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공주의 기도문과 <옥추경>

글. 이정재

 <옥추경>의 한글 번역은 선천적 주술의 전통을 새로이 바꾼 것이었다.
앞서 살폈듯이 <조선불교혁신론>에서 일찍이 이를 천명한 바와 같다. 기도의 힘은 마술적 문자나 어떤 신비한 힘에 있는 것이 아니라 독경자 자신의 일심정성 여부에 있다는 점을 강조한 의미가 있다. <일원상서원문> 독경의 전통은 <옥추경> 독경의 전통에서 온 것이고, 이것은 반도의 민중에게 오래도록 전래되던 전통에서 유래한 것이었다. 옥추경의 한글화는 독경 자체를 부정한 것이 아니고 그 형식을 새로이 계승한 것이었다. 그 증거의 일단을 살펴보자.

 이공주가 아직 경성에서 공부할 때 소태산이 단체 기도를 할 것을 권한다. 이때 이공주에게 준 기도문은 다음과 같다.
靈寶局 萬物建判養成所 中央敎主 李共珠(영보국 만물건판양성소 중앙교주 이공주)
甲子乙丑丙寅丁卯戊辰己巳…癸亥(甲子全文) 定天奉命(갑자을축병인정묘무진기사 … 계해(갑자전문) 정천봉명)
 祈願文(기원문)
第一章(제일장)
天尊(천존)이 말씀하시되 이 경 있는 곳에 마땅히 천지, 사명으로 하여금 처소를 따라 수호케 하고 뇌부가 按察(안찰)하기로 다 달라서 때로서 상고하여 살피나니라. 만일 사람의 집에 이 경이 있어 지성(至誠)으로 봉안(奉安)하면 곧 상서기운이 뜰에 가득하고 경사구름이 집머리에 그늘하여 화패(禍敗)의 난(亂)이 맹동(萌動)치 못하고 고 길(吉)한 복(福)이 모아들며 죽음을 당하여도 지옥에 들지 아니하나니 어찌 써 지옥에 가지 아니하니뇨. 죽으면 곧 생할 것이요 생하면 다시 선도에 돌아오고 선도에 돌아오면 지존을 받아 영통을 얻고 영통을 얻으면 출입기거할 때에 항상 이 경을 가질 것이니 모든 사람의 흠앙하는 바요 귀신의 두려워하는 바이라, 모든 험난함을 만난다 하여도 일심으로 천존의 이름을 일컬으면 구천응원뇌성보화천존이 다 해탈을 얻게 하리라. 이에 뇌사호옹이 대답하사 천존 전에 글 귀(句)를 설하여 가로되 위 없는 옥청왕이 삼십육천을 거느리사 구천(九天) 널리 화(化)한 인군으로 얼굴을 십방(十方)에 화(化)하시나니라. 털을 헤치고 기린(麒麟)을 타시며 붉은 다리로 층층(層層)한 빙(氷)을 밟으시고 손으로 구천기운을 잡으사 풍(風)을 휘파람하고 우뇌를 채찍질 하나니라. 능히 지혜력으로 모든 마공(魔公)의 정신을 항복 받으시고 장야(長夜)에 귀령(鬼靈)을 제도하사 중생을 이익케 하시나니라. 은하수 물결에 일천 눈과 일천 달수레비퀴와 같으시니라. 미래세상을 맹세하여 길이 천존의 교화를 포양(布揚)하리라. 때에 뇌사호옹이 게(揭)를 설하여 마치니라.(기원문 제2장부터 제4장까지는 생략)
(청하문총간행회 편, <구타원대봉도 일대기, 한마음 한길로>, 원불교출판사, 1984.)

 책에서는 독송을 했던 내용 중 2~4장까지는 내용을 생략하였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인지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위의 기원문은 <옥추경>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필자가 확인한 바 2~4장까지는 <옥추경>의 보응장, 지심귀명례, 보게장 등에 해당하는 것이다.

 원문을 굳이 장황하게 옮겨놓은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이것이 <옥추경>의 한글본이란 점을 확인하고, 기도문의 분위기를 감지하기 위해서다. 그리고 이 한글본은 앞서 살폈던 불법연구회 소장본 <5>의 <옥추보경주해(玉樞寶經註解)>(표제 <옥추보경(玉樞寶經)>) 내용과 정확히 일치하고 있다. 당시 조선에는 옥추경의 번역본이 없었고, 있었다고 해도 이공주 기도문의 내용과 다른 번역을 하고 있다. 이공주가 소태산으로부터 받은 기도문은 번역이 마무리된 옥추경 한글본이고, 이것은 앞선 호에서 살펴본 불법연구회 소장본이었다.

 위 이공주 경문의 내용은 추후에 자세히 살펴보겠으나 주로 ‘천존’ 즉 ‘구천응원뇌성보화천존’에게 귀의하고 영통을 얻어 일상사에 혜와 복을 간절하게 빈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경성에서 이루어진 여성 기도회는 좌초되고 만다. 이공주의 기록을 그대로 옮겨본다.
대종사님의 하명에 의하여 4, 5인의 여자 회원들이 원기 13년(무진) 4월 그믐날 밤 10시부터 11시까지 기도식을 봉행하였던 바 혹은 잠이 오는 회원도 있고 혹은 사념이 나는 회원도 있는 등 각자 기도인들의 마음이 온전치가 못하여 대종사님께 사실대로 말씀을 드리니 ‘그러면 기도를 중지하라’고 하시었다. (<구타원대봉도 일대기, 한마음 한길로>)

 위의 기록은 이공주가 기도문을 꼼꼼히 보관하고 있다가 집필 시 꺼내 사용한 것으로 그 전후 상황을 기억해내 설명한 것으로 보인다. 즉 암기한 것을 풀어낸 것이 아니다. 이 기도문을 소개하면서 이공주가 그 앞에 적은 내용이 우리를 놀랍게 한다.

 원기 13년(戊辰) 4월 15일 경에 대종사님께서는 이공주 선생과 4, 5인의 여자 회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여자 중에서도 초창기 구인 기도시와 같이 기도를 드려 보면 어떻겠느냐?’ 하시었다. 이에 여자 회원들이 ‘지시해 주시면 그대로 거행하여 보겠습니다.’ 하고 말씀을 드리니, 대종사님께서는 ‘기도일은 戊辰(무진) 사월 그믐날로 기도시간은 밤 10시부터 11시까지의 1시간 동안을 하되 심신을 재계하고 가장 조용한 곳을 택하여 기도상 위에 청수와 향수를 밝힌 후 지정된 주문을 일심으로 독송하되 중앙단원의 주문과 그의 팔방단원의 주문은 각각 다르느니라.’(청하문총간행회 편, <구타원대봉도 일대기, 한마음 한길로>, 원불교출판사, 1984.)

 여기 각 단원에 정해준 주문은 앞서 인용한 옥추경의 일부가 될 것이다. 여기서 이공주는 ‘기도문’이 아닌 ‘주문’으로 표기한 것은 독경신앙과 관련하여 주목할 만한 부분이다.

 원기 13년 무진년은 1928년이다. 4월 15일 경은 소태산이 경성을 여섯 번째 방문한 시점이다. 이때는 소태산이 봉래정사에서 하산하여 1924년 최초 상경한 이래 만 4년이 흐른 뒤로, 어느 정도의 제자들이 형성된 시기다. 이렇게 보면 만 4년이란 짧은 시기에 경성 방문의 횟수가 빈번했던 것은 그만큼 경성을 중요하게 여겼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원기 13년은 이공주가 아직 총부로 가기 전이다. 중간에 총부를 방문하기는 하였으나 기도를 할 정도로 장기간 머물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이 기도식은 경성에서 이루어진 것이고 장소는 창신동 경성출장소였을 가능성이 크다. 창신동 출장소 부근은 지금이야 주변에 온통 건물로 차있지만 당시는 이곳이 별장이었다고 하니 출장소 근처에 풍광도 좋고 공간적 여유도 풍성했으리라 추정된다. 밤시간 고요하고 호젓한 숲속에서 일심을 모아 기도를 드리기는 적소였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4월 15일 시기는 기도하기에 좋은 날씨였을 것이다. 이 시기는 공교롭게도 이로부터 약 10여 년 전에 영산에서 구인제자와 했던 구인기도의 계절과 일치한다. 기도시간은 밤 10~11시로 영산과는 달리 한 시간 뒤로 설정하였다. 시골과 서울의 차이, 구성원들의 업무 차이 등이 고려된 것이리라. 그러나 기도 시간은 1시간으로 같았다. 이공주의 기록은 기도의 형식과 절차도 상세하게 적고있다. 즉 향과 촛불 및 정화수를 진설하고 헌배를 하고 주어진 주문을 외는 것으로 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그 주문은 중앙과 팔방단원이 서로 다르다고 했다.

 상기의 이공주의 기록은 사뭇 충격적이다.

 경성에서 실시한 여성 대상 기도식이 영산의 구인기도식을 모방한 것이란 점이 우선 그렇다. 그런데 이때 옥추경을 기도문으로 채택하여 사용한 점은 의외의 사실이다. 더구나 경문을 방위에 따라 직접 소태산이 지정해주었다는 점은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 것인지. 모방을 하였다면 길룡리 구인기도 시에도 소태산은 옥추경을 기도문으로 채택하였다는 것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원불교의 특징을 가장 잘 드러내고 법계의 인증을 받은 백지혈인이 옥추경 주문을 사용하였다는 점이 되는데, 그 시사하는 바는 새로움을 넘어 놀라움을 금치 못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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