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천국’으로 주목받은 전무출신들의 공동체 생활

글. 박윤철


 필자는 오랜 기간 한국사를 공부해 왔다. 그 과정에서 자신이 산 시대를 지상천국(地上天國)이라고 표현한 두 가지 사례를 보았다. 하나는 1894년 동학혁명 당시 충청도 서산의 동학접주였던 홍종식이란 분의 수기에서, 다른 하나는 바로 원불교 초창기 전무출신들의 공동체 생활을 기록한 <불법연구회창건사>에서다.

 1988년(원기 73) 12월 9일, 당시 중앙훈련원(현재의 원불교대학원대학교) 대법당에서는 원광대학교 원불교사상연구원 주최로 ‘전무출신 이념의 재조명’이라는 테마의 학술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그 회의 석상에서 원불교학 수립의 ‘4대 선구자’의 1인으로 존경받고 있는 여산 유기현(1930~2007) 교수는 전무출신에 대해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대종사는 한국 땅에 이 회상을 창조함으로써 거기에 전무출신(專務出身)이라는 새로운 인간상의 상징어를 제시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에게 계속하여 새로운 세계관과 인간혼을 불어 넣었던 것이다. 따라서 대종사는 이 교단 형성을 ‘못자리판’에 비유하며, 전무출신은 만인 앞에서 표본적 인물이 되어야 함을 강조하기도 했다. (유기현, ‘교서에 나타난 전무출신 정신’, <원보>29호, 1988년 12월, 6쪽.)

 유기현 교수의 말씀대로 전무출신이란 용어는 5천 년 한국 역사에서 소태산 대종사에 의해 처음으로 제시된 새로운 인간상의 상징어이다. 전무출신은 후천개벽 시대를 이끌 개벽인간(開闢人間)의 또 다른 표현인 바, 그 전무출신이 지향해야 할 이념은 이미 1919년(원기 4) 8월에 구인선진이 이룬 법인성사(法認聖事)에서 선명하게 드러난 바 있다.

 (도탄에서 헤매는 창생을 위해 죽어도 여한 없다는-주) 제군들의 마음은 천지신명이 이미 감응하였고, 음부공사(陰府公事)가 이제 판결이 났으니 (중략) 제군의 몸은 곧 시방세계에 바친 몸이라. 이 앞으로 장차 영원히 모든 일을 진행할 때에 비록 천신만고(千辛萬苦; 온갖 고생)와 함지사지(陷地死地; 죽을 자리에 떨어짐)를 당할지라도 오직 이 때의 이 마음을 변하지 말고, 또는 가정애착과 오욕의 환경을 당할 때에는 오직 금일에 죽은 셈만 잡는다면 다시는 거기에 끌리지 않을지니 그 끌림이 없는 순일한 생각으로 공부와 사업에 전무하여 길이 중생제도에 노력하라.(<불법연구회창건사>)

 원기 4년의 법인성사에서 드러난 전무출신 이념의 핵심은 ‘시방세계에 바친 몸’이란 인식이다. 이것은 전무출신이란 곧 시방세계라는 공공(公共)세계를 위해 자신의 심신을 다 바쳐 일하는 ‘크게 열린 인간’을 뜻한다. 원불교에서 전통적으로 강조해 오고 있는 ‘시방일가 사생일신(十方一家 四生一身)’의 삶을 사는 이가 바로 전무출신인 것이다. 그러기 위해 전무출신은 가정애착과 오욕을 넘어 ‘순일한 생각’으로 시방세계를 위한 ‘공부와 사업’에 전무하는 삶을 살게 된다.

 1924년(원기 9) 음력 4월 29일에 불법연구회라는 이름으로 새 회상이 공식 출범하자 개벽인간 전무출신들의 초기 공동체 생활이 정식으로 시작되었다. 이 초기 공동체 생활에 합류한 전무출신자는 영광에서 올라온 김광선, 오창건, 이동안, 이준경을 비롯하여, 1918년경 경북 성주에서 영광으로 이주해 온 송규와 송도성 형제, 그리고 진안(전주) 출신의 전음광, 김제 출신의 송적벽과 김남천, 내장사 승려로 있다가 대종사의 제자가 된 송만경 등이었다.

 하지만 이들 전무출신들의 생활은 곤궁하기 그지없었다. 숙소도 마련되지 않아 불법연구회 창립 발기인 가운데 1인이었던 박원석 선진의 집을 임시 숙소로 사용해야 했고, 생활 방로가 없어서 동양척식주식회사 소유의 토지를 빌려 소작(小作)을 해야 했으며, 그것도 모자라 결국 동년 음력 12월에는 제이법(製飴業; 엿 장사)마저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도산 이동안(1892~1941) 대봉도가 엿을 팔기 위한 행상(行商)에 나서서 “일찍이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그 행상에 소리내기가 곤란”하여 동네 아이들에게 엿을 몇 개 주고 대신 소리를 하게 하였다는 일화는 초기 전무출신들의 생활상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일화가 아닐 수 없다.

 한편, 초기 전무출신들이 “조석식사도 충실치 못하여 대개는 엿밥으로써 때(끼니-주)를 대신할 적이 많았으며, 거처에 있어서는 침구가 없는 누습한 방에서 피곤한 몸을 쉬어야만” 하는 궁핍한 처지에서도 그 같은 공동체 생활을 오히려 ‘지상천국’으로 삼고 단란한 생활을 해나가기 시작하자 일제강점기 민족 언론들이 불법연구회를 주목하기 시작했다. 그 대표적 사례가 1928년(원기 13) 11월 25일자 <동아일보>기사이니, 그 제목이 바로 ‘세상 풍진 벗어나서 담호반(淡湖畔)의 이상적 생활-정신수양, 사리연구, 작업취사의 강령 하에 움직이는 4백회원’이다.

 그렇다. 개벽인간 전무출신들이 개벽 세상을 열기 위해 공부와 사업에 전무하고자 공동체 생활을 영위하던 1920년대 불법연구회를 지상천국이란 말 외에 그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었겠는가.

 끝으로, 전무출신의 남상(濫觴;시초-주)은 누구인가가 궁금해진다. <원불교교사>를 비롯한 모든 교사 자료를 종합해 보면, 전무출신 제 1호는 팔산 김광선(1879~1939) 종사라는 사실에 이론의 여지가 없다. 1924년(원기 9) 이래 열반하시기까지, 전북 익산군 북일면 신룡리 벌판에서 10여 명 전무출신들이 공동체 생활을 개시했을 때 팔산 종사의 나이는 이미 46세를 넘고 있었다. 46세의 장년에  출가(出家)를 단행하여 시방세계 모든 이웃을 위해  ‘공부와 사업’에 전념하는 개벽인간이 될 것을 서원하고, 낮에는 “만석리 방면에서 작농(作農)을 하며, 밤에는 진리 연구에 몰두하시던” 팔산 종사의 위풍당당한 모습을 독자 제위들께서는 한 번쯤 상상해 보시기를 염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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