훈련을 시키지 말고, 도대체 원불교를 한마디로 뭐라고 말해야 하는지 가르쳐 달라고 한다. 이것이 현실이다. 어떻게 해야 할까? 단순히 ‘<원불교교전>을 시대에 맞는 언어로 바꾸자. 대재 고축문을 쉽게 고치자.’는 말이 아니다.

 원불교 교도, 교도가 아닌 사람, 원불교인 부모와 자식 사이, 불통되는 현실이 있다는 인식을 하자는 것이다. 현실을 인식하고 인정해야 비로소 어떻게 해야 할지 의문과 호기심을 갖게 된다. 교화현장의 어린이, 학생, 청년, 젊은 교도들과 어떻게 소통해야 할까? 그 마음과 마음을 어떻게 연결해야 할까? 

 첫째는 마음 연결을 위해 지속적으로 질문하고 답하는 과정 자체가 교화의 핵심이고 목적이 되어야 한다. 그것이 연결과 소통의 핵심이다. 어린이 교도에게 “교당이 재밌니? 교당에서 배우는 마음공부가 즐겁니?”, 공부에 지친 청소년에게 “교당이 좋니? 힘이 생기니? 교무님 만나 얘기하면 마음이 풀리니? 법신불 사은님, 사은사요, 삼학팔조 뭔 말인지 알겠니? 쉽게 알겠어?”라고 자꾸 물어야 한다.

 둘째로는 교리 교법이 감동을 줘야 한다. 단지 이해에서 끝나면 안 된다. “애들아! 대종사님의 은혜와 사랑에 대한 느낌이 왔니? 감 잡았어?” 이런 느낌이 서로 공유되고 즉시 체험되어야 한다. 청년교도가 방송국 직원이라면 방송인에 맞는 말, 게임을 좋아하는 아이라면 게임에 맞는 말, 아이를 키우는 부모라면 부모에 맞는 각자의 삶에 대한 고민과 갈등에 공감하면서 소통하는 언어로 다가가야 한다.

 셋째로 물질개벽에 대한 탁월한 안목과 지혜가 필요하다. 현재의 법회와 의식 그리고 설교는 고정된 생각 속의 관념화된 물질, 과학세계를 못 벗어나고 있다. 오늘날의 물질세력, 과학은 스마트폰이다. 전화기, 네비게이션, 컴퓨터, 쇼핑, 독서, 은행 업무 등 현실과 가상 생활의 모든 전자기기를 다 빨아들인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휴대폰 적당히 사용해라. 중독된다.”는 말이 그래도 통했다. 하지만 스마트폰이 생긴 이후 세상이 바뀌었다. 엄청난 물질세계, 정보의 바다, 데이터로 전 세계 누구와도 24시간 연결된다. 뛰어난 1인 교무가 전 세계 수십 만 명을 교화할 수 있는 시대다.

 넷째로 정신개벽을 바탕으로 물질세계에 능동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원불교 마음공부 실천으로 일과 생활이 행복해지는 주도적인 흐름을 잡아야 한다. 중2 아들이 있다. 공부는 하루 쉬어도, 밥은 안먹어도, 컵라면 먹어가며 2시간씩 꼬박꼬박 게임을 한다.
이 아이들은 화면이 2~3분만 지연되거나 정보가 바로 뜨지 않으면 화면을 넘겨 버린다. 텔레비전을 보다가도 수시로 500개가 넘는 채널을 돌린다. 이 아이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원불교 채널을 찾아서 와라. 교당에 나와라. 천천히 곱씹어가면서 대종사님 말씀을 이해해보자.” 인내심 있게 기다려 줄 아이들은 없다. 여기에 더욱 엄청난 사실은 이 아이들이 자라서 예비교무가 되고, 젊은 부교무가 된다는 점이다. 50대 이상 교무, 교도들은 이 놀라운 창조적 게으름(?)의 세대들을 맞이하고 더불어 살아야 한다.  

 다섯째로 자유로운 소통문화에 바탕한 지자본위가 정착되어야 한다. 예비교무와 수위단원, 신규 부교무와 원로교무, 교도와 교무, 부교무와 주임교무, 단원과 단장중앙이 어디서든지 “왜요? 어떻게요? 어떤 마음이요?” 하고 말을 나눌 수 있어야 한다. 망설이지 않고 궁금하면 누구에게라도 물어볼 수 있는 환경과 토론 문화가 조성되면 좋겠다. 눈치를 보거나 질문을 막는 조직문화는 의욕을 꺾는다.

 요약하면 이 시대 청년, 청소년교화를 살려내는 원불교 재가출가 공동체의 생명력은 소통, 감동, 안목과 지혜, 능동성, 지자본위이다. 생생한 생명력을 가진 지혜로운 자는 전 세계에 참다운 지혜와 영성을 기꺼이 나눠주는 사람이다. 그 사람은 재가출가를 초월한다. 온화한 가운데 밝은 미소로 아픈 마음을 치유해 주는 사람이다. 넉넉하고 맑은 비움을 말뿐이 아닌 지금 여기에서 바로 체험시켜 주는 사람이다.

 십자가가 모셔진 성전이라야 교회가 아니고, 하나님 사랑이 있는 곳이 진정한 교회다. 불상이 모셔져야 법당이 아니고, 부처님 자비가 있는 곳이라면 모두 법당이다. 일원상이 모셔진 건물이어야 교당이 아니고, 현실이든 가상이든 사은의 은혜와 치유의 체험이 일어나는 그 모든 곳이 교당이다. 그래야 배도 고프고 영혼도 고픈 청년, 청소년들이 스마트폰으로 검색해서 전 세계에서 우리를 찾아올 것이다.

 

생활화, 어떻게-무엇부터 할 것인가?
삶이 교법으로 변화하는 맛
글. 김유인


 대종사님께서 교법의 생활화를 강조하심은 종교가 ‘평상심(平常心)이 곧 도(道. 진리)’인 자리를 알지 못하거나, 자신들의 지위를 지키기 위하여 그 본의를 따르지 않거나, 성과 속을 나누고 진리와 생활을 나누어 분별의 세계를 만들어 성현의 본의와 가르침에 반하여 이어져 왔음을 안타깝게 여김이라 여겨진다.

 이러한 폐단을 없애고 진리와 생활이 둘이 아니니 내 삶 속에서 온전히 깨어 있는 마음으로 일상 생활을 잘 사는 것이 곧 참 삶이요. 진리의 삶임을 ‘생활화’라는 표어로 가르쳐 주신 것이다.

 현재 일선의 교화 현장은 점차 고령화 되어가고 있고, 젊은 교도들의 유입은 더디기만 하다. 더 큰 문제는 깊은 공부와는 멀어지고 ‘귀만 호강하는 공부’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성현의 가르침이 지식으로만 머무른 탓에 타인에 대한 시비에만 밝고 스스로를 반조하지 않는다. 교단 내 구성원들의 철저한 자기반성과 획기적인 사고의 전환이 없고서는 교단의 미래를 장담할 수 없다.

 이러한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귀만 호강하는 공부가 아닌 공부와 생활이 둘이 아닌 ‘산 공부’를 해야 한다. 과거 유가에서는 예(禮)·악(樂)·사(射)·어(御)·서(書)·수(數)·육예(六藝)를 갖춘 사람을 군자(대인) 즉 공부인이라 하였고, 대종사님께서는 영육쌍전이라 표현해 주셨다. 하지만 지금 교단과 세상의 현실은 지식 위주의 공부, 즉 서(書) 중심의 공부인을 중시하고 있다. 그러하다 보니 성현의 가르침이 내 삶 속에서 나투어지지 않고 이러한 가르침의 필요성조차 의문시되면서 그저 말씀으로서만 좋은 것에 그치고 있다.

 이러한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첫째 성리에 바탕한 공부가 내 삶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모든 문제가 발생하였을 때 가장 적절한 방법은 본질, 근본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대종사님께서는 낙을 버리고 고로 들어가는 이유로 고락의 근원을 알지 못한 것을 첫째로 뽑으셨다.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을 보면, 개교의 동기에서도 밝히셨듯이 끊임없이 진화하는 물질문명에 욕망과 분별로 가득하기에 파란고해에 헤매이고 있다. 이것이 심화되어 고(苦)가 고(苦)인줄조차 모르고 살아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젊은 교도들과 대화를 하다보면 주변 인연들이 “인성이 훌륭하지 않아도 다 잘 먹고 잘 살고, 정직하게 살지 않아도 다 잘 사는데 무엇 때문에 고달프게 공부를 합니까?” 하면서 공부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고 말한다. 아니, 오히려 공부를 하면 나만 손해 보는 것 같다고 한다. 이는 우물 안 개구리가 우물 밖의 세상이 존재함을 알지 못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그만큼 현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좁은 안목으로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현시대를 살아가는 대중들은 대(大)자리를 놓치고 소(小)자리에 치우쳐 살아가면서도, 끊임없이 고뇌하고 번민하면서도 그 울타리를 벗어나지 않으려고 한다. 그러니 더욱 교당에서부터 성리에 바탕한 공부가 잘 이루어지고 있는가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세상을 살다보면 대자리가 주(主)가 되어야 할 때가 있고, 소자리가 주(主)가 되어야 할 때가 있다. 대소유무 변화의 자리를 명확히 알아야 대소를 넘나들며 그 때에 맞게 마음을 사용할 수 있는 공부가 우리들부터 될 때, 진리의 소리를 내 삶 속에서부터 느끼며 살아갈 때, 대종사님께서 천명하신 생활화가 살아나리라.

 둘째 마음공부를 통해 실생활에서 낙도생활을 유도해야 한다.대종사님께서는 무엇을 배우고 무엇을 가르친다고 했는가? 바로 용심법, 마음 사용하는 법을 가르친다고 했다. ‘이 마음을 가르쳐서 무엇을 얻고자 함인가?’에 대한 성찰이 있어야 한다. 먼저, 이 챙기는 마음이 내 삶의 중심임을 자각시킬 수 있어야 할 것이며, 이 마음을 잘 사용함으로써 심리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내 삶에 진급과 향상이 되고, 더욱 윤택해져야 설득력을 얻을 수 있다.

 그러기위해서는 마음공부를 앞서서 하고 있는 교무님들의 삶을 바라보며 ‘아! 교무님께서는 마음공부를 하시니 저렇게 평안하시구나! 저렇게 인생이 행복하시구나!’라는 생각이 들도록 해야한다. 보여주기 위해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이 공부를 우리들이 먼저 각자의 삶 속에서 이 맛을 보고 살아가면 자연스럽게 그 기운이 전해질 것이다. 그 기운이 교당 구성원에게 전해지고 교당 구성원들은 각자의 삶의 터전에서 이 마음공부를 통해 생활이 윤택해지고, 이를 밝히고 전하는 전도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이 법을 믿고 받들며 공부하고 있는 우리들 먼저 생활 속에서 그 공부의 맛을 끊임없이 볼 수 있는 노력이 필요하다.

 

대중화, 어떻게-무엇부터 할 것인가?
뜨거운 정의(情誼)의 사랑만이 최대 무기
글. 오성

 생명과학이 주도하는 4차 산업혁명시대가 도래하고 있다. 산업의 변화는 시대의 변화이며 흐름이다. 변화하는 시대에 교법의 대중화는 어떤 방향이어야 할까? 자칫 교법의 대중화를 교당의 대형화라는 인식 속에 가두어 교당과 교도 수를 늘리기만 해서는 안 될 것이다.

 대중적이라는 의미는 일반 대중 사이에 어떤 사물이나 사상이 널리 퍼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교법의 대중화는 원불교 교법의 핵심인 은혜와 감사가 널리 퍼져서 서로가 없어서는 살 수 없는 인식이 보편화된 세상을 뜻한다. 불교 혁신으로 출발한 원불교의 궁극적 목적은 대중과의 접점을 최대한 넓혀 더 많은 이들에게 영원한 낙을 누리게 하는 은혜 세상이다.

 이에, 우리는 원불교 2세기를 열어 가며 스스로에게 반문하여야 한다. 우리는 합리적인가? 우리는 평등한가? 우리는 뜨거운 은(恩)을 발견하여 정의(情誼)의 세계로 나아가고 있는가?

 하나. 우리는 시대의 흐름을 제대로 읽고 있는가?
 과거에는 건물이나 광장이나 어떤 특정 장소에 모여 공사를 논의하고 소통하는 장이 필요했다. 이를 위해 ‘연원달기’ ‘교화단 불리기’ ‘연원교당 만들기’라는 교화 3대 목표를 추진하여 교당을 늘려갔다. 그러다보니 건물을 짓고, 지키고, 유지하는데 많은 에너지를 쏟으며 법신불이 모셔진 법당을 갖추고 교당을 지키는 것을 우선순위로 삼았다. 하지만, 멋진 외모보다 더 중요한 건 내면의 울림이다. 하드웨어보다 더 중요한 건 소프트웨어다. 거점 건물은 꼭 필요하지만 건물에 쏟을 에너지를 ‘경전의 정수를 가려 일반 대중이 다 배울 수 있게 하는 프로그램’을 개발하는데 쏟으면 어떨까? 건물을 짓지 말라는 것은 아니다. 교법을 알리고 함께하는데 에너지를 더 모았으면 한다. 우리의 교법이 필요한 곳에서 교법을 활용할 수 있도록 하는 교법 연구소가 교당 건물보다 더 많아졌으면 한다. 어린이, 학생 법회에 오는 아이들은 소수이지만, 잘 만들어진 인성교육 프로그램은 각 학교에서 수십 수백 아이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 교당에 오는 교도님만 바라보지 않고 시대에 맞는 인문학적 강연으로 대중과 만날 수 있는 그 날을 꿈꿔 본다.

 정복을 입은 성직자이기 때문에 존경받는 시대는 지나가고 있다. 참다운 실력으로 사실적 수행을 하고 있어야 하는 그 자리에 꼭 필요한 교화자야말로 교단의 힘이다. 교화연구소뿐만 아니라, 선(禪)연구소, 명상연구소 등 교법에 바탕한 새로운 방편으로 세상에 나아간다면, 건물을 지키며 고정된 자리와 장소에서 손님이 오기만을 기다리는 우(愚)를 넘어설 수 있지 않을까?

 둘. 우리는 평등한가?
 ‘대종사께서는 하늘만 높이던 사상을 땅까지 숭배하게 하시고, 아버지만 위하던 사상을 어머니도 같이 위하게 하시며, 선비만 숭상하던 정신을 농·공·상(農工商)도 아울러 평등하게 하시고….’(<대산종사법어> 교리편 13장)

 법회는 신앙과 수행의 과정으로 구성되며 삼학수행이 녹아져 있다. 법회는 법을 오롯이 담는 시간이기도 하지만 많은 법연을 만나 인연을 맺고 관계를 형성하며 개인이 가진 특성이 부딪혀 소리를 내는 장이기도 하다.

 서울대 심리학과 최인철 교수는 행복을 위한 조건으로 ‘경험에 돈을 투자하라, 행복한 사람 옆으로 가라, 행복한 제3의 공간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회사나 집과 같은 제1, 2의 공간이 아닌 제3의 공간을 가진 사람이 행복하다는 것이다. 제3의 공간은 격식이나 서열이 없는 곳, 소박한 곳으로써 수다와 출입의 자유와 음식이 있는 특성을 보인다. 우리 교당이나 법당이 제3의 공간이 될 순 없을까? 요즘 사람들이 제3의 공간으로 카페를 찾는 이유를 통해 우리 교당과 법회 문화가 이런 요구를 해소해 줄 수 있도록 변화해가면 어떨까?

 대종사께서는 재가와 출가에 대하여 주객의 차별이 없이 공부와 사업의 등위만 다르게 하고, 출가 공부인의 의식 생활도 각자의 처지를 따라 직업을 갖게 하자고 하셨다. 또한 결혼도 각자의 원에 맡기자 하시고 예법도 번잡한 형식 불공법을 사실 불공을 주로 하여 세간 생활에 적절하고 유익한 예법을 더 밝히자고 하셨다.(<대종경> 서품 18장) 시대의 흐름이 빠르게 변화하여 여성이 일과 가정을 병행하며 모두가 직업을 갖는 시대이다. 재가출가의 차별, 남성과 여성의 차별, 결혼 결정권의 차별을 평등하게 하고 사실적 불공과 출가의 직업을 통한 영세 교당의 자립 등 변해야 할 것에 유연하면 좋겠다. 

 셋. 우리는 뜨거운 은(恩)을 발견하여 정의(情誼)의 세계로 나아가고 있는가?
 대종사께서는 은(恩)의 핵을 보유하시어 태양보다도 더 뜨거운 정의(情誼)와, 생명을 다 바쳐도 여한이 없는 정의의 핵을 전 인류와 전 생령에게 전해 주셨다. 없어서는 살 수 없는 관계 속에 너와 나와 우리는 함께 살고 있다. 대산 종사께서는 ‘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뜨거운 정의(情誼)의 사랑만이 최대의 무기’라고 하셨다.(<대산종사법문집> 제3집 제2편 교법 63)

 가정의 화합도, 사회의 안정도, 세계의 평화도, 이 뜨거운 정의의 사랑이 있어야 이룰 수 있다. 부처님도 이것이 빠지면 자랑할 것이 없다. 오직 은(恩)의 덩치일 뿐이다. 그러므로 성자들은 자비와 인과 사랑과 은을 무기 삼는다. 뜨거운 정의의 사랑만이 인류와 일체 생령의 굳은 업력을 다 녹여 주고 죄고의 구렁텅이에서 구원해낼 수 있다. 대중화의 성공 여부는 공감과 위로를 통한 감화력에 달려 있고, 이는 뜨거운 정의(情誼)라는 사랑의 무기로 해내게 된다.

 교화는 정법에 바탕한 사랑과 은혜로 감동을 주는 것이다. 감동을 주려면 먼저 자신의 가슴속 한과 살을 풀어내는 일과 자신을 믿고 사랑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열정, 즉 기·끼·깡이 넘치도록 깨어 있어야 그것을 실현해낼 수 있다. 가장 가슴 뛰는 것부터 해가도록 나와의 깊은 대화를 나누고, 관념과 제도의 울을 벗어나 기도 명상으로 자유로울 수 있는 신앙을 하는 원불교가 되면 좋겠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안도현 시인의 ‘너에게 묻는다’의 한 구절이다. 인생길에서 진리에 한번이라도 뜨겁고 간절했던 기도와 구도를 해봤다면 그것만으로도 괜찮지 않을까? 교도 한 사람 한 사람이 내가 먼저 양보하고 이해하여 뜨거운 정의가 건네도록 정성을 다한다면 긴 겨울 끝에 봄바람이 불 듯 원불교 교법이 대중 속에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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