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짝꿍

글. 이지윤

 너무 어릴 때 일어난 일이지만, 거의 20년여 년이 지난 지금도 ‘그 사건’을 또렷하게 기억한다.
 아마 초등학교 2학년이었을 것이다. 사건의 주인공은 짝꿍이다. 사실 그 애 이름이 잘 기억나지 않아 미안하다.

 나는 어렸을 때 몸이 약한 내 동생을 괴롭히는 남자애들을 직접 혼내줄 정도로 남자애들과 싸움을 잘했다. 어느 날은 나에게 시비를 거는 남자애와 의자·책상에 몸을 부딪쳐가면서 몸싸움을 했다. 결국 학교 선생님께 걸려서 수업 내내 함께 손을 들고 창피하게 벌을 받은 적도 있다.

 하지만 나와 내 짝꿍 사이는 예외였다. 거의 모든 남자애들과 친하지 않고 자존심만 강했던 나는, 유일하게 내 옆에 앉은 짝꿍과는 친하게 지냈다. 어떤 친구가 짝꿍의 크레파스를 빌려 가면, 나는 질투가 나서 그 친구에게 다가가 다시 돌려달라고 화를 내기도 했다. 짝꿍이 너무 좋아서 항상 옆에 붙어 있으려고 했다.

 한번은 짝꿍의 생일 파티에 초대받아서 생일 선물로 연필꽂이를 들고 놀러 갔다. 그곳에 가니 초대받은 아이들은 다 남자애들이었고 나만 여자였다. 짝꿍의 방 책상 위에 연필꽂이를 올려놓자 짝꿍의 엄마가 “좋겠네. 다 남자애들인데 여자 혼자 유일하게 초대받고.”라고 말씀하셨다. 그때 당시에 굉장히 우쭐했던 기억이 있다.

 나는 짝꿍을 정말 좋아했던 것 같다. 하지만 내 기억에서 잊지 못할 ‘그 사건’이 짝꿍에겐 어떤 기억으로 남아있는지 모르겠다. 학교에서 수업을 받던 중이다. 선생님께 화장실 다녀오겠다는 말을 하지 못한 나는 앉은 자리에서 소변을 보고 말았다. 내 의자 밑은 오줌으로 흥건해졌다.

 내가 ‘다른 아이들이 눈치채면 어떡하지 냄새도 날 텐데…’. 하면서 불안해할 때, 갑자기 짝꿍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더니 걸레를 가져와 아무 말 없이 바닥을 닦기 시작했다. “수업 중에 뭐하냐?”는 선생님의 물음에 짝꿍은 “물을 쏟아서 닦고 있어요.”라고 말하곤 다시 내 자리를 닦았다. 이상하게 그 이후로 짝꿍이 나에게 뭐라고 말했는지, 짝꿍과 어떤 이야기를 나눴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여태까지 살면서 내게 가장 고마운 사람을 말하라고 하면, 무조건 그때 그 짝꿍과 사건이 떠오른다. 나도 누군가에게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것이다.

 그때 당시 9살밖에 안 되는 어린 나이였는데, 내 짝꿍은 참 용기 있고 상대방을 배려하는 어른스러운 성격이었던 것 같다. 그러고 나서 나는 3학년 때 전학을 갔고, 그 애와 연락이 끊어졌다. 하지만 나중에 어디서든, 어떻게든, 꼭 한번 만나고 싶다. 너무 어렸을 때라 그 애는 기억하지 못 하는 일일 수도 있지만, “그때 정말 고마웠다.”고 꼭 말하고 싶다.

 

바르셀로나 소매치기

글. 장준현

 지난 2월, 친구로부터 전화가 왔다. 여름에 함께 유럽 여행을 가자는 것이다. 이미 4월에 친척 동생과 여행을 가기로 약속한 상태라 금전적으로 부담이 되었지만, 학부 때부터 유럽 여행을 같이 가자고 하곤 했기에 덜컥 약속을 했다. 덕분에 오뉴월의 뜨거운 햇볕 아래 32일간 마늘 상하차 알바를 해야했다.

 큰 고생 끝에 40여 일의 여행 일정 중 첫 번째 여행지인 바르셀로나에 도착했다. 처음 2주는 개인 일정이었다. 숙소에 짐을 풀고 람블라거리로 나갔다. 거리는 축구 유니폼 등 잡동사니를 파는 잡상인들과 행위예술가들, 관광객들로 붐볐다. 하지만 따사로운 햇살과 지중해 해안의 보드라운 바람 때문인지 마음이 여유로웠다. 정말 정열과 여유가 공존하는 도시였다. 

 장거리 비행 탓에 피곤이 몰려와 쉬엄쉬엄 숙소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그때 어디선가 ‘찌익’ 하는 소리가 들렸다. 반사적으로 메고 있던 크로스백을 보았다. 지퍼가 조금 열려있었으나 걱정할 정돈 아니었다. 노숙인처럼 보이는 남자 두 명이 어색한 표정을 지은 채 옆을 스쳐지나갔다. 순간 소매치기라는 직감이 왔다. 화가 나서 그들을 ?아버렸다. 숙소에 돌아와 ‘내일부턴 더 조심해야겠다.’고 다짐하면서, 소매치기범의 실패 덕분에 주의심을 가질 수 있어 감사했다.

 다음 날 아침, 구엘 공원에 가려고 숙소를 나섰다. ‘현금을 필요한 만큼만 챙길까?’ 생각하다가 조심만 하면 가지고 있는 편이 더 안전할 것 같아 모두 챙겼다.

 공원 정상에 올라 바르셀로나 시내를 구경하고 숨을 좀 돌릴 겸 나무 밑으로 갔을 때다. 머리와 등에 뭔가가 떨어졌다. 비둘기 똥이었다. 휴지도 없어 당황하고 있는 내게 푸근하게 생긴 중년 부부가 다가와 도움을 주었다. 정말 고맙고 친절했다. 아니, 친절한 분들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관광객들에게 새똥을 뿌린 후 도움을 주는 척하며 돈을 훔쳐가는 사기꾼들이었다. 결국 여행 첫 날 소매치기를 당할 뻔했던 나는 둘째 날 진짜로 소매치기를 당해 전 재산을 잃었다. 힘들게 마늘 알바를 하던 때가 떠올랐다. 이후 친구를 만날 때까지 고생이 컸고, 혼자 다니는 동안에도 소매치기를 경계하느라 여행의 재미는 반감되었다.

 여행을 하면서 불편을 느껴보니 새삼 ‘한국은 살기 좋은 나라’라는 생각이 들었다. 평소 나는 우리나라의 부족한 부분만 보면서 불평이 많았다. 힘든 일을 겪고서야 감사함을 느끼는 내가 평소에 얼마나 자만했는지 알 수 있었고 감사 생활이 많이 부족했다는 것을 느꼈다.

 항상 나를 걱정해주시며 잘 되기를 빌어주시는 스승님들, 언제나 맛있는 밥을 차려주시는 어머니, 성인이 되기까지 경제적·정신적으로 키워 주신 아버지, 또 할머니, 할아버지 등. 그동안 당연하게만 생각했던 분들의 감사와 은혜에 보답하도록 노력해야겠다. 나의 진정한 행복을 위해서.


네팔의 예쁜 눈망울

글. 임조련

 3년 전 우리교당에 네팔 출신 원성재 부교무님이 부임하셨다. 그때부터 우리는 히말라야를 가슴에 품은 채 여행경비, 후원금, 후원물품(학용품, 옷, 슬리퍼, 생필품) 등을 차근차근 준비했다. 그리고 마침내 올 여름 떠난 네팔로의 여정. 물품에 대한 과한 욕심 때문에 벌어진 공항에서의 수화물 에피소드와,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결국 깨져버린 캐리어는 무엇이든 하나라도 더 나누고픈 우리들의 마음을 보여주는 일면이다.

 깨끗이 정화된 몸과 마음을 싣고 우리의 목적지인 삼동스쿨을 향해 덜컹이는 차에 오르니, 가난했던 나의 어릴 적 고향에 온 듯한 착각이 들었다. 네팔에서도 가장 가난한 동네들이 모여 있다는 들판 한가운데에 일원상이 서서히 보이기 시작하자 나의 가슴은 마치 애인을 만나러 가는 것처럼 두근거렸다.

 드디어 반짝반짝 빛나는 300명이 넘는 해맑은 아이들과 차근차근 마주하는 순간! 합장한 나의 머릿속은 텅 비어버렸다. 두 눈에서 알 수 없는 눈물이 흘렀으며, 입가에는 함박웃음과 함께 감사의 인사가 절로 나왔다.

 교육환경은 우리와 비교할 수 없이 열악했지만 정말 열심히 수업에 임하는 학생들과 선생님들을 보면서 원불교의 교화·교육·자선의 3대 사업은 반드시 전개되어야만 하는 활동임을 절실히 알게 되었다. 쉬는 시간을 맞은 아이들이 우리가 파준 우물(작두샘물) 앞에 길게 줄을 서서 시원한 물을 마시고, 합장한 채 한국어로 인사를 건네는 모습을 보니 뿌듯함이 절로 느껴졌다.

 4박 6일의 일정 동안 다양한 곳에서 만난 거리의 사람들은 몇 해 전 대지진의 여파를 채 복구하지 못해 가난하고 힘들게 생활하고 있었다. 하지만 한 명 한 명의 얼굴엔 미소가 흘렀고, 그들의 삶은 수행자처럼 여유로워 보였다. 아쉬움을 남긴 채 네팔과 이별을 하면서, 그곳의 자연과 사람과 문화를 마음속에 욕심껏 담았다.

 여행은 ‘얼마나 좋은 곳을 갔는가가 아니라, 누구와 함께 가고 그곳에서 누구와 만나고 얼마나 자주 내 가슴에 그 여행지를 비춰보며 사는가.’가 중요하다고 한다. 그래서 나는 한국에 돌아온 이후 조석으로 네팔 삼동스쿨 아이들의 눈망울을 떠올리며, 원불교 신앙인으로서 너와 나 분별없는 나눔을 실천하고자 보은불공하는 대승행의 활불이 되기를 매일 다짐하고 있다.

 천리마에 붙은 파리가 천 리를 가듯 나 또한 대종사님 법에 껌딱지처럼 붙어있었기에 네팔까지 다녀올 수 있었다. 이 글을 통해 멀리 네팔뿐 아니라 해외에서 일원대도 깃발 아래 오늘도 이 공부, 이 사업에 최선을 다하고 있는 모든 교무님들께 머리 숙여 깊은 감사를 올린다.


오카리나 소리

글. 최민성

겨울….
아프다….
뇌종양 확정 판정을 받은 지 약 10일 지났다.
새벽, 눈 뜰 때마다 너무 큰 고통을 느끼고 있다. 이젠 진통제도 전혀 듣질 않는다.
답답하다. 겨울만이 가지고 있는 그 차가운 바람을 맞아보고 싶다. 그 추위에 고통을 조금은 나눌 수 있지 않을까? 라고 생각해본다.
쿵! 쿵! 쾅! 이제는 바로 걸을 수도 없다. 머리는 직진을 하고 있지만 내 몸은 사방의 벽에 부딪치며 가고 있다.
12월 24일, 그리 춥지 않다.
걷고 있다. 옆에는 그녀가 있다. 너무나 따뜻한 온기다. 함께 크리스마스의 젊음을 나눠야 할 때지만 우리는 그럴 수가 없다. 라페스타 거리는 천 가지가 넘는 불빛들로 반짝이고 있다. 예쁘다.
우리는 걷고 있다. 옆의 그녀가 부끄럽지 않도록 기를 쓰고 똑바로 걷기 위해 노력 중이다. 비틀비틀 너무나 힘들다. 내 점퍼 주머니에서 서로의 손등에 손톱 자국이 날 정도로 손을 꽉 잡고 있다. 그런데 아프지 않다. 여전히 따뜻하다. 왜 걷는지 모르고 그냥 계속 걷는다.
그녀에게 선물을 사주고 싶다. 천 가지 불빛들 사이에 작은 리어카가 보인다. 예쁜 머리핀들이 가득하다. 우리는 돈이 많지 않다. 수술비도 모자라 차일피일 날짜를 미루고 있다. 그러나 그녀에게 꼭 선물을 사주고 싶다. 만원도 하지 않는 하얀 머리핀을 선물한다. 사실 나는 어쩌면 이게 마지막 선물이 될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다.
어디선가 너무도 아름다운 음악 소리가 들린다. 오카리나 소리다. 그 소리에 이끌려 걸어간다. 이상하게 눈물이 난다. 옆을 보니 그녀도 함께 울고 있다. 우리는 무언가를 함께 느끼고 있다. 그 소리 앞에 도착하니 12월 25일이다.
둘은 벤치에 앉아 계속 울고 있다. 우리는 왜 울고 있을까? 분명 슬픔의 눈물과는 다르다. 서로를 위한 치유의 눈물이다. 너무도 큰 슬픔을 마음에서 걷어내는 눈물이다.
우리는 지금도 행복하다는 눈물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온기를 나누며 아름다운 소리를 들으며 세상을 보며 살아가고 있는 지금, 우리는 함께 느끼고 있다. 이 세상이 주는 은혜를….
살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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