샘물이 마르면 물고기는 침 거품으로 서로를 적셔 주지만 강에서 물을 잊고 지내는 것만 못하다

글. 김정탁


 <장자> ‘내편’을 구성하는 7개 중 하나가 대종사(大宗師)이다. 원불교에겐 원불교를 만든 교조 소태산을 대종사라 부르기에 더욱 친근한 용어이다. 불가에서도 대종사란 말을 쓰지만 <장자>가  2천 년 전에 쓰인 책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불가도 장자에게서 이 용어를 차용한 듯싶다. 장자가 말하는 대종사의 의미는 무엇일까? 무위자연(無爲自然)에 따라 세상의 이치를 파악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학의 다리가 길어도 자르지 않고, 오리 다리가 짧아도 늘리지 않는다. 이 점이 유가와 다르다. 유가는 인의예지(仁義禮智)로 세상을 재단한다. 그래서 인의예지에 이르지 못하면 인위적으로 고쳐야 한다. 마치 학의 다리가 길면 자르고, 오리 다리가 짧으면 늘려주는 것처럼 말이다. 이런 내용은 ‘외편’ 천운(天運)의 마지막 부분에 공자와 노담(老聃)1)의 대화를 통해 또다시 제시된다.

 쉰한 살이 되도록 도(道)에 대해 듣지 못한 공자가 노담을 찾아갔다. 노담은 공자가 북방의 현자로 들어온 사람이니 당연히 도를 얻었을 거라 여겼다. 그런데 뜻밖에도 아직 도를 얻지 못했다는 대답을 듣는다. 노담은 안타까운 나머지 그동안 도를 어디에서 찾았는지 공자에게 물었다. 공자는 주나라 예법, 즉 주례(周禮)와 같은 법도에서 찾으려 했지만 5년이 지나도록 얻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러자 노담은 그 다음엔 도를 어디에서 찾았냐고 물었다. 이에 공자는 주나라 역학, 즉 주역(周易)처럼 음양의 이치에서 도를 찾으려 했지만 12년이 지나도록 얻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에 노담은 그랬을 거라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노담은 도가 누군가에 바쳐질 수 있는 거라면 군주에게 바치지 않을 수 없고, 누군가에 올려질 수 있는 거라면 부모에게 올리지 않을 수 없고, 사람에게 알려줄 수 있는 거라면 형제에게 알리지 않을 수 없고, 사람에게 줄 수 있는 거라면 자손에게 주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그만큼 도는 쉽게 바쳐지고, 올려지고, 알려지고, 줄 수 있는 게 아니어서다. 왜 그럴까? 도는 마음에 도의 주인이 될 만 한 게 없으면 머물지 않고, 바깥에 알맞은 올바름이 없으면 실행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음에서 나온 도가 바깥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성인은 도를 내보이지 않고, 바깥에서 들어온 도가 마음에 도의 주인으로 삼을만한 게 없으면 성인은 도에 기대지 않는다.

 공자가 소중히 여기는 명예(名)와 인의(仁義)도 마찬가지이다. 명예는 일종의 공기(公器)이므로 혼자서 많이 가지려 하면 안 된다. 혼자서 많이 가지면 바깥에 알맞은 올바름이 없는 거다. 또 인의도 선왕들이 잠시 묵었던 숙소이므로 하루쯤 머무는 건 괜찮지만 거기서 오래 머물면 안 된다. 인의에 오래 머물면 책망이 많아지는데 이 역시 바깥에 알맞은 올바름이 없는 거다. 그러니 명예를 독점하거나 인의에 오래 머무는 상황에선 도가 제대로 실행될 수 없다.
그러면서 노담은 이와 반대되는 인간으로 지인(至人)을 말한다. 옛날에 지인은 인(仁)이란 길을 빌리고, 의(義)라는 숙소에 잠시 머물면서 소요의 언덕을 노닐었다. 이는 인의의 필요성은 인정하지만 인의에 집착하는 건 반대한다는 입장이다. 또 옛날에 지인은 손바닥만한 밭을 일구어 살면서 먹고 나면 남을 게 없을 정도의 밭만 경작했다. 옛날엔 이런 생활을 가리켜 채진지유(采眞之遊), 즉 참됨을 캐는 노닒이라고 말했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은 채진지유의 삶을 살지 못한다. 그리고 그 반대의 삶, 즉 부유함과 드러냄과 권세를 좇는 삶을 추구한다. 부유함을 추구하는 사람은 재산을 남에게 넘기지 못하고, 드러냄을 좋아하는 사람은 명예를 남에게 넘기지 못한다. 권세를 가까이하는 사람 또한 권력을 남에게 내주지 못한다. 그래서 재산, 명예, 권력을 잡으면 뺏기지 않을까 두려워하고 만약 이것들을 잃기라도 하면 슬퍼한다. 게다가 재산, 명예, 권력의 유무는 쉴 새 없이 변하는 데 사람들은 그것의 한 단면만 보는데 정신이 팔려 있다. 노담은 이런 사람을 ‘자연의 형벌을 받는 사람’이라 말한다.

 그런데 원망과 감사, 빼앗음과 베풀음, 헐뜯음과 가르침, 태어남과 죽음은 사람을 바로잡도록 하는 도구(正器)이다. 이것들을 통해 사람들은 부유함과 드러냄, 그리고 권세라는 욕망에서부터 벗어날 수 있다. 그렇지만 자연의 큰 변화의 이치를 따르기에 자신의 마음이 막히지 않는 사람만 이 여덟 가지 도구를 제대로 사용할 수 있다. 그래서 바로 잡는(正) 거란 곧 자기 마음을 바로 잡는 거다. 그러니 마음을 바로 잡지 않으면 자연의 이치에 도달하는 문, 즉 자연과 통하는 문, 즉 천문(天門)은 열리지 않는다.

 화제를 좀 돌려 보자. 공자가 중요하게 여기는 인의(仁義)에 대해 노담은 어떻게 생각할까? 노담은 흩어져 날아 다니는 겨나 모기쯤에 비유한다. 왜 그런 걸까? 겨가 눈에 들어가면 눈을 제대로 못 떠 천지사방의 방향이 바뀌면서 위치를 분간하지 못한다. 또 모기가 살갗을 물면 밤새도록 잠을 자지 못한다. 이처럼 겨와 모기는 우리 몸에 피해를 주는 데 반해, 인의는 마음을 어지럽힌다. 인의보다 마음을 더 크게 어지럽히는 건 없다. 인의를 두고 서로 따지다보면 사람의 마음이 어지러워지기 마련이다. 조선의 당파싸움도 결국 인의와 같은 명분을 두고 다투었던 결과가 아닌가!

 이에 노담은 세상 사람들이 그 순박함을 잃지 않도록 하고, 또 바람에 따라 자연스럽게 움직이도록 해 모든 덕을 서게 해야 한다고 말한다. 마치 두루미가 날마다 목욕하지 않아도 항상 희고, 까마귀가 날마다 검게 물들이지 않아도 항상 검은 것처럼 말이다. 또 샘물이 말라 메마른 땅에서 머무는 물고기가 제 아무리 숨을 내쉬면서 서로를 축축하게 해주고 침 거품으로 서로를 적셔 주어도, 강과 호수에서 물고기가 물을 잊고 지내는 것만 못한 것처럼 말이다.
노담을 만난 공자는 비로소 크게 느낀 바가 있어 제자 자공에게 이제야 용(龍)을 보았다고 고백한다. 이를 의아하게 여긴 자공은 직접 노담을 찾아 갔다. 그리곤 삼황오제(三皇五帝)가 세상을 다스렸던 방법은 달랐지만 잘 다스려서 명성을 얻은 건 같은데 유독 노담 선생만 이분들을 성인(聖人)이 아니라고 말하는 지에 대해 따졌다. 그러자 노담은 삼황오제가 세상을 다스린 방법은 자공이 아는 거와는 달리 대동소이하므로 잘 다스린 게 아니라고 친절히 설명한다. 

 황제(皇帝)가 세상을 다스렸을 적엔 백성의 마음을 하나로 묶어 부모가 죽었을 때조차 곡하지 않은 자가 있는데도 백성은 그를 비난하지 않았다. 이는 자연스런 덕의 모습이 아니다. 또 요임금이 세상을 다스렸을 적엔 백성의 마음을 서로 사랑하게 만들어 부모가 죽었을 때조차 부모상을 치루지 않은 자가 있는데도 백성은 부모상을 치루지 않은 자를 비난하지 않았다. 이 역시 자연스런 덕의 모습이 아니다. 또 순임금이 세상을 다스렸을 적엔 백성의 마음을 경쟁시켜 임산부는 열 달 만에 아이를 낳고, 어린애는 태어난 지 다섯 달 만에 말하고, 방긋방긋 웃기도 전에 누군지 알아보면서 어려서 죽는 일이 생겨났다. 이 역시 자연스런 덕의 모습이 아니다.

 이어서 우임금이 세상을 다스렸을 적엔 백성의 마음을 변하도록 해 사람들은 각기 다른 마음을 품고 무기를 사용해도 그럴 듯한 이유를 대고, 도둑을 죽여도 살인이 아니라고 말하면서 사람마다 자신만이 소중하다고 여겼다. 이에 버금해서 세상 사람들이 제멋대로 아무 짓이나 하자 세상도 크게 놀라 유가나 묵가가 모두 일어나 싸움질을 해댔다. 물론 유가와 묵가가 처음 일어날 땐 그래도 지켜야 할 도리를 지켰지만 서로간의 싸움은 점점 혼란스러워졌다. 이는 자연스런 덕의 모습과는 크게 멀어진 것이다. 삼황오제는 세상을 다스렸다고 말하지만 노담이 볼 때 실은 이렇게 심하게 세상을 어지럽힌 일도 없다. 그러니 이 모두가 인의에 집착한 결과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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