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어린학교 김민해 목사

히말라야를 걷는 것처럼 달라이라마 같이

대담. 노태형 편집인
정리. 장지해 기자

그의 호칭은 목사도, 교장도, 선생님도 아닌 ‘두더지’다.
사랑어린학교에 온 직후 후배와 통화로 안부를 주고받던 그는 “형이 사는 건 참 두더지 같다.”는 말을 들었다. 당황할 찰나, 후배는 “두더지는 보이지 않지만 알고 보면 늘 일을 하고 있잖아요.”라고 했다. 일을 하되 보이지 않게 한다는 그 말이 가슴에 팍 와 닿았다는 그. “아저씨는 누구예요?”라고 묻는 아이들에게 자연스럽게 “나 두더지야.”라고 소개한 그가 바로 김민해 목사(사랑어린학교 교장)다.
삶의 고난함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신학공부를 시작했기에, 애초 ‘목사’가 그의 목표지는 아니었다. 그래서일까. 지금 그는 종교와 교육이 제도화된 틀을 넘어 존재할 수 있음을 실험해가고 있다. 실제로 그는 학교가 자리한 마을의 사찰 방 한 칸을 빌려 ‘예수실험교회’를 열고 예배를 본다. 목사이기보다는 스님의 모습에 더 닮아있고, 스님 같은 듯 목사인 그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 사랑어린학교는 어떤 곳인가요?
“시대정신을 잘 구현해보고 싶은 곳이에요. 원불교의 정신개벽이 시대적 화두를 던지는 것처럼, 우리도 우리 나름대로 시대의 요구와 안목을 갖고 교육을 펼쳐보고자 하는 거죠. 21세기에 태어난 아이들에게 조금 앞선 사람으로서 꼭 전해줘야 할 것 중에 하나가 ‘함께 어울려 놀 줄 아는’ 모습 같아요. 시대적으로 아주 중요한 문제라고 보는 거죠. 그래서 이 학교를 ‘함께 어울려 놀면서 크는 집’이라고도 해요. 또, 아이들이 각자 가진 자신만의 아름다움과 특성들을 잘 꽃 피워낼 수 있게 하고 싶어요. 그러한 교육을 이른바 가슴교육(Educating Heart)을 바탕으로 이뤄가고자 하는 거죠.”
개교한 지 15년이 된 사랑어린학교는 순천 지역 시민단체의 설립으로 시작되었지만, 이제는 초등 과정과 중등 과정을 포함한 1~9학년 과정의 학교와 마을 도서관, 그리고 평생교육을 하는 스콜레 등을 갖추고 독자적으로 운영되고 있다. 김 목사가 이곳에 온 지는 올해로 9년째. 그가 이곳에 온 이후 학교에는 여러 변화가 생겼다.

● ‘함께 어울려 놀면서 크는 집’이라는 말이 참 좋습니다.
“학생들은 현재 80여 명인데, 아이들의 아침 등굣길만 해도 여느 학교처럼 교문으로 곧장 들어오지 않고,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인근의 바닷가에서 모여 마을길을 따라 30~40분여를 걸어 등교해요. 하루의 첫 만남이 곧 첫 수업이 되는 거죠.” 어디 그뿐인가. 중등과정 7·8·9학년들은 기숙사 생활을 하는데, 이 기숙사가 또 특이하다. ‘마을이 학교다.’라는 생각으로 절을 비롯한 마을 여기저기에서 방을 내주어 아이들을 머물게 하는 것.

● 비 제도권 학교로서 고충도 많을 것 같은데요.
“우리가 자라던 시절만 해도 모두가 한길을 가야한다고 하는 분위기가 있었어요. 그런데 21세기에 태어난 아이들도 그래야 한다는 건 애초부터 불가능해요. 수업시간에 아이들에게 ‘너희들이 이 시기에 이 지구별에 온 이유가 뭘까?’라는 질문을 했더니 한 아이가 ‘새로운 변화와 삶을 실현하기 위해서 왔어요.’라는 대답을 하더라고요. 놀랍지 않나요?”
머리와 이성이 중심인 20세기 역사 속에서는 분쟁과 전쟁, 경쟁이 끊이지 않았고 그래야 생존할 수 있는 사회였지만, 21세기에는 어떻게 하면 용서와 사랑과 자비와 친절을 바탕에 두고 함께 사는 삶을 살아갈까를 고민해야 한다는 김 목사. 그런 점에서 원불교의 ‘정신개벽’이라는 예언은 인류에게 던지는 대단한 메시지라고도 덧붙인다.

● 목사의 길은 어떻게 걷게 되셨나요?
“20대에 삶에 대한 질문을 했어요. 예수님이 서른 즈음 우리에게 알려진 그런 생애를 살았다고 하니까, 나도 그쯤엔 그렇게 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 거죠. 그런데 오히려 점점 멀어지더라고요. 나름대로 교회도 열심히 다녀보고, 기도원에 들어가서 온갖 고뇌의 문제를 해결해보려고 했는데 잘 안됐어요. 직접 해보면 뭔가 알 것 같아서 서른이 넘어 신학을 시작한 거죠.”
신학공부를 하지만 목사는 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는 그. 하지만 신학공부를 마칠 때 즈음, 일용노동자들의 권익을 보호하는 역할로서 운동의 지평을 넓혀가자는 요청을 거부할 수 없어 목사가 되기로 마음을 먹었단다.
“그런데 안수를 받기 2~3일 전에서야 하늘로부터 소임을 받아서가 아니라, 일그러지고 구겨진 삶을 보상받고 싶어서 목사가 되려고 하는 거라는 걸 깨닫게 된 거예요. 참 곤혹스럽더라고요. 양심상 안수를 안 받았어야 하는데, 그러지를 못했어요.”
그래서일까. 목회생활 초반, 그에게는 양심을 속이고 목사의 탈을 쓰고 산다는 생각이 늘 짐처럼 따라다녔다. 돌이켜보면 스스로 기성교단(제도교회)에서 자꾸 벗어나고 싶은 몸부림을 쳐왔던 이유도 거기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 영산성지고에서의 근무이력도 있으시죠?
“90년대 중반이었을 거예요. 민주화운동을 하던 기독교 안의 사람들 대개가 교회로 돌아가는 과정에서, 저는 될 수 있으면 교회로 가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때 교육대학원 공부를 하면서 영산성지고에서 교생실습을 한 것이 인연이 되어 근무까지 하게 됐죠. 사실 영산에서의 기억 중 가장 큰 건, 시대의 스승을 뵙고 원불교를 만난 것이 제 인생에서 아주 놀랍고 귀한 시간이었다는 거예요.”
매일 새벽 대각지를 방문해 일원대도(一圓大道) 탑 앞에서 기도를 올렸다는 그. 그런 그에게 영산이 특별하게 와 닿은 이유는 다른 게 아니다.
“이른바 진리가 일상의 삶에서 누구라도 알아들을 수 있는 아주 쉬운 언어로 표현되어 있다는 것과, 내가 살아가는 시대, 그리고 가까운 곳에서 그러한 진리의 삶을 살고 전파하는 모습들을 본 거죠. 그때까지만 해도 저는 기독교 안에서 ‘깨달음’이나 ‘스승’이라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거든요. 스승의 존재나, 진리에 눈을 뜬다(깨달음)는 개념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갖도록 하나님이 인도한 것 같았어요.”

● 앞으로는 ‘내 종교’라는 울타리에 갇힐 필요가 없는 시대가 될 것 같아요.
“전라도 광주 무등산 자락에 있는 절에서 어느 목사님께 땅을 내주어 교회가 세워진 역사적 사실이 있어요. 옛날 어른들은 오히려 더 열려 있었던 것 같아요. 저도 지금 마을 절에서 방을 한 칸 내줘 매주 일요일에 그곳에서 예배를 보고 있는데, 이러한 움직임과 흐름을 앞으로는 아마 막을 수 없을 거예요. 종교가 종교를 위해서 존재하는 건 아니잖아요. 스스로 쳐놓은 종교라는 울타리를 벗어나 삶의 근본적인 문제, 삶의 원형에 대한 고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기독교, 천주교, 불교, 원불교라는 이름을 넘어선, 이름 속의 종교가 아닌 본래의 종교를 찾아보기 위해 실험을 해보고 있는 거죠. 그래서 교회 이름도 ‘예수실험교회’라고 지었어요.”

● 미래 종교는 어떤 모습일까요?
“제가 살고 싶은 모습을 어떤 모델로 말하라고 하면, 사실 예수나 붓다는 너무 멀어요. 그런 면에서 원불교는 상당히 복된 곳이라고 생각하죠. 최근 몇 달 사이에 히말라야를 두 번 다녀왔는데, 그곳에서 광활한 자연 원형과 달라이라마를 만난 것이, 저에게는 하늘의 메시지가 있다고 생각해요. 그걸 어떻게 내 삶으로 가져올 것인가가 숙제죠. ‘히말라야를 걷는 것처럼, 달라이라마 같이’. 그게 제 화두와 기도예요. 히말라야는 자칫하면 죽을 수도 있는 위험한 곳이어서 조심조심 한 걸음씩 걸어야 해요. 그렇게 살아가면 될 것 같아요. 또 달라이라마의 ‘친절이 나의 종교다.’라는 말도 엄청난 메시지죠. 그 삶이 곧 경전이고 길이라고 봅니다. 함부로 길을 갈 순 없어요. 지나침도 문제를 일으키는 법이죠.”

● 또 새로운 삶을 꿈꾸고 계시나요?
“옛날에는 일정 기간이 되면 이곳을 떠나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작년부터는 ‘떠나라고 할 때까진 안 가야겠다.’고 마음먹었어요. 생각을 바꾼건 70살 넘은 할아버지 선생님 덕분이에요.”
아이들이 할아버지를 자신들의 고향처럼 생각하면서 해결해야 하는 일이 생길 때 가장 먼저 달려가는 대상으로 삼는 것을 보며, 단순히 자리를 피하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 현장 속에서 할 수 있는 ‘존재의 역할’을 해내는 것이 진정한 아름다움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는 것.

● 삶의 이정표로 삼고 있는 말씀이 있다면요?
“‘깨어 기도하는 사람, 그런 삶’ 그게 저에게는 요체예요. 저는 예수라는 인물이 요즘에서야 가깝게 느껴져요. 그전에는 부처나 소태산의 삶을 통해서 예수를 봤거든요. 좀 미안하고 부끄럽기도 했죠. 지금 ‘예수실험교회’라고 할 때의 그 예수는 제도종교에서 이야기하는 이천 년 전의 어떤 특정 인물로서의 예수가 아니에요. ‘깨어있음’을 통해 이제야 살아있는 예수를 만나가고 있는 거죠. 교무님은 살아있는 소태산을 늘 만나고 있나요?”

● 은혜롭고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비결을 알려주세요.
“자기 삶을, 자기 빛깔을 잘 구현하면서 살면 좋겠어요. 많은 사람들이 내가 아닌 삶을 주로 살잖아요. 누가 규정해주거나 부모가 원하는 삶, 사회에서 정한 어떤 틀에 맞춰가려는 시대는 이제 지나갔어요. 그러기에 종교의 역할이 더 크겠죠. 저부터 그런 삶을 살기를 희망해요. 저의 기도 속에 저와 가까운 사람들은 물론이고 온 인류가 그런 길을 갔으면 좋겠다는 염원을 담고 있습니다.”

저작권자 © 월간원광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