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황하는 그들에게 해줄 수 있는 일

세상은 여전히 차별을 넘어 무관심 혹은
‘나만 아니면 돼’ 식의 방치를 하고 있다.

글. 강명권

 아침 6시다. 오늘도 노숙인들을 위한 급식을 준비하기 위해 서울역 주차장으로 바쁜 걸음을 한다. 이른 시간인데도 기차를 타러 오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거리에는 방황하는 사람들이 더 많다. 서울역 광장이나 지하도의 노숙인들이다. 그들은 이른 아침부터 무언가를 찾는 것처럼 이리 저리 왔다 갔다 한다. 
 
 거리에서 밤새 술을 마시거나 곳곳에서 잠을 자는 사람들도 많다. 쓰레기가 가득한 곳에서, 쌓인 술병 옆에서 자는 사람들. 누군가에게 얻은 돈으로 컵라면 하나를 사 먹고 벽에 기댄 채 잠든 사람들도 있다. 
 
 이들 중에는 자신이 어디서 태어났고, 부모는 누구고, 심지어 자신의 이름은 뭔지조차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평생 가족과 사람들에게 버림받으면서 살아온 인생이다. 태어나서 엄마 젖 한번 물어보지 못하고 살아온 사람들도 있다. 자신이 처음 온 곳을 모르기에 당연히 불안정한 삶을 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건 방황으로 이어진다.

 며칠 전 이른 아침. 서울역에서 사무실로 걸어오는데, 계단 끝에 경찰 두 사람이 심각한 표정으로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무슨 일일까?’ 하는 마음에 다가가보니, 노숙인 한 분이 머리와 얼굴에 피를 흘리고 있었다. 계단에서 넘어졌다고 한다. 경찰 한 분은 119에 전화를 하고 있었고, 한 분은 노숙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작년에 장애 노숙인 한 분이 휠체어를 타다 계단으로 떨어져 운명을 달리했던 적이 있다. 그러나 당시 매스컴은 지하철에 뛰어든 일반인에 대해선 난리였어도, 지하도에 떨어져 사망한 노숙인에 대해서는 무관심했다. 대종사님께서는 지우 차별은 있더라도 다른 차별은 말라고 하셨다. 노숙인이기 전에 똑같은 사람인데, 세상은 여전히 차별을 넘어 무관심 혹은 ‘나만 아니면 돼’ 식의 방치를 하고 있다. 이들의 삶의 방황은 과연 어디서 끝날 수 있을까?

 노숙인의 삶을 지원하는 방안으로 정부나 시에서는 3개월 동안 고시원이나 쪽방에서 살 수 있도록 방세를 지원하는 ‘주거지원’과 그간 생활비를 벌 수 있는 일자리 정책을 시행하고 있다. 최소한의 삶을 살아갈 수 있게 하는 정부의 배려라고나  할까? 하지만 받는 입장에서는 그 지원 수준이 ‘척’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그에 비해서 종교·사회복지단체에서는 그들이 인간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지원주택을 지어 5~6평의 원룸을 지원하는 사업을 하고 있다. 신기한건 여기에 들어온 노숙인들 대부분이 그 방을 유지하기 위해 일을 하거나 노력하는 모습을 보인다는 것이다. 현장에서 노숙인의 삶을 오랫동안 보아온 종교계와 사회복지 실무자들은 노숙인들이 거리의 삶에서 일반 주민의 삶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정부나 시보다 먼저 나서서 방안을 마련하고 있다.

 방황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더 나은 삶을 살게 해주는 것이 나의 사명이다. 그러기에 나태하지 않고 더 정성을 다해 그러한 역할을 할 수 있는 현장을 만들고 준비해야겠다고 다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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