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조미학(模造美學)

글. 신은혜

 가을바람이 살며시 인사하자 저절로 눈이 떠졌다. 오랜만에 쉬는 날이다. 가을이 뚜렷하게 오기 전, 집 안 대청소를 말끔히 끝내고 싶었다. 어디서부터 정리해볼까 생각하며 주위를 둘러보니, 쓸쓸하고 막막한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스마트폰, 노트북, TV 같은 전자 제품 무리가 먼저 보였다. 다른 한쪽엔, 읽기 어려운 책과 알 수 없는 자료 더미도 수북했다. 집 안에서 사람의 정서를 느끼기란 너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순간, ‘조화(造花)’라는 말이 내 머릿속을 스쳤다.

 조화. 이것은 비교적 저렴한 값으로 내 취향의 미(美)를 맞춰줄 듯하다. 보살펴줄 필요도 없다. 흐르는 시간에 얽매이지도 않는다. 그러면서도 영원히 지지 않는 그런 ‘꽃’이다. 별로 노력하지 않아도 좋은 볼거리를 계속 곁에 둘 수 있다는 게 꽤 마음에 들었다. 어디에 둬야 예쁠까 고민하면서 꽃을 놓을 자리를 분주히 찾았다. 그러다 그만 가벼운 웃음이 새어 나왔다.
집 안에서 사람의 정서를 회복하려고 고민한 게 겨우 모조품이라니…. 햇볕을 꾸준히 쬐게 하고 물을 주는 ‘보살핌’이란 생명에게 주는 당연한 기본 도리일 텐데, 나는 그 과정 없이 결과만 찾는 미학을 추구했다. 정성 없이 누리는 아름다움을 욕심낸 것이다. 이 희한한 모순에 잠시나마 흐뭇해하던 스스로가 부끄러워졌다.

 그러면서 불현듯 어릴 적, 옥상에 봉선화를 심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씨앗을 심고 줄기가 자라나길 기다리고, 꽃대에서 꽃이 피어날 때까지의 그 기나긴 여정을 거쳐야 만날 수 있는 ‘꽃의 만발’이란 내게 더할 수 없이 소중했다. 그때 난 매일 조바심을 갖고 봉선화를 보살폈다. 할아버지에게 ‘내일은 꽃이 필까요?’라며 투정하듯 중얼거리기도 했다. 이 모든 순간이 잊을 수 없이 귀중하다. 결국 꽃이 아름다운 건, 피어난 꽃 자체가 가진 아름다움보다도, 꽃에 대해 지속적인 관심과 사랑을 갖고 누군가가 보살펴준 덕분이라는 걸 깨달았다. 나의 정성에 대한 ‘꽃의 반응’이랄까.

 그러고 보니 사람을 만나는 것도 별반 다르지 않을 듯하다. 인간관계가 갖는 가치나 과정을 간과한 적이 있지 않나 돌아본다. 그러자 빠르고, 쉽고, 편하게 맺어온 그럴듯해 보이는 것들이 마치 ‘모조미학’ 같아졌다. 결국 인간관계 역시 수많은 애정과 관심과 대화 속에서 그 소중함을 느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관계 속에서야 꽃의 향기, 열매의 달콤함과 같은 다정한 마음이 내 마음속에 보답처럼 꽃을 피운다. 여기까지 생각하니 새삼, 지금의 나를 존재하게 한 이들에게 감사해졌다.

 오늘은 가을바람이 선들선들해 그 리듬에 맞춰 몸을 움직였다. 앞날을 위한 일과 지난 일들까지 생각해보게 됐다. 덕분에 마음이 따듯하고 다정해진다. 오늘은 ‘가을맞이 대청소’ 대신 ‘가을맞이 감사 전화’를 해야겠다. 전화를 돌리고 나면, 오랜만에 꽃씨를 사러 가야지.


삶의 동반자

글. 이화용

 나는 허리디스크라는 고질병이 있다. 지금은 수술과 꾸준한 관리를 통해 상태가 많이 좋아진 편이지만, 오랜 시간 힘들었고 앞으로도 평생 조심해야 한다. 이제야 이것을 삶의 동반자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지만 사실 2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동반자는커녕 원망 그 이상의 존재였다.

 통증은 극심했다. 좋아하던 축구를 못 하는 것은 당연하고, 심한 날에는 누워 있는 것조차 힘들어 잠을 잘 수 없었다. 그런 날엔 통증 때문에 뭘 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부모님께서는 내가 해볼 수 있는 많은 시술을 받게 도와주셨지만 호전되진 않았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매달린 게 성탑 기도였다. 그렇게 매일 대종사 성탑에 가서 정성스레 기도를 올렸지만, 돌아오는 길에 운동장에서 축구를 하고 있는 친구들을 보면 친구들에 대한 원망, 삶에 대한 원망, 진리에 대한 원망이 들었다. ‘모두가 은혜입니다?’ 당장 고통스러운 상황에서 그것은 그저 의미 없는 캐치프레이즈*일 뿐이었다.

 뭐든 극하면 변한다고 했던가. 그렇게 평소 끝없는 원망 속에 빠져있던 어느 날, 그날은 신기하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건강은 빌려준 물건인 양 결코 당연하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동안 나는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지내는 것들을 당연히 여겼다. 하지만 허리가 불편해 생활 속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다보니 건강은 누구에게나 당연히 주어지는 것이 아니며, 따라서 이만큼이라도 건강할 수 있다는 것이 사실 감사와 큰 은혜라는 것을 느끼게 된 것이다. ‘이것보다 더 아프기라도 한다면….’

 지금도 허리디스크로 인해 힘들고 불편한 생활을 하는 사실엔 변함이 없다. 현실 세계의 상황은 잘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상황을 대하는 마음은 바꿀 수 있다. 나는 원망과 은혜의 갈림길에 서 있다. 그러나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서도 감사와 은혜를 발견한다면 행복하고 여유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두 길 중에서 내가 어떤 길을 걸을 것인지는 결국 마음의 문제이다. 이것이 곧 대종사님께서 말씀하신 은생어해(恩生於害)와 해생어은(害生於恩)의 길이 아닐까 생각한다.

 결국 내 인생의 방향을 결정하는 것은 나 자신, 나의 마음이다. 나의 마음 하나가 모두를 은혜로 만들 수 있고 모두를 원망으로 만들 수도 있다. 나는 원망의 눈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보다 은혜의 눈으로 세상을 살아가고 싶다. 그렇기에 허리디스크를 내 삶의 동반자로 보는 것이다.

* 캐치프레이즈(catchphrase) : 남의 주의를 끌기 위한 문구나 표어


사랑스러운 눈빛

글. 김해인

 나는 30년 넘게 교육전문가로 일했다.
 그동안 수많은 학생과 학부모를 만나면서 그들의 교육과 훈육을 도왔다. 또 그들의 행동을 긍정적으로 바꾸는 일에 앞장섰다. 대부분의 학부모들은 자신의 행동 변화가 아이를 잘 키울 수 있도록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실천은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상담을 통하거나 때로는 학부모교육을 통해서 엄마들의 훈육을 돕는 일을 지속적으로 하고 있다. 어떤 엄마는 자기 자신에게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쉽게 인정하지 못한다. 사실 알고 있지만 자신에게 깊이 뿌리박혀 있는 습관과 무의식이 변화의 발목을 잡는 것 같다. 그러고 보면 아주 어렸을 적에 부모로부터 받은 훈육, 즉 어떠한 습관에 노출되어 있었는지가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확실히 느낀다. 어쩌면 삶의 차이, 훈육의 차이는 모두 어릴 적 경험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언젠가 딸아이와 목욕탕에 갔을 때의 일이다.
 그 많은 사람들 중 유독 눈에 들어온 두 모녀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친구처럼 서로를 바라보며 대화를 나누는 지극히 일상적인 모습이었는데, 그들의 눈빛에 담긴 서로를 사랑하고 아끼는 살가움과 정겨움이 너무나 생생하였기 때문이다.
 ‘과연 나는 그토록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내 딸아이를 바라봐 주었나?’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확 스쳐갔다.
“엄마, 뭐하세요?”
“응, 너도 참 예쁘다.”
뜬금없는 나의 말에 딸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피식 웃었다. 그도 그럴 것이 평상시 아이에게 다정한 모습을 보여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늘 바빴기 때문에 해야 할 말, 전해야 할 말만 했었다.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그윽하게 바라봤던 적이 거의 없었기에 서로 어색했던 것이다.

 이런 사랑스러운 모습은 한두 번 마음먹고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나는 너를 사랑한다.’라는 그윽함이 일상이 되어야만 가능한 것이다. 그래야 아이는 자신이 안전하게 보호받고 있으며 사랑받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래야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조화로운 인간관계를 가질 것이다. 그런 포근한 사랑을 받은 아이는 저절로 눈빛과 태도에 사랑이 가득할 테니까.

 나는 훌쩍 커버린 내 딸아이와 두 모녀의 모습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딸아이에게 미안한 마음과 아쉬운 마음이 교차했다. ‘엄마는 바로 저렇게 하는 거야. 그래야 심장부터 따뜻한 인간이 되는 거지!’ 오늘도 그때 본 모녀의 아름다운 잔상은 사랑의 감정을 잘 전달하지 못하는 나를 공부하게 한다.


자투리 정성

글. 황다혜

 며칠 전 교무님께서 물으셨다. 출퇴근을 위해 오가는 시간에 차 안에서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내느냐고. 지하철 안에서 나의 시간은 대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었다. 스마트폰으로 인터넷뉴스나 SNS를 들여다보거나, 친구들과 카톡을 하기도 하고, 그마저 볼 것이 다 떨어지면 지루한 시간을 조금이라도 빨리 보내기 위해 잠을 잔다. 이렇게 말씀드리니 교무님께서는 그 시간에 책을 읽어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하셨다.

 사실 평소 책을 많이 읽어둬야겠다는 마음은 항상 갖고 있었다. 하지만 ‘피곤하니 나중에 읽어야지.’ ‘그 시간에 읽어봤자 얼마 읽지도 못 할 테니 쉬는 날 집에서 읽어야지.’라며 미뤄오던 터였다.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책을 읽는다는 자체가 부담이 되어버렸다.

 내 이야기를 들은 교무님께서는 “만약 한 장밖에 안 읽었는데 피곤하고 졸리면 자도 된다.”고 말씀하시면서 그 한 장이 쌓여서 두 장, 세 장이 되는 것이니 비록 속도는 느리더라도 어느 순간에는 책 한 권을 나의 것으로 만들 수 있지 않겠냐고 하셨다. 그리고는 “나도 버스에서 15분 남짓의 짧은 시간 동안 조금씩 책을 읽다보니 어느새 이렇게 한 권이 채워지더라.”며 직접 들고 다니는 책을 내게 보여주셨다. 평소 이러한 원리를 머리로는 알았지만 선뜻 마음으로 가져오지는 못했었다. 그런데 교무님이 자신의 경험을 통한 제안을 해주시니 나도 시작해봐야겠다는 의지가 생겼다.

 그런데 또 다른 장애물이 나타났다. 어떤 책을 들고 다니며 읽어야 할까를 고민하는 일이었다. 막막했다. 인문학? 자기계발서? 소설책? 여러 가지 장르들 중에서 뭔가를 고르는 것은 다시 부담으로 다가왔다. 은연중 내게 도움이 될 만한 책을 따지게 되었고, 삶의 교훈 등 무엇인가를 꼭 얻어야만 책을 읽는 가치가 있다고 여기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또 고민하는 것을 알아 챈 교무님께서 “우선 가까이 있는 것부터 부담 없이 읽어보면 어떨까?”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사무실 책장 한 쪽에 꽂혀있던 <소태산 평전>을 챙겨 들었다. 그 이후로 나는 사무실과 집을 오고 가는 지하철 안에서 책을 펼쳐 읽기 시작했다. 하루는 겨우 몇 장 못 읽은 상태에서 졸려 잠이 들 때도 있었고, 책을 읽는 것이 지루할 땐 인터넷을 들여다보며 딴 짓을 하기도 했고, 어느 날은 퇴근을 하는 시간 내내 책을 읽게 된 날도 있었다. 그렇게 시간이 쌓이고 쌓이더니 어느새 책의 절반에 해당하는 장수를 넘기게 되었다. 
그동안의 나는 책을 읽는 일에 대해 ‘반드시 시간을 따로 내서, 특별한 내용을 읽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이러한 자투리 시간을 쌓는 그 자체만으로도 내게 더 큰 가치가 될 것이라는 것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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