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pecial \ 시대화, 어떻게-무엇부터 할 것인가?

미래사회를 정확하게 보는 안목과 지혜가 필요하다
글. 임진은 교수교무

 최근 4차 산업혁명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
 4차 산업혁명은 가상 세계와 현실 세계가 서로 연결되는 사이버 물리 시스템이 구축됨으로써 자동화와 지능화된 생산체계가 경제 구조를 급격히 혁신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는 완제품을 시장에 내놓는 것이 아니라, 인공지능을 활용해 고객과 소통하고 고객이 원하는 제품을 생산하는 시대가 될 것이라고 한다. 지능화된 기계는 경영 관리 및 의사결정 과정의 효율성과 정확성도 높여 결국 경제적 번영과 풍요를 가져오게 될 것이다. 나아가, 과학 기술의 발전은 인간과 사회 전반에 상상을 뛰어넘는 변화와 더불어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세상을 열어줄 것으로 예측된다.

 그러나 급속한 과학기술의 발전과 이로 인한 변화를 인간은 과연 장밋빛 미래로만 받아들일 수 있을까? 일례로, 2014년에 영국의 옥스퍼드대학교가 현재의 직업들을 분석한 결과, 10년 뒤에는 그 중 47%가 사라질 것이라는 충격적인 내용을 발표하였다. 앞으로 미래 사회에 필요한 새로운 일자리가 생긴다 하더라도, 현재 인간이 담당하고 있는 수많은 일들을 로봇과 같은 지능화된 기계가 대체하게 될 것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것이다. 기업들은 고비용의 인간을 대체할 인공지능 로봇의 개발에 투자하고 있으며, 기계화로 인해 이미 세계 도처에서는 일자리가 급격히 줄어들고 있다. 이렇게 되면 앞으로의 사회는 일하는 소수와 일을 잃은 다수로 양분될 것이며, 자본주의 체제에서 일이 없는 사람은 빈곤을 피할 수 없게 된다. 비록 일이 없는 사람에게도 기본 생활비를 주는 정책을 통해 이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그리 단순하게 볼 문제는 아니다. 일이 없는 사람들은 사회적으로 위축되어 정상적인 생활로부터 멀어지거나, 가볍고 자극적인 재미만을 추구하게 되거나, 권태로 인해 술이나 마약, 도박, 게임 등에 빠지는 중독자로 전락하기 쉽다. ‘일’이 단순히 생계를 위한 수단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은 개인뿐만 아니라 사회와 국가를 병들게 할 수 있다. 물론 안정된 경제 여건 속에서 자아실현에 힘쓰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것도 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어느 쪽으로 사회 분위기가 흘러갈 것인가는 사람들의 전반적인 의식 수준과 변화에 대한 준비 정도에 달려있다고 본다.

 이러한 시대적 변화의 흐름 속에서 원불교는 무엇을 준비하고, 무엇을 해나가야 할까?
첫째로, 다가올 미래사회를 정확하게 볼 수 있는 안목과 지혜를 갖춰야 한다. 소태산 대종사는 <대종경> 전망품을 통해 앞으로의 세상에 대한 견해를 다양한 측면에서 제시하였다. 많은 미래학자들 역시 앞을 다투어 미래사회의 변화되는 측면들을 소개하고 있다. 이러한 견해들을 통해 미래사회의 특성뿐만 아니라 이로 인해 삶에서 직면할 수 있는 긍정적·부정적 영향들을 예측하고, 변화의 과정 속에서 마주하게 되는 현실적 측면을 파악하고 진단해야 한다. 또한 소태산 대종사의 법문을 바탕으로, 미래학자들이 다양한 분야에 대해서 논의한 내용들을 사회 전체의 유기적인 관계 속에서 통합하고 해석하는 지혜 역시 필요하다고 본다.
둘째, 과학기술 자체는 가치 중립적이며,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의 의도, 즉 마음에 따라서 선용될 수도 있고 악용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과학기술의 발전에 대해 우려하는 목소리 역시 이러한 기술들이 악용될 수 있고, 발전의 수준만큼 파급 효과가 크며 파괴적일 것으로 예측되기 때문에 나오는 말이다. 따라서 나날이 놀라운 속도로 발전하고 있는 과학기술이 사람들 사이에서 서로를 돕는 방향으로 선용되는 사회가 되도록, 원불교의 적극적인 역할이 필요하다.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 하신 원불교 개교의 동기가 오늘날의 사회에 이토록 적합할 수가 없다.

 경쟁과 갈등, 적대감이 가득한 사회에서는 과학기술이 서로 경쟁하고 대립하며 다른 사람을 기만하는데 사용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우리는 과학기술의 선용을 위해 사람들끼리 서로 배려하고 신뢰하는 관계를 구축해야 한다. 이러한 배려와 신뢰의 관계는 서로 간 은혜의 관계성을 아는 것에서 출발한다. 그러기에 앞으로 은혜 확산을 위한 대사회 운동이 적극적으로 전개되기를 바란다. 동시에 전 연령층을 대상으로 다양한 마음공부 및 인성교육 프로그램이 개발되어 원불교의 교법이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는 세계 인류의 든든한 뿌리가 되기를 기대한다.

 셋째, 실재적인 마음의 실력을 쌓는데 공을 들여야 한다. 마음의 실력을 쌓는 길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직면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자신에게 닥치는 어떠한 고통도 회피하지 않고, 마음의 세세한 작용들을 맑은 눈으로 지켜보며, 내가 처한 크고 작은 상황의 면면을 피하거나 왜곡하지 않고 바라볼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한다. 또한 상대의 아픔을 가슴 깊은 곳에서 우러난 진심을 담아 공감할 수 있다면, 이것은 분명 ‘현실’ 속에서 나를 키우는 값진 시간이 된다. ‘현실에 온전히 머물면서도 현실에 물들지 않을 수 있는’ 마음의 힘을 기르는 것은 강력하고도 멋진 일이다.

 그러나 자칫하면 자신을 짓누르는 수많은 혼란과 해결되지 않은 감정적이고 개인적 문제에서 벗어나기 위해 일상적인 생활로부터 초탈한 듯한 영적 수행을 택할 수 있다. 심리치료사이자 영적 수행자인 존 웰우드(John Welwood)는 이렇듯 기본적인 인간의 욕구·감정·발달 과제를 회피하거나 조급하게 초월하려는 시도들을 ‘영적 우회’라고 표현하였다. 이런 태도를 갖게 되면 영적인 가르침과 수행은 오히려 개인의 오래된 방어기제를 합리화하고 강화하는 수단이 될 수 있다. 날마다 경계들이 넘실거리는 ‘현실’ 속에서 있는 그대로의 ‘나 자신’을 면밀히 바라보지 않는다면, 누구든 영적 우회의 유혹에 빠질 수 있다.

 인간의 몸을, 그 신비로운 작용들을 속속들이 파악하고 이해하게 되었듯이,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우리 마음의 작용까지도 정확하게 읽어내는 날이 오지 않을까 싶다. 무엇이든 사실적으로 드러나는 밝은 세상에서, 앞으로는 마음의 실력까지도 더욱 명확히 알아보게 될 것이다.

 현재 우리 사회를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은 빈부격차, 경쟁 심화, 청년실업, 노후 빈곤, 양극화, 미세먼지, 높은 자살률 등으로 인해 고통과 아픔을 겪고 있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 비탄에 빠진 사람들이 만약 가상현실 기술과 같은 것을 통해 위안을 얻고자 한다면, 현실의 삶은 더욱 비극적이 될 것이며, 사회는 더 큰 어려움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이들에게 따뜻한 위로를 건네고 인생의 방향을 제시하며, 앞으로 기계에게 일자리를 빼앗긴 사람들이 건강하게 자신의 삶을 영위해 나갈 수 있도록 돕기 위해서는 실력 있는 마음 전문가들이 되기 위한 준비를 해야 할 것이다. 더욱이 풍요로운 경제여건과 시간적 여유로움 속에서 존재의 본질을 탐구하고 자기를 실현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아질 때, 세상은 실재적인 마음의 실력자들을 알아보고 찾지 않을까.


\ Special \ 생활화, 어떻게-무엇부터 할 것인가?

생활화의 책임은 ‘나’에게 있다
글. 김화연 교수교무

 ‘불교의 시대화·생활화·대중화’를 이야기하며 원불교가 등장한지 벌써 100년이다. 지금 이 시대, 오늘날의 사람들과 소통하고 생활 속에서 실천하는 종교로 탈바꿈하려는 노력은 원불교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불교 역시 현대화·생활화를 내걸고 젊은 불교로 대변신을 시도했다. 학교와 직장에 매인 일반인들을 위해 생활 속 실천 가능한 수행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보급했다. 명상 프로그램, 인성 교육, SNS에 기반한 마음공부 애플리케이션, 템플스테이, 불교 문화 축제 등 다양한 실험과 시도가 있었다. 

 자, 그렇다면 이러한 노력이 긍정적 전망을 가져왔을까? 안타깝게도 노력이 결과를 보장해주지는 않은 듯하다. 가장 최근의 통계 조사를 살펴보면 불교도는 10년 사이에 300만 명이 감소했고, 원불교 역시 20년 전 수준으로 회귀했다. 불법이 생활에 밀착되기는커녕, 더는 멀어지지 말라고 안간힘을 다해 붙잡아도 모자랄 상황이다.
분명히 노력한다고 하는 것 같은데, 왜 이런 결과가 나올까? 도대체 이를 어떻게 풀어나가야 하는 것일까?

 내가 어릴 적엔 없었던, 지금은 누구나 다 가지고 다니는 물건이 있다. 바로 휴대전화다. 휴대전화는 등장한 지 몇 년 만에 전 국민의 필수품이 되었다. 통화와 메시지를 주고받는 정도가 아니라 정말 많은 일들이 휴대전화를 통해 가능하다. 네비게이션, 은행업무, 쇼핑, 촬영, 녹음…. 요즘엔 새롭고 다양한 앱들이 삶을 더욱 풍성하게 해준다. 별자리 앱을 다운로드해서 영산의 밤하늘에 휴대전화를 갖다 대면, 지금 내 위에 떠 있는 별이 어떤 별자리인지 화면에 그려진다. 이런 기물(奇物)을 어떻게 쓰지 않을 수 있을까?

 소비시장에 길들여진 현대인들은 인내심이 부족하고, 변덕스럽고 까다롭다. 좋다고 해서 사용해 보았는데, 당장 느껴지는 효용이 없으면 바로 발길을 돌린다. 접근성과 편리성이 떨어져도 마찬가지다. 그뿐만이 아니다. 수많은 대안 가운데 ‘그것이 가장 좋다.’라고 하는 차별화된 경쟁력이 있어야 선택받을 수 있다. 그것은 동종 제품들 사이의 경쟁에만 국한되지도 않는다. 스마트폰의 등장이 수많은 전자기기의 몰락과 다른 사업 분야와의 융복합을 가져온 것처럼 말이다. 전통적으로 종교가 해왔던 역할을 다른 누가 대체하느냐, 아니면 종교가 기반이 되어 다른 분야의 기능도 가져오느냐에 대한 물음에 대해 종교는 분명 기로에 서 있다. 종교의 존립은 누가 인류에게 더 큰 유익을 줄 수 있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그리고 그 유익은 공급자가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다. 다양한 참여자들의 자발적 탑승과 그 속에서 무수히 많은 가치를 교환하며 새로운 가치를 창출해 낼 수 있는 플랫폼의 제공에 달려 있다.

 그런 관점에서 살펴볼 때, 원불교의 가르침은 가장 최적화된 삶의 지표라고 볼 수 있다. 원불교는 ‘지금 내가 서 있는 여기’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나의 현실에 바로 적용되기에 실용적이고, 누구나 할 수 있기에 접근성이 높다. 한 생각 일으키고, 한 행동 나투는 바로 지금이 공부의 순간이고, 기질 변화할 수 있는 기회이며, 업을 닦는 경계다. 동시삼학, 그래서 ‘온전 생각 취사(상시응용주의사항 1조)’다. 원불교 공부는 ‘온전 생각 취사’로 시작해서 ‘온전 생각 취사’로 운전해가며, ‘온전 생각 취사’로 끝난다. ‘온전 생각 취사’를 잘하기 위해 ‘상시 응용 주의사항’ 6조로 마음을 챙기고, ‘교당 내왕시 주의사항’으로 문답감정을 하고, 다시 정기 훈련에 입선해 11과목으로 세밀하고도 상세히 훈련한다. 그것은 성불제중을 향한 방법론인 동시에, 성불제중한 사람이라면 마땅히 걸을 수밖에 없는 인도(人道)이기도 하다. 인과가 여실한데 나의 현실을 떠난 공부가 어떻게 이치에 맞으며, 불리자성인데 동할 때 공부와 정할 때 공부가 어떻게 따로 있을까? 일 있을 때는 보은불공하고 일 없을 때는 일심을 챙길 뿐이다. 대종사님의 가르침은 이토록 사실적이고 실용적이다. 지도에 명확하게 길을 그려 보였으니, 우리는 그 길을 그대로 따라가면 된다. 불법의 생활화! 거기에 어떤 방법이 따로 있을까? 나부터의 실천, 오직 행(行)이 있을 뿐이다. 개개인이 자신의 생활을 불법으로 길들여 가는데 달려 있을 뿐이다. 배가 고프면 밥을 먹고, 졸리면 잠자고, 목마르면 물을 마시듯 그냥 하는 것이다. 그래도 굳이 방법을 묻는다면 오래오래 계속하라고 답할 뿐이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이대로 행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간절한 마음으로 정성스럽게 하지 못하고, 오래오래 하지 못한다. 달리 의심하지 말고, 번뇌 망상에 휘둘리지 말고, 그냥 해야 하는데, ‘그냥 한다?’ 는 게 정말 어려운 과제다.

 그렇기에 개인의 실천의 문제로 남겨둘 수는 없다. 우리가 이 회상에 모인 것은 서로서로 끌어주며 함께 진급·상생하고 제도하기 위함이 아닌가? 우리의 서원이 얄팍한 한 생각이 아니라 영생에 변치 않는 서원이 되고, 거스를 수 없는 도도한 시대의 흐름이 되어 변화의 물결로 굽이치게 하기 위해서 교단을 형성한 것 아닌가? 우리에게는 롤모델이 필요하고, 실질적인 플랫폼이 필요하다. ‘원불교 법으로 생활하면 저렇게 달라질 수 있구나! 닮고 싶어!’ 라고 할 수 있는 롤모델을 보여줌으로써 다른 곳이 아닌 원불교에 찾아올 수 있게 하는 ‘그 한 사람’이 필요하다.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들어 서로의 공부를 문답·감정하고 그 가운데서 새로운 삶의 방식과 가치가 창출될 수 있도록 하는 플랫폼이 필요하다. 내가 곧 그 한 사람이 될 수 있는가? 우리 교단은 바로 그런 실질적인 플랫폼을 제공하고 있는가?

 요즘 영산선학대학교에서는 새벽 좌선 시간에 특별정진반을 운영한다. 출가 전 올빼미 생활을 하느라 아침 일과가 마냥 힘들고, 일자목·굳어진 어깨로 요골수립이 잘 되지 않는 예비교무들이 좌선 전후로 20분씩 요가를 하며 몸을 바로 세운다. 학생들이 스스로 진행하고, 교무들은 돌아가며 경책하고 자세를 잡아준다. 혼자서 하면 혼침에 떨어져도, 자세가 틀어져도 모른 채 굳어지지만 함께 하면 깨워주고 세워준다. 속 깊이 정진하는 것은 온전히 자기만의 몫일 테지만, 자신의 알아차리기 힘든 결점을 알려주고, 분발심이 계속해서 살아나도록 환경을 만들어가는 것은 우리 공동체 전체의 몫이다.

 원불교의 생활화는 구호의 제창으로 되는 것도 아니고, 프로그램을 개발·보급하는 것만으로 되는 일도 아니며, 어느 한순간에 완성되는 일도 아니다. 원불교인 한 명 한 명이 일상의 순간순간을 교법대로 살아갈 때 구현된다. 그렇기에 생활화의 책임은 다른 누구도 아닌 실천의 주역인 나에게 있다. 또한 이끌어주고 배울 수 있는 토대, 다양한 가치가 창출될 수 있는 플랫폼을 구축해야 할 원불교 공동체 전체에 있다. 우리 각자는 스스로 정진해 ‘그 한 사람’이 되고자 해야 하며, 교단·교당은 영육을 아우르는 훈련과 보은의 장을 끊임없이 열어야 한다. 그리하여 출·재가 참여자들이 자유롭게 상호 교류하면서 다양한 잠재력을 이끌어내고 유무형의 실질적 가치를 창출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렇게 오래오래 계속해서 실력이 쌓이고 때가 되면, 장마 끝에 하늘이 환히 개듯, 기나긴 등반 끝에 정상에 다다르듯, 아득해 보였던 변화가 어느새 눈앞에 성큼 다가올 것이다.


\ Special \ 대중화, 어떻게-무엇부터 할 것인가?

사회참여와 불법의 대중화
글. 염관진 교수교무

 지금으로부터 25년 전 여름, ‘난 알아요’를 발표한 서태지는 문화 대통령으로 불릴 만큼 대중에게 막강한 영향력을 끼쳤다. 어린이, 학생 그리고 청소년훈련에서 일원상서원문은 ‘난 알아요’ 노래에 나오는 랩의 리듬에 맞춰 암송되었다. 그 이후로도 원불교를 대중에게 친숙하게 하기위한 비슷한 노력들이 늘 있어왔다. 교단 내에 실제로 엔터테인먼트가 설립되기도 했고 인기 있는 배우나 가수를 다른 종단에서 후원하기도 했다. 당시 그러한 노력들을 바라보면서 나는 석연치 않은 느낌에 고민을 하게 되었다.

 일원상서원문을 비롯해 원불교 교리가 특정 유명인이나 권위 있는 사람들의 영향력에 힘입어 대중에게 친숙해진다 하더라도, 주체적인 신앙과 수행의 실천을 통해서만 체성(體性)에 합할 수 있는 일원상의 진리는 결코 어떤 유명세에 의존해서 체득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연예인을 활용한 원불교 대중화 방식은 종교적 믿음, 즉 신(信)의 초보적 형태로서 긍정적 측면이 있을 수 있으나 결과적으로 실제 우리들 스스로가 체성에 합할 수 있는 주인공이 되고자 하는 분심(忿心)을 불러일으키지 못하면 단순히 ‘원불교의 소개’ 나 ‘원불교 미디어 노출’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소태산 박중빈 대종사께서(少太山 朴重彬 大宗師, 1891~1943) 지향했던 불법의 대중화의 의미는 무엇일까? 소태산은 <대종경> 수행품 51장에서 ‘불법’을 ‘세상을 건지는 큰 도’로 규정하면서 교리표어에서 불법의 대중화를 ‘불법시생활·생활시불법’이라고 했다. 수행품 51장과 서품 15장에서는 ‘불법을 활용하여 생활의 향상을 도모’하도록 했고, ‘세상일을 잘하면 그것이 곧 불법공부를 잘하는 사람이요, 불법공부를 잘하면 세상일을 잘하는 사람’이라고도 했다.

 또한 소태산은 우리가 불법에 사로잡힘으로써 불법이 대중으로부터 분리되어 외면당할 수 있다는 점도 경고한다. 정신수양과 사리연구에 해당하는 염불, 좌선 그리고 간경(看經)은 그것 자체가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신앙과 수행이 ‘정의는 용맹 있게 취하고, 불의는 용맹 있게 버리는 실행의 힘’을 얻는 작업취사와 ‘불의를 제거하고 정의를 양성하라’는 무시선의 강령으로 귀결되지 않을 때의 불법은, 개인 자신에도 별 성공이 없고 세상에도 아무 이익이 없기 때문이다. 병든 사회를 치료하고자 하는 불법의 공적 역할을 상실할 때, 불법과 대중의 분리는 불가피하다.

 소태산의 말씀은 사회와 생활의 맥락에 따라 다양한 각도로 해석과 적용이 가능할 수 있으나 그 핵심은 ‘불법 표준의 사회참여’다. 사회참여의 의미는 사회 속의 나의 역할을 자각하는 것이며, 건전하고 건강한 사회발전을 위해 사회의 구성원으로서의 나의 책무를 수행하는 것이다. 불법의 대중화는 ‘수행의 주체인 내가, 대중에서 일어날 법한 문제들을, 대중 속에서 그들과 함께, 불법을 표준삼아 해결하도록 하는 것.’이며, 이러한 노력이 ‘정의는 용맹 있게 취하고, 불의는 용맹 있게 버리는 실행의 힘’, 즉 수행의 과정이다.

 사회참여의 다양한 형태는 전지구적으로는 환경 보호, 난민 문제, 인종 차별, 계급 차별, 성소수자의 인권 등의 문제에 관심을 갖는 것이며, 국가적으로는 안보와 평화, 세대 갈등과 지역 갈등 등의 사회 문제에 교법을 기준삼아 내가 할 수 있는 역할을 찾는 것이다. 일상에서는 가정이나 직장과 일반 동호회에서 경험하는 다양한 문제를 불법을 표준삼아 해결하려는 시도일 것이다. 이를 위해 교법을 수행하는 우리는 전지구적인 문제가 경제적 논리나 특정 국가의 이익에 의해 이용당하지 않도록 감시할 수 있는 혜안을 갖춰야할 것이다. 또한 국가 정책이나 법 제정이 교법에 비추어 반한다면 과감히 그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한다. 일상에서는 일요일 법회 속에서 참회하는 나와 월요일 아침 가정과 직장에서 생동하는 내가 다르지 않도록 해야 한다.  

 지난해부터 원불교 교도들뿐만 아니라 일반 시민들에게도 성지 경상북도 성주는 고민이자 아픔이었다. 다양한 논의와 고민들 속에서 문제를 풀어가는 우리의 표준은 ‘불법’이었고, 불법의 방향은 ‘원불교는 평화입니다.’로 압축됐다. 수도원 원로교무님은 순교를 각오하며 평화를 지키고자 기도하셨고, 국방과 안보를 고민하는 교무들과 교도들은 안보와 평화의 접점을 찾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다. 성주 현장에서 시민과 함께하며 ‘사드와 안보’, ‘정치’, ‘원불교와 평화’를 공감하였다. 비록 그 목소리의 내용은 불법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다양한 관점에 따라 조금씩 다를 수 있지만, 불법을 대중화했다는 점에서 주목할 일이라 생각된다. 

 불법은 세상을 건지는 큰 도이다. 불법은 물질의 지배를 받아 노예 생활을 면하지 못해 파란고해(波蘭苦海)에 빠진 병든 세상을 치유하기 위한, 의술인 삼학·팔조와 약재인 사은·사요를 말한다. 성주를 향한 우리의 고민이 헛되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가 생각하는, 내가 생각하는 불법이 세상을 건지는 큰 도였는지, 파란고해에 빠진 병든 세상을 치유하기 위한 삼학·팔조와 사은·사요에 비추어 부족함은 없었는지 반성하고 또 반성해 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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