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나쁜 기억이 오래 갈까?

감정과 연결된 편도체 영향
원망을 감사로 돌리는 자세만 가져도 바꿀 수 있어

글. 박정원  월간<산>부장·전 조선일보 기자

 사람의 좋은 기억은 순간이고 나쁜 기억은 오래도록 잊히질 않는다. 왜 나쁜 기억이 더 오래도록 남을까? 잊으려고 부단히 노력해도 기억에 선명하게 남는다. 참으로 알 수 없고, 묘한 일이다. 인간의 본능, 성악설 때문일까.

 인생을 살아가면서 누구나 이런 저런 일을 많이 겪는다. 주로 사람과의 관계에 대한 기억이 대부분이다. 그 관계로 인해 때로는 상처를 받아 지울 수 없는 기억으로 남는다. 어떨 때는 ‘그 나쁜 사람을 만나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 나쁜 사람과 관계를 맺지 말았어야 했는데….’라는 아픈 추억을 되새기기도 한다.

 그런데 인간관계에서 나쁜 관계만 있을까. 분명 그렇지 않다. 좋은 관계와 좋은 일도 많았을 것이다. 역으로 나쁜 기억은 가급적 떠올리지 말고, 그 좋은 기억을 오래도록 간직하는 방법이 없을까.

 트라우마(Trauma)라는 개념이 있다. 의학용어로는 외상(外傷)을 말하지만 심리학에서는 정신적 외상, 영구적 정신 충격을 가리킨다. 나쁜 기억은 대개 트라우마와 연결된다. 트라우마는 선명한 시각적 이미지를 동반한다. 이 이미지는 장기 기억과 유사하다.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례로 사고로 인한 외상이나 정신적인 충격 때문에 사고 당시와 비슷한 상황이 됐을 때 불안해지는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트라우마는 정신적으로 증세가 심한 경우에 해당되지만, 우리 일상생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나쁜 기억은 트라우마로 가기 전 단계로 볼 수 있다.

 좋은 기억보다 나쁜 기억이 오래도록 머릿속에 남는 건 감정상태와 매우 밀접한 관련을 가지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 뇌 중심부에 있는 편도체는 기억을 감정과 묶어서 저장하는 특징적인 기능을 한다. 즉, 감정굴곡이 심할수록, 감정으로 상처를 많이 받았을수록 그 감정을 불러일으킨 기억을 이미지와 함께 잘 저장한다. 트라우마도 이 편도체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런데 이 편도체는 좋은 기억보다는 불쾌하거나 나쁜 기억에 더욱 더 자극적인 반응을 한다. 따라서 좋은 기억보다는 나쁜 기억을 훨씬 많이, 잘 저장하게 된다. 따라서 별로 좋지 않은 경험을 했을 때는 빨리 없애거나 좋은 기억으로 대체하는 게 상책이다. 주변에 그 감정상태를 알려 그 감정을 완화시키거나, 나쁜 감정을 좋은 감정으로 전환시키는 마음자세가 중요하다. 하지만 보통 사람에게는 쉽지 않다. 조금 심해지면 정신과에 가서 심리상담을 받아야 하는 지경까지 이르게 된다.

 더 큰 문제는 나쁜 기억을 제때 해결하지 않으면 수시로 반복적으로 상기되어 기억에 남는다는 것이다. 일종의 기억의 반복학습이다. 나쁜 기억이 잘 지워지지 않는 결정적인 이유다. 좋은 기억은 반복학습이 안 되는데, 나쁜 기억은 쉽게 반복학습이 된다. 이는 의학적으로도 아직 완전히 규명되지 않은 상태다. 그 반복학습으로 인해 나쁜 감정은 더욱 기억에 새겨질 정도로 각인된다. 결국 돌이킬 수 없는 상태에 도달한다. 정신 심리치료로도 회복할 수 없는 지경이 되면 트라우마에 이어 정신병자의 수준까지 이르게 된다. 특히 남자들은 자존심 때문에 본인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경우가 많아 순간적으로 폭발하는 때가 자주 있다. 남성들도 말을 많이 하는 것이 해결의 한 방법이 되는데, 여성과 같이 평소에 수다를 많이 하면 어느 정도 해결될 수 있다. 또한 말이 없는 사람이 감정을 표현할 때 술을 마셔 격해지거나 눈물을 쏟는 건 감정의 카타르시스일 수 있다. 하지만 예기치 못한 사고가 발생할 수도 있다. 술을 마시고 감정이 격해진 상태에서는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종교를 가지는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도 나쁜 기억을 좋은 기억으로 되돌리는 방법을 배우기 위함이다.

 인간은 모두 다르다. 다 나 같지 않다. ‘나 같으면 그 상황에서 이렇게 할 텐데, 그 사람은 왜 그렇게 해서 나에게 상처를 주나.’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한 번 역으로 생각해보자. 그 사람이 그런 행동을 했기 때문에 나에게 지금 마음을 되돌리는 공부의 계기를 제공해줬고, 내 마음을 돌아보는 기회를 가지게 해줬다고 생각하면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가. 그리고 ‘그 사람의 상황에서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를 생각하다보면 사고의 폭도 넓어지는 기회가 될 것이다. 그러면 그 사람의 약점까지 파악할 수 있게 되고, 내 약점도 ‘이런 게 있을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에까지 이르게 된다. 이만한 반면교사(反面敎師)가 또 어디 있겠나.
원망생활을 감사생활로 돌릴 수 있는 생각을 하게하고, 역지사지(易地思之)로 사고하는 계기를 줬다고 생각하면 매우 훌륭한 기회를 제공한 것이다.

 나쁜 기억을 좋은 기억으로 되돌리기 위한 또 하나의 방법은 좋은 말을 자주하고, 좋은 기억을 자주 떠올리는 것이다. 옛날에 술을 한창 마실 때를 상기해 보면, 술을 마시면 말부터 험하게 나왔던 기억이 뚜렷하다. 그 험한 말은 한 번 시작하면 제동이 걸리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정도 조절이 가능해진 요즘, 험한 말을 할라치면 뇌에서부터 제동을 거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그럴 때마다 ‘아, 이제 정제가 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만나는 사람들도 “요즘 얼굴 좋아졌다.”고들 한다. 좋은 생각, 좋은 말, 좋은 기억을 많이 떠올리고 많이 웃으면 뇌, 아니 몸 전체가 좋아진다는 사실을 절실히 느끼고 있다.

 원불교인들은 정말 훌륭한 수행법인 일상수행의 요법을 가지고 살아간다. 경계가 오면 그 경계를 알아채고, 정·혜·계를 세워 원망생활을 감사생활로 돌리며 살아간다. 그러면 나쁜 기억은 쉽게 잊혀지고, 좋은 기억이 오래도록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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