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읍 화해리, 성지(聖地)의 감
글. 김광원

 성지(聖地)에서 감이 익어간다. 수령 70년은 족히 넘을 감나무 가지에 올해는 예년과 달리 제법 많은 감들이 매달려 있다. 이 나무는 집 대문 쪽으로 서 있는데, 오늘따라 이 나무가 없으면 참 허전한 정원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원불교 화해교당을 옆구리에 두고 교당 가는 길을 바라보며 노목은 아직도 당당하게 서 있다.

 익어간다는 것. 그것은 얼마나 거룩한 일인가. 비바람 속에서 그 많은 시간을 보내고 이렇게 매달려 있다는 것만 해도 참 대견한 일이지. 감을 지금 따야 한다 해도 서리를 맞은 뒤에 따야 한다고 주장하는 아내의 말을 떠올리며 대나무 끝에 작은 나뭇가지를 끼워 놓고 철사로 동여매었다. 며칠 후면 아마 첫서리가 내릴 듯싶다.

 주황에서 점점 붉은 빛으로 변해가는 11월 첫 토요일 오후, 정원의 여기저기 둘레에서 붉게 타들어가는 단풍나무와 노란 빛으로 눈부시게 빛나는 은행나무가 마치 한 짝이나 되는 듯이 절묘하게 어울린다. 끝없는 시간과 공간으로 이어져 있는 지금의 한 순간 속에 나무는 서 있다. 별과 교감을 나누며 밤새 서 있다가, 매일 아침 쨍쨍 떠오르는 해를 맞이하고, 또 커다랗게 떠오르는 보름달을 머리에 이고 서 있는다는 게 얼마나 큰 감동인가를 나무는 꼭 알고 있을 것처럼 여겨진다.

 그런 나무와 붉은 감을 바라보며 나는 한 사람 떠오르는 분이 있었다. 천이두 선생님. 나에게 ‘삭임’이란 단어를 알려주고 홀홀히 저 세상으로 가신 분. 세상이 온통 무덥던 지난 7월, 십 년 가까이 돌아오지 않는 기억마저 아예 놓아버리고 이승의 강을 건너신 것이다.

 선생님은 ‘한(恨)’은 익어가는 것이라고 하였다. 원한이 탄식이 되고 그게 안에서 삭고 익어져서 정한(情恨)이 되고 간절한 원(願)도 이룬다는 것이다. 내부에서 ‘질적 변화’를 이룬다는 것이다. 춘향이가 그랬고 심청이가 그랬듯이 이 ‘질적 변화’란 곧 ‘고통’을 삭이는 과정에서 일어난다. 같은 한(恨)이라도 중국과 일본에서는 그 내포한 의미가 다르다. 그래서 천이두 선생님은 이를 ‘한국적 한’이라고 따로 구별하였다.

 선생님은 또 불교에서 말하는 ‘번뇌즉보리(煩惱卽菩提)’도 일종의 이런 이치라고 하였다. 깨달음도 아픔을 끌어안는 긴 수행의 과정 속에 이루어지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 대신 돈오돈수도 아니고, 돈오점수도 아니고, 점수돈오와 같은 것이라고 하였다. 감은 꼭 그렇게 ‘점수돈오(漸修頓悟)’로 서서히 익어가는 것이다. 떫은 것 없이 어떻게 감미로운 맛을 끌어올 수 있을 것인가.

 미완의 동학혁명 이후에 우리 민족은 무수한  몸부림을 하며 지나왔다. 일제의 식민지가 되었고, 삼일운동이 있었고, 한국전쟁도 있었고, 4·19혁명, 유월항쟁, 5·18민주화운동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질곡을 거치며 모질게 살아왔다. 그러나 우리 민족은 긴 억압의 역사 속에 누적되어온 고통의 덩어리, 그 쌓이고 쌓여온 민중의 한을 안으로 삭이며 지내왔고, 마침내 죽창이 아닌 비폭력의 촛불을 들고 새 역사를 이루어냈다. 한을 무력과 복수심으로 풀어낸 게 아니라, 고통을 안으로 삭이며 긍정적 에너지를 키워온 성숙한 시민 의식, 그 힘으로 세계사에 유례없는 촛불 혁명을 이루어낸 것이다. ‘한국적 한’ 그 ‘삭임’의 힘이 진흙탕 속에서 연꽃을 피워 올린 것이다.

 오늘은 새벽 일찍 다른 때보다 좀 이르게 강아지 ‘코코’와 함께 산책을 나갔다. 다소 어두우나 뒷산으로 오르는 길은 참 신선하고 상쾌했다. 산에 오르고 보니 감탄할 만한 광경이 나를 맞이한다. 멀리 동쪽의 산등성이 위로는 붉은 빛이 희미하게 이어져 있고, 그 위로 샛별이 하나 초롱하게 반짝인다. 반대편 서쪽으로는 어제 전주로 오는 길에 보았던 보름달이 아직도 지지 않고 환하게 빛을 발하고 있는데, 젊은 날의 어느 새벽 지리산 능선을 걸으며 신비롭게 바라봤던 바로 그 보름달이다. 샛별과 보름달 사이의 이심전심. 불현듯 정읍 북면 화해리, 그 붉게 익어가던 감들이 떠오른다.

 천이두 선생님은 <한의 구조 연구>에서 원불교의 ‘일상수행의 요법’ 다섯 번째 “원망 생활을 감사 생활로 돌리자.”를 ‘한국적 한’의 예로 들면서, “한국적 한에 있어서의 원(怨)이 정(情)으로 이행해 가는 양상과 궤를 같이 하고 있다.”고 하였다. 단풍도 절정에 이른 지금, 내 속의 떫은 것들은 잘 익어가고 있는가. “삼천 년 깊은 숲속을 숨 가쁘게 오셨어라.” 소태산 대종사와 정산 종사의 만남의 땅, 화해제우(花海際遇) 성지에서 감이 익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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