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사람은 이익을 중시하고 성인은 순수함을 귀하게 여긴다
글. 김정탁


 외편의 <천지(天地)>, <천도(天道)>, <천운(天運)>을 끝내고 새로운 장 <각의(刻意)>로 들어간다. 각의를 직역하면 뜻(意)을 새긴다는(刻) 건데, 의역하면 뜻을 굳게 지닌다는 의미이다. 각의에 이어 ‘떳떳이 행동한다.’는 의미를 지닌 상행(常行)이란 단어가 등장하므로, 각의 편은 ‘소신대로 떳떳이 행동한다(刻意常行).’는 이야기로 시작한다. 각의상행, 즉 소신대로 떳떳이 행동하는 건 언뜻 보아 좋은 말이다. 유가의 시각에선 특히 그러하다. 왕명에 대한 극단적 반대행위로 조선의 선비들이 광화문 앞에 거죽을 깔고 앉아 도끼를 옆에 끼고 벌인 농성도 어쩌면 각의상행에 따른 행동이다. 왕이 자신의 청원을 들어주든지, 아니면 도끼로 자신의 목을 치든지 하는 엄청난 폭력성을 지닌 무언의 시위여서이다. 이런 행동에 대해 장자는 부정적이다. 무위(無爲)에 따른 행동이 아니라 유위(有爲)에 따른 행동이기 때문이다.

 장자에 따르면 이런 사람은 분명 높은 이상을 거론하며 세상을 원망하거나, 또는 누군가를 헐뜯음으로써 스스로를 극진히 높이려는 사람이다. 세상과 떨어져 세속과 다르게 살아가는 사람 중에 산골에 숨어사는 선비, 세상을 비방하는 사람, 몸이 말라 비틀어 초췌해져 결국 깊은 못에 투신하는 사람 등이다. 장자가 ‘깊은 못에 투신하는 사람’을 특별히 언급한 건 굴원(屈原)을 염두에 둔 거다. 굴원은 돌을 안고 강에 뛰어들어 죽음으로 왕에게 간한 사람인데 중국 역사상 최고의 의인(義人)으로 추앙받는다.

 장자는 계속해서 유위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의 유형을 소개한다. 어짊(仁)과 의로움(義), 충성(忠)과 신뢰(信)를 강조하고, 공손(恭)과 겸손(儉), 양보(推)와 사양(讓)을 위해 몸과 마음을 수양하는 사람도 그러하다. 장자에 따르면 인의충신공검추양(仁義忠信恭儉推讓)은 유위적이다 못해 인위적이다. 장자가 말하는 도덕은 무엇보다 무위자연(無爲自然)에 입각해야 한다. 이런 유형은 태평한 세상을 살아가는 선비, 가르치는데 그치는 선생, 말로만 떠드는 학자에게 흔히 발견된다.

 또 큰 공을 거들먹거리며 큰 명성을 세우려는 사람, 군신의 예의를 따르고 상하의 질서를 바로 잡으면서 나라를 다스리는 일에 전념하는 사람 또한 유위에 입각해서 살아가는 사람이다. 장자가 볼 때 이들 역시 자연스럽지 못한 인위(人爲)를 추종하는 사람이다. 이런 유형의 사람은 조정의 선비, 군주를 떠받들어 나라를 튼튼히 하려는 신하, 공을 이뤄 국토를 넓히려는 무인에게서 자주 발견된다.

 또 인적이 드문 늪이나 못으로 가서 한적하게 허송하며 살거나, 낚시질하며 한가하게 살면서 아무 것도 하고자 하는 바가 없는 사람도 유위에 입각해서 살아가는 사람이다. 장자에 따르면 이렇게 살아가는 것 역시 무위자연한 게 아니라 유위에 입각한 행동이다. 자연을 자신의 집이라 여기는 강해지사(江海之士)나 세상을 등진 사람, 한가함과 여유로움을 즐기는 사람에게서 흔히 발견된다.

 또 깊은 호흡을 하는 취구호흡(吹呼吸), 낡은 기운을 토해 신선한 기운을 빨아들이는 토고납신(吐故納新), 곰이 나뭇가지에 매달리고 새가 날 때 기지개켜는 걸 따라하는 웅경조신(熊經鳥申) 등을 통해 자신의 수명을 연장시키려는 사람도 유위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이다. 장자가 볼 때 이런 행동 또한 무위자연에 따른 행동이 아니다. 도인술(導引術)을 익힌 선비, 몸을 보양하는 사람, 팽조(彭祖)처럼 오래 살길 바라는 사람에게서 흔히 발견된다.

 장자는 이런 다섯 유형의 인간을 왜 무위자연하지 못하다고 보는 걸까? 장자에 따르면 무위에 따라 사람이 저절로 고상해지면 모든 걸 잊을 수 있고, 모든 걸 가질 수 있기에 굳이 유위에 따라 소신대로 떳떳이 행동할 필요가 없다. 마찬가지로 무위로서 몸과 마음을 잘 닦으면 인의라는 유위가 필요 없고, 무위에 따라 나라를 다스리면 공명이란 유위가 필요 없고, 무위에 입각해서 마음이 여유로워지면 굳이 강과 바다에 갈 필요가 없고, 무위자연의 원리에 따라 오래 살면 도인술이란 유위가 필요 없다.

 무위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은 이처럼 담백하고, 무한한 경지에 있다. 그래서 수많은 미덕들이 저절로 이들을 따른다. 이것이 천지의 도(道)이자 성인의 덕(德)이다. 따라서 담박함(恬)과 적막함(寂漠), 허무(虛無)와 무위(無爲)는 천지의 근본(本)이며, 도덕의 본질(質)이다. 성인도 천지의 근본과 도덕의 본질에 머물면서 쉬는데, 쉬면 마음이 평안해지고, 마음이 평안해지면 담박해진다. 또 마음이 평안하고 담박해지면 우환이 끼어들지 않고, 사악한 기운도 엄습하지 못해 성인의 덕은 온전해지고, 그의 정신엔 허물어짐이 없다.

 이 때문에 성인의 삶은 자연의 행함(天行)과 같고, 성인의 죽음은 만물의 변화(物化)와 같다 말한다. 성인의 삶이 자연의 운행과 같다는 건 그의 삶이 봄, 여름, 가을, 겨울의 변화처럼 희로애락도 끊임없이 순환하는 걸 알기에 어느 한 순간 삶의 단면을 자신의 삶으로 평가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성인은 쉽게 기뻐하거나, 쉽게 슬퍼하지 않는다. 또 죽음이 만물의 변화와 같다는 건 만물이 태어나면 사라지고, 사라지면 다시 태어나는 것처럼 죽음도 단지 변화의 한 과정이란 의미이다.

 따라서 성인의 삶은 그가 가만히 있을 땐 음(陰)과 같은 덕(同德)이 되고, 움직일 땐 양(陽)과 같은 물결(同波)이 된다. 또 성인의 삶은 복(福)을 부르려고 앞장서지 않고, 화(禍)를 피하려고 애쓰지 않는다. 그래서 무덤덤하게 살아갈 뿐이다. 또 성인의 삶은 느낀 후에 반응하고, 닥친 후에 움직인다. 그래서 미리 걱정하거나 예단하지 않는다. 물론 부득이(不得已)할 땐 일어선다. 이런 성인의 삶은 결국 감각작용인 지각(知)과 심관작용인 의도(故)를 버리고 자연의 이치(理)를 좇는 삶이다.

 그러니 슬퍼하거나 즐거워하는 건 덕(德)에서 어긋난 행위이고, 기뻐하거나 성을 내는 건 도(道)를 넘어선 행위이고,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건 마음을 잃은 행위이다. 따라서 슬퍼하거나 즐거워하지 않는 마음이 덕의 지극함(至德)이며, 한결같아 변하지 않는 마음이 고요함의 지극함(至靜)이며, 사물과 사람에 대해 거슬리는 게 없는 마음이 비움의 지극함(至虛)이며, 사물과 주고받음이 없는 마음이 담박함의 지극함(至)이며, 자연과 거스르지 않는 마음이 순수함의 지극함(至純)이다.
 
 이 때문에 성인에겐 자연의 재난도 없고, 사물에 얽매이지도 않고, 사람의 비난도 받지 않고, 귀신의 처벌도 없다. 또 성인은 곰곰이 생각하지 않고, 미리 앞서 일을 도모하지 않는다. 또 성인은 빛이 있어도 빛나지 않아 그를 봐도 눈이 부시지 않고, 누군가에 믿음이 있어도 함부로 약속하지 않는다. 또 성인이 잠들었을 땐 꿈을 꾸지 않아 깨어나더라도 걱정이 없다.
그러니 몸이 수고로운데 쉬지 않으면 몸이 지치고, 정신을 쓰면서 멈추지 않으면 정신이 고갈된다고 말하는 거다. 이는 물의 본성에 비유된다. 물의 본성은 다른 것이 섞이지 않으면 맑고, 움직이지 않으면 평평하다. 만약 꽉 막혀 흐르지 않으면 절대로 맑아질 수 없다. 우리 몸도 마찬가지여서 몸이 지치고 정신이 고갈되면 맑아질 수 없다. 다른 것과 섞이지 않고 평평한 모습이 자연의 덕의 모습(天德之象)이다. 순수하여 아무 것도 섞이지 않고, 고요하여 한결같아 변하지 않고, 느긋하여 하고자 하는 바 없고, 자연의 운행에 따라 움직이는 게 정신을 기르는 방법이다.

 옛날 오나라와 월나라의 명검이 유명한 데, 이런 명검을 가진 사람은 상자에 보관하여 함부로 사용하지 않는다. 명검이 싸우는 수단을 넘어 지극한 보물로 바뀐 것이다. 성인의 정신(精神)도 이런 명검과 같아 함부로 사용하지 않는다. 함부로 사용하지 않아서 성인의 정신은 사방으로 똑같이 흘러 어디든지 도달할 수 있다. 그 결과 위론 하늘에 닿고, 아래론 땅에 서린다. 이것이 만물을 변화시키고 기르지만 그 모습을 알 수 없다. 그런데 그 이름은 하느님(帝)과 같다 말한다. 순수하고 소박한 도(純素之道)는 오로지 이 오묘한 정신을 지킨다. 이를 지켜 잃지 않으면 정신과 하나가 되고, 그 하나 된 정신은 순수함과 통해 하늘의 도리(天倫)와도 합치된다.

 그래서 속담에 말하길 “보통사람(衆人)은 이익을 중시하고, 청렴한 선비(廉士)는 명예를 중시하고, 현명한 사람(賢人)은 뜻을 숭상하고, 성인(聖人)은 순수함을 귀하게 여긴다.”고 한다. 그러니 소박함(素)은 본래 타고난 정신에 다른 게 섞이지 않는 걸 말하고, 순수함(純)은 본래 타고난 정신에 허물어짐이 없는 걸 말한다. 이런 순수함과 소박함을 체득할 수 있어야 참된 사람(眞人)이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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