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성평등 실현의 길 -‘약자가 강자되는 법’의 세계사적 의미 -

글. 박윤철


 한국에서 여성차별은 현재진행형이다. 2016년 5월 17일, 서울 강남역 근처 공용화장실에서 한 남성이 아무런 연고도 없는 젊은 여성을 무참하게 살해했던 사건이 그 전형적 사례라 할 것이다. 매년, 스위스 다보스에서 열리는 세계경제포럼(일명 다보스포럼)은 지난 11월 2일에 세계 각국의 성 격차(性 格差) 지수를 발표했다. 그 결과에서 2017년 현재 우리나라의 성 격차 지수는 세계 144개국 중에서 118위였다. 우리 경제가 세계 경제에서 차지하는 순위가 10~11위인데 성 격차 지수가 118위라는 얘기는 우리 사회에는 여전히 아주 강고한 남녀차별, 곧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구조와 제도, 다시 말해 양성 불평등 구조가 대단히 뿌리 깊게 남아 있다는 증거다. 한국사회의 양성 불평등을 상징하는 가장 대표적인 제도로 악명이 높았던 호주제(戶主制) 철폐운동을 이끌었던 고은광순 씨는 이렇게 말한 바 있다. “흑인에 대한 차별도 심하지만 그보다 더 심한 것이 남녀차별입니다. 성차별, 여성에 대한 차별은 인류 최후의 식민지입니다.” 이 말은 여성에 대한 차별이야말로 전 지구적인 문제임과 동시에 그 극복이 참으로 지난(至難)함을 역설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그렇다면 이 같은 여성차별에 대해 원불교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 그 해답을 교단 초기 역사 속에서 찾아보고자 한다. 초기 교단사 속에는 ‘자랑스러운 보물들’이 많다. 그 보물 가운데 가장 먼저 주목해야 할 것은 ‘남녀권리동일’로 대표되는 양성평등 교리에 입각한 제도를 마련하는 한편, 그것의 제도화와 사회화를 위해 줄기찬 실천을 계속해 왔다는 사실이다. 주지하듯이, 소태산 대종사는 1920년(원기 5)에 선천 5만 년 동안 이어 온 남녀차별을 극복하기 위해 ‘남녀권리동일’을 선언했다. 일원상(一圓相)의 진리에 입각하여 남녀는 본래 ‘성품에 차별이 없다.’고 선언했다. 이 선언이야말로 선천 종교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위대한 가르침이었다. ‘일체중생의 본성(本性)’ 자리에는 그 어떤 차별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소태산의 가르침! 그것이 지니는 세계사적 의미는 과연 어떠할까? 대종사께서 ‘남녀권리동일’을 선언하던 그 시기의 영국과 미국과 일본 등에서는 아직 여성들에게 완전히 평등한 선거권이 주어지지 않고 있었다. 이웃 일본의 경우만 보더라도 1945년 이후에야 여성에게 비로소 남성과 똑같은 선거권이 주어졌다. 따라서 원기 5년에 소태산이 ‘남녀권리동일’을 선언한 것은 세계사적으로 엄청난 사건이다.

 그런데 1920년(원기 5)의 ‘남녀권리동일’ 선언 이상으로 주목해야 할 법문이 1928년(원기 13)4월 어느 날, 서울 계동(桂洞) 이공주 선진의 집에서 이루어졌다. ‘약자가 강자되는 법문’이 바로 그것이다. 이 법문은 1928년 5월 31일에 간행된 불법연구회 기관지 <월말통신(月末
通信)> 제1호에 이공주의 수필(受筆)로 실려 있다. 이 법문이 이루어진 당시 상황으
로 들어가 보자.

 무진(戊辰) 윤(閏) 2월 26일 오전 10시경에 선생주(先生主)께서 창신동으로부터 제자 송규(宋奎) 씨를 데리시고 계동 이공주가(李共珠家)에 오시니, 그곳에는 자연화, 성각, 공주 등이 복대(伏待)하고 있다가 반가이 맞아 뵈시고 실내로 들어가 좌정(坐定)) 하옵셨다. 이윽고 또한 각처에서 몇몇 회원이 모이니 철옥, 현공, 성원, 동진화 등이었더라. 

 이 법문을 들여다보면, 우선 무진년은 서기로 1928년이다. 윤 2월 26일은 음력 날짜를 말하는 것이니 양력으로 환산하면 4월 16일이다. 선생주는 소태산 대종사를 말하며, 창신동은 당시 불법연구회 경성지부가 있던 곳을 가리킨다. 대종사와 동행한 제자 송규는 초대 교무 송도성을 대신하여 원기 12년에 경성지부 제2대 교무로 부임하여 재임 중에 있었다. 원기 13년 곧 1928년 봄에 서울에 올라온 대종사께서 경성지부장 송규를 대동하고 제자 이공주의 집에 행가하여 여성 제자들 앞에서 설한 법문이 바로 이 ‘약자가 강자되는 법문’이다.

 이 법설은 원불교 100년사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기념비적인 법설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이유는 첫째, 1928년은 제1대 1회를 마감하고 제2회가 시작되던 첫해였다. 1916년의 대각, 1918년의 방언공사와 1919년의 법인성사, 1920년의 교강 선포, 그리고 1924년의 회상 공개 등 회상 창립에 필요한 핵심 인프라를 성공적으로 구축한 시기가 바로 제1대 제1회의 시기였다. 제2회 12년을 새롭게 여는 첫 해에, 그것도 서울 한복판에서 설한 법문이라는 점에서 이 법문은 아주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둘째, 이 법문이 <월말통신>이라는 불법연구회 기관지 창간호에 실린 법문이라는 점이다. 모든 잡지나 신문이 그러하듯 창간호는 그 잡지나 신문이 구현하고자 하는 방향을 상징적으로 제시한다. 그런 견지에서 창간호에 실린 이 법문은 불법연구회가 지향해 가야할 길을 상징적으로 제시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나 이 법설이 지닌 의미 가운데 더욱 중요한 점은, 바로 여성 제자들을 대상으로 설했다는 사실이다. 당시 서울 계동 이공주가에 모였던 여성 제자들은 과연 어떤 처지에 놓여 있었을까? 1983년 6월 30일부터 138일간 한국방송(KBS)은 이산가족찾기 생방송을 했다. 그때 한국전쟁 등으로 헤어진 가족을 찾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가족의 이름을 써서 들고 나왔는데 대부분 노인과 여성이었다. 여성들의 이름 가운데는 뒷방네, 앞방네, 국푼네, 밥푼네 등등 이름이라고 볼 수 없는 이름이 많았다. 그 가운데에는 샛별이란 이름도 있었는데, 샛별 곧 새벽별이 뜰 때 일어난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참 많이 울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이들 이름은 이산가족 여성들이 처해 있던 사회적 처지를 너무나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1983년의 일이었으니, 1928년의 여성들의 처지는 더욱 열악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런 여성 제자 앞에서 소태산은 약자가 영원히 강자로 진화하는 길을 역설하셨던 것이다.

 ‘약자가 강자되는 법문’은 지금까지 주로 제국주의 일본과 식민지 조선과의 관계를 상징하는 법문으로 읽혀 왔다. 그러나 그보다 더 주목해야 할 것은 선천 5만 년을 지탱해 오던 가부장적 구조 속에서 온갖 차별과 억압에 시달리고 있던 식민지 조선(植民地 朝鮮)의 여성들에게 내린 법문이라는 사실이다. 이른바 ‘이중 구속’ 상태에 놓여 있던 여성 제자들에게 전하고자 한 소태산의 핵심 메시지는 아래와 같다.

 참 정신이 박히고 대강의 예산이라도 있는 자가 있으면, 생명 하나 없이 할 일 없이 강자가 꼭 되는 법이 있나니라. 그 법은 을동리의 강자들이 와서 압제를 하며 토지와 전곡을 빼앗으며, 여러 가지로 압제를 한다 하여도 아무 소리 말고 종노릇을 잘하여 주며, 경우에 따라서 매라도 맞고, 약자의 분수를 잘 지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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