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지사지면 갈등·다툼 없어

서로 주장만 내세우다 禍 불러…
결국 상대에 대한 이해의 폭이 관건

글. 박정원  월간<산>부장·전 조선일보 기자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 주관을 가지고 살아간다. 주관은 모든 생활의 판단 기준이 된다. 그 주관은 유전적 요소와 환경적 영향에 의해 형성된다. 부모에게 물려받고, 어릴 적부터 주어진 환경에 의해 형성된 자아가 지금 현재의 본인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자기 주관을 남에게 곧잘 내세우면서, 함께 살아가는 다른 사람의 주관에 대해서는 생각지 않는다. 자기 입장만 먼저 생각하는 것이다. 이는 항상 다른 사람과의 갈등과 다툼의 단초가 된다.

 세상에는 객관(Object)이 없다고 한다. 사람들이 흔히 객관이라 말하는 것도 본인의 주관적 판단에 의해 이뤄지기 때문에 완전하게 객관적이지 않다고 지적한다. 그래서 사회학에서는 상호주관성(Intersubjectivity)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복수의 주관에서 구조나 인식으로 성립되는 공통적인 가치나 의미를 말하는 데, 어떤 갈등이나 다툼이 생겼을 때 주관보다는 상호주관성에 의해 판단하면 상대방을 조금 더 이해하고 문제를 보다 쉽게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이를 한자로 하면 역지사지(易地思之) 정도 되겠다. 역지사지한다면 개인 간의 갈등과 다툼, 나아가 사회적 문제까지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역지사지는 <맹자> 이루편 ‘우직안회동도(禹稷顔回同道)’에 나온다. 중국 상고시대 전설적
성인인 하우는 태평성대를 구가하면서 물에 빠진 백성이 있으면 자신이 치수를 잘못한 탓으로 여겼고, 후직은 굶주리는 백성이 있으면 자신이 일을 잘못했기 때문이라 여겼으며, 난세를 지낸 공자의 제자 안회는 궁핍한 생활 속에서도 도(道)를 추구한 행위는 모두 똑같다고 여겼다는데서 유래한다. 맹자는 이를 역지즉개연(易地則皆然)이라 했다. 서로 처지나 경우를 바꾼다 하더라도 똑같이 했을 것이라는 거다. 
 실제로 어떤 일이 생겼을 때 상대방의 입장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얼마 전 황당한 경험을 상세히 재구성해봤다. 역지사지로 이해하려고 노력했지만 역시 쉽지 않았던 일이다.

 일요일 법회를 마치고 일이 있어 바로 회사로 갔다. 일에 집중하고 있는데 오후 3시쯤 교당에서 전화가 왔다.
“박용철(필자의 법명)님 차가 교당 주차장에서 옆 차를 긁고 나간 것 같습니다. 확실한 건 아니지만 긁힌 차가 외제차인데, 그 옆에 박용철님 차가 있었습니다. ○○님에게 전화를 해보시죠.”
전화를 끊고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를 하고 있담.’ 하고 생각했지만 아무래도 찜찜했다. 전화번호가 적힌 메시지를 받고 바로 전화를 걸었다. 신분을 밝히고 자초지종을 물었다.
“아, CCTV를 보니 제 차 옆에 있었던 박용철님 차가 제 차를 긁고 지나갔던데요. 오늘 교당에 몇 시에 들어왔습니까?”
“출석 체크하고 자리에 앉으니 9시 57분이었습니다.”
“몇 시에 나갔습니까?”
“법회 마치고 식사하고 12시 조금 넘어 바로 나갔습니다.”
“아, 그러면 맞습니다. 제 차를 확실히 긁고 지나갔군요.”
이게 무슨 봉변이고 날벼락 같은 소린지…. 교당에 다시 전화해서 정확히 CCTV에 어떤 상황이 담겼는지 물었다.
“박용철님 차가 확실히 긁은 증거가 담겨 있는 건 아니고 법회 보는 그 시간에 옆에 있었다는 겁니다. 옆에 주차했다는 사실 말고는 확인된 건 없습니다. 박용철님이 차 양 옆을 촬영해서 그 분한테 메시지로 보내주면 어떻습니까? 내일 아침에 그날 CCTV 전체를 확인하려고 합니다.”
전화를 끊고 번호판이 나오게 사진을 3장 촬영해 메시지로 보냈다. 그리고 확인하기 위해서 다시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안 받는다. 이후부터는 기분도 나쁘고, 일이 손에 잡히질 않았다. 경계라고 느낄 겨를도 없이 이미 경계가 내 마음에 훅 들어와서 나를 시험하고 있었다. 그 분이 전화를 안 받기에 다시 메시지 하나를 더 보냈다.
‘혹시 블랙박스를 보시면 더욱 자세한 상황을 알 수 있지 않을까요?’
이번에는 답이 없다. 기분이 계속 나빴다. 집에 돌아와서 아내에게 화풀이 겸 언성을 높였다. “아니, 당신은 내가 상황을 얘기 했으면 아까 교당에 있으면서 CCTV 전체를 다 보고 나오지, 뭐가 급하다고 그냥 나오고 그래.”
아내는 “왜 나한테 그래. 교당에 물어보니 박용철님이 했다는 증거가 있는 건 아니고 그 시간에 거기에 있었다는 것뿐이라고 해서 그냥 그런 줄 알고 왔지. 내일 가서 보면 되지!”라며 같이 언성을 높인다.
서로 기분이 나빠져 말이 없었다. 그러다 밤 8시 50분에 그 분에게 메시지가 왔다.
‘죄송합니다. 제가 의심을 한 게 아니고 차에 흠집이 생겨서 CCTV를 확인했는데 옆에 주차하고 나간 차로 확인되어 전화를 드렸습니다. 그 후에 주차한 차는 확인을 하지도 않고 연락을 드렸습니다. 교무님에게 연락해서 그 전후 확인을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너무 성급한 나머지 죄송합니다. 다음 주 교당에서 뵙겠습니다.’
다음 날 오후 5시 34분에 전화가 왔다.
“차를 확인해보니 박용철님 차가 나가고 나서 두 대가 더 들어와 그 자리에 주차했더군요. 그 중에 나중의 차가 제 차를 긁었습니다. 최종 확인했습니다.”
“제 차가 아니라고 확인돼서 다행이고 오해가 풀렸으니 제 마음도 편합니다. 예, 잘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곰곰이 생각을 해봤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식으로 남을 의심하면서 전화도 안 받고 물어내라는 식으로 하더니, 다른 사람으로 확인되니까 그냥 간단히 전화 한 통화로 끝낸다. 영 기분이 안 좋다.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봤다. 만약 내가 외제차를 뽑은 첫날 차가 죽 긁혔다면 심정이 어땠을까. 아마 그 사람보다 더 흥분해서 전화로 뭐라고 하지는 않았을까. ‘그 사람은 나한테 점잖게 얘기 한 거야.’ ‘그래도 완전히 확인하고 연락해야지, 일단 사람을 의심한 건 그 사람이 나쁜 거 아냐?’ 등등 이런저런 생각이 떠올랐다.

 내가 그 날 당한 경계를 어떻게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까. 또 한 번 생각에 잠겼다. 여러 상황을 반조해본다. 일단 확실하지 않으면 남을 의심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부터 든다. 어떤 일이 일어나면 최대한 확실한 증거를 찾는 노력부터 해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어떤 경계가 올 때, 그 경계를 궁글리는 여유를 갖고 역지사지로 돌아보면 훨씬 더 상황을 현명하고 훌륭히 넘길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아직 찜찜한 마음이 조금 남아 있는 것을 보니 진정한 역지사지는 역시 쉽지 않은 것 같다. 역지사지도 결국 마음공부의 하나가 아닌가 싶다.

저작권자 © 월간원광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