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이 세상에 온 이유 -훈련법의 제정과 제1회 정기훈련-

글. 박윤철

 1960년대 미국에서는 ‘인디언 부흥 운동’이 대대적으로 일어났다. 그 결과 1978년에 미국 의회에서는 인디언들의 종교적 자유를 허용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이 법안 통과를 전후하여 인디언에 관한 책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한국에서도 두터운 독자층을 형성했던 <나를 운디드니에 묻어주오>(1970년),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1976년) 등이 대표적이다.

 바로 이 무렵 영성(靈性)에 목마른 백인들이 보호구역에 거주하는 인디언 출신 영적 스승을 찾아 지혜를 구하는 움직임이 성행하기 시작했다. 그때 백인들이 인디언 스승에게 자주 물었던 질문 가운데 하나가 바로 “우리가 이 세상에 온 이유가 무엇입니까?”였다. 백인들의 질문에 인디언 스승들은 간단한 한 마디로 대답했다. “영적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라고.

 우리가 이 세상에 온 이유가 ‘영적 성장을 위해서.’라는 인디언 스승의 교시(敎示)에 대해 우리는 두 가지 선택을 할 수 있다. 하나는 우리가 영적 성장을 위해 이 세상에 왔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사실을 거부하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영적 성장을 위해서 이 세상에 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순간 우리의 삶은 크게 바뀔 것이다, 왜냐하면 내 삶의 방향에 대한 명확한 방향성이 세워져 기꺼이 영적 성장의 길로 나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새 회상을 정식으로 공개한 지 채 1년도 되지 아니한 1925년(원기 10) 음력 3월에 소태산 대종사는 ‘훈련법(訓練法)’을 제정하여 발표한다. 이어서 같은 해 음력 5월 6일에 3개월간 이어지는 제1회 정기훈련 일명 하선(夏禪)을 실시하였고, 같은 해 음력 11월 6일에 역시 3개월간 이어지는 제2회 정기훈련 일명 동선(冬禪)을 실시하기에 이른다. 제1회 정기훈련의 경우에는 익산총부 구내에 훈련생, 곧 선객들이 거주할 만한 거주 공간도 미처 준비되지 않은 처지였음에도 혜산 전음광 선진님의 사가(私家)를 임시로 빌려 10여 명의 선객이 거주하면서 3개월 정기훈련을 났다. 제1회 정기훈련이 얼마나 궁색한 상황 속에서 이루어졌는지 그 생생한 광경을 전하는 기록이 남아 있다. 아래에 인용한다.

본회는 수양 연구가 주요 목적인 바 선기(禪期)는 급박하고 입선(入禪) 지원자가 유(有)한데 장소가 미비하니 차(此)를 여하히 하느냐 함에 전세권(全世權;전음광 선진의 본명) 씨가 자기 가옥 일부를 선실(禪室)로 양허하거늘 임시 부인선원(婦人禪院)을 씨의 가(家)에 치(置)하기로 하고 일반은 그 장의(壯意)를 무수히 찬하(讚賀)하다. (‘불법연구회 제 2회 평의원회 회의록’,1925년 음력 4월 1일)

 위 내용에서 우리는 새 회상 초기의 간난한 형편 속에서도 그 설립 목적인 수양·연구를 위해 장소 미비라는 어려운 형편을 임시방편으로 돌파하면서까지 반드시 정기훈련을 시행하고자 하는 강력한 의지가 드러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제1회 정기훈련 지도교무는 영광스럽게도 정산 송규 종사가 손수 주재하였으며, 훈련 과목은 염불, 좌선, 경전, 강연, 회화, 문목(問目), 성리, 정기일기, 주의, 조행, 수시설교(隨時說敎) 등 11과목으로써 현행 정기훈련 11과목과 유사했다. 물론 이 11과목은 정신수양, 사리연구, 작업취사의 삼학(三學)을 집중적으로 단련하는 교과목들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궁금증이 생긴다. 왜 소태산 대종사는 훈련법을 시행할 만한 여건도, 그 훈련법에 근거한 정기훈련을 제대로 시행할 만한 제반 조건도 완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서둘러 훈련법을 제정·발표하고, 서둘러 정기훈련을 실시했을까 하는 의문이다. 필자는 단정한다. 그 이유는 바로 대종사 역시, 인디언의 영적 스승들처럼 ‘일체 중생의 영적 성장을 간절히 바랐기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특정종교에서 ‘훈련’이라는 용어를 쓰는 경우는 원불교 외에는 거의 없는 것으로 안다. 그래서 혹자는 원불교 초기의 선진들이 ‘훈련’이라는 용어를 아무런 생각 없이, 외부로부터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것이 아니었겠는가 하는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같은 문제 제기는 그야말로 소태산의 본의를 이해하지 못하는 무지의 소치에서 오는 것이다. 새 회상 초기에 대종사께서 ‘훈련’이란 용어를 강조하고, 서둘러 훈련법을 제정하며, 또한 서둘러 제1회 정기훈련을 실시한 근본적 이유! 그것은 어디까지나 우리가 이 세상에 온 근본적 이유인 ‘영적 성장’의 바른 길을 명확하게 제시하고자 했던, 근대한국의 위대한 영적 스승인 소태산 대종사의 강력한 의지와 뜨거운 열망의 소산으로 보아야 마땅할 것이다.

 흔히 범부중생에게는 영적 성장, 영적 성숙으로 가는 종자(種子)가 내재되어 있다고 말한다, 그것을 일러 대종사께서는 ‘일체중생의 본성(本性)’이라 했다. 그런데 이 본성을 그대로 두어서는 영적으로 성장할 수가 없다. 적당하게 물도 주고, 공기도 불어 넣어주며, 때로는 거기에서 시도 때도 없이 돋아나는 사심(邪心)이라는 잡초도 제때 뽑아주어야만 영적 성장을 제대로 이룰 수 있는 것이다. 원불교 훈련법은 범부중생의 영적 성장을 이끌고 촉진하는 가장 효과적이며 가장 효율적인 방책이다.

 1927년(원기 12) 5월에 간행된 초기교서가 <수양연구요론(修養硏究要論)>이다. 그 요론의 서문(序文)을 소태산이 직접 쓰셨으니,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인생의 요도는 수양에 있고, 수양의 목적은 연구에 있고, 연구의 목적은 혜복을 구함에 있다. (중략) 본서는 가장 간명히 수양의 본원을 알리기 위하여 정정요론을 말하고, 연구의 방편을 밝히기 위하여 삼강령 팔조목과 각 문목 순서 등을 설명하였으니 본회 제씨(諸氏)는 수양의 바른 힘을 얻어 연구의 사항을 밝혀내어 암매한 인간의 선도자가 되시기를 절망(切望)하는 바라. (<수양연구요론> 서, 1927년)          

 이 글이 실린 초기교서 제목은 <수양연구요론>이다. 제목부터가 범상하지 않다. 그런데 그 서문에서 소태산은 ‘인생의 요도’, 곧 인간이 걸어가야 할 마땅한 길에서 가장 요긴한 것이 바로 ‘수양과 연구’라고 강조하고 계신다. 범부중생이 영적 성장으로 나아감에 있어 가장 근본 되는 길이 바로 수양과 연구라는 뜻이다. 또한 수양과 연구를 통해 궁극적으로 추구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혜복(惠福)’을 구함에 있다고 했다. 혜복을 구한다는 것은 ‘취사’의 다른 표현이다.

 요컨대, 훈련법의 근간을 이루는 정기훈련 11과목은 <수양연구요론> 서문에서 대종사께서 강조하신 바를 구체적으로 밝힌 것과 다름없다. 그것은 인디언 스승들이 한결같이 강조했던 우리가 이 세상에 온 근본적 이유인 ‘영적 성장’을 달성하는 원불교적 방법론이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이 원불교에서 강조하는 ‘훈련’이라는 용어와 ‘훈련법‘이 지닌 깊은 의미를 속 깊이 이해할 수만 있다면 그보다 큰 공덕은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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