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당하면 바보인 듯 삼가 행하라

글. 김광원

 얼마 전 나는 늦게야 숙제 하나를 해결했다. 그건 화분의 분갈이다. 겨우 자라고 있는 몇 개의 난 화분을 엎어서 제대로 정리해 주는 건 문제가 아닌데, 내가 평소 느끼고 있던 숙제는 따로 있었다. 그것은 키가 높은 화분 안에서 엄청 잘 자라고 옆으로 꽉 들어차게 번진 ‘긴기아난’이었다. 5년 전쯤 옮겨 심은 화분인데, 이 난의 향기는 올봄에도 나에게 한동안 깊은 향수를 느끼게 하였다.

 제법 큰 화분 벽에 꼭 달라붙어 잘 떨어지지 않는 난을 이리저리 칼로 질러대며 겨우 떼어내고 쏟아낼 수 있었는데 뿌리가 한참 밑에까지 뻗어 있고, 옆으로는 하얀 뿌리가 터질듯이 들어차 있었다. 가끔씩 잊지 않고 물만 주었을 뿐인데 안 보이는 속에서도 이토록 왕성하게 잘 자라고 있었구나. 긴 뿌리를 적당히 잘라내고 난을 나누고 손질하여 두 개의 화분에 나누어 놓으니 내 마음이 한가하고 편해지는 느낌을 받는다.

 뿌리를 자르고 난을 나누면서 내 마음에 스치는 게 있었다. 하루하루 보이지 않게 조금씩 자라온 뿌리들처럼 나 자신도 모르게 내 속을 꽉 채우는 것들이 얼마나 많을 것인가. 내 영혼을 점유하고 있는 평생의 습관과 무수한 선입견들. 알고 보면 그런 것들로 내 속은 가득 차 있을 것이다. 자기 삶의 공간 속에서 스스로를 성찰하며 적정하게 팔다리를 가누고 살아가는 게 사실 쉬운 일이 아님을 이제는 좀 알 것 같다.

 요즘 미국 대통령 트럼프의 말과 행동들이 언론에 참 많이도 회자된다. 트럼프는 지난 6월 1일, 2015년 12월 12일 195개국이 합의한 ‘기후변화파리협정’에서 탈퇴하겠다고 공식 선언했다. 미국은 전 세계 온실가스 배출량의 약 16%를 배출하고 있고, 중국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탄소를 배출하는 나라이다. 그런 미국의 대통령 트럼프가 파리협정에서 탈퇴하면서 “나는 파리가 아니라 피츠버그 시민을 대표하기 위해 선출됐다.”라고 말하였으니 참 황당한 발언을 한 것이다.

 정작 미국의 빌 퍼듀토 피츠버그 시장은 트럼프의 탈퇴 선언에 반발하며 “전 세계와 함께 파리협정을 따를 것”이라고 말하고 있으니, 트럼프는 국제적인 조롱거리로 전락되는 분위기다. 존 케리 전 미국 국무장관도 트럼프를 향하여 “트럼프의 파리협정 탈퇴는 공직생활 평생 본 것 중 가장 부정적이고, 멍청하고, 위험하고, 자기 파괴적인 조치”라고 비판하였다.

 트럼프의 이런 불균형적인 말과 행동이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거침없이 나오는 이유는 어디에 연유하는 것일까. 이는 아마 분갈이 직전의 화분같이 자기 자신의 생각으로 온통 꽉 들어차 있어서 자기 삶의 균형감각을 상실한 때문이 아닐까 여겨진다. 평생 걸릴 게 없이 잘 나가는 성공적인 삶을 살아왔다고 자부하며 자신만의 오만한 사고방식에 젖어버린 것이다. 자국의 이익만을 중시한 트럼프의 정책 결정 탓으로 미국은 국제 질서를 주도하던 위치에서 한순간에 세계의 불량국가로 전락하게 된 것이다. 며칠 전 보았던 대종경 인도품 34장 말씀이 떠오른다. 

 대종사 신년을 당하여 말씀하시기를 “내가 오늘 여러 사람에게 세배를 받았으니 세속 사람들 같으면 음식이나 물건으로 답례를 하겠으나, 나는 돌아오는 난세를 무사히 살아갈 비결 하나를 일러 줄 터인즉 보감을 삼으라.” 하시고 선현의 시 한 편을 써 주시니 곧 “처세에는 유한 것이 제일 귀하고(處世柔爲貴) 강강함은 재앙의 근본이니라(剛强是禍基). 말하기는 어눌한 듯 조심히 하고(發言常欲訥) 일 당하면 바보인 듯 삼가 행하라(臨事當如痴). 급할수록 그 마음을 더욱 늦추고(急地尙思緩) 편안할 때 위태할 것 잊지 말아라(安時不忘危). 일생을 이 글대로 살아간다면(一生從此計) 그 사람이 참으로 대장부니라(眞個好男兒).” 한 글이요, 그 글 끝에 한 귀를 더 쓰시니 “이대로 행하는 이는 늘 안락하리라(右知而行之者常安樂).” 하시니라.
 
 참 보배로운 말씀이다. 물질이 팽창하는 21세기의 난세에 살면서 대종사님의 이 말씀은 더욱 귀하게 마음을 울려온다. 말도 어눌히 하고 바보처럼 살아야 대장부가 될 수 있다니 대종사님께서는 참 역설적인 말씀을 주신 것이다. 물론 자신을 높이지 말고 낮추라는 뜻이요, 자신의 마음을 꽉 채우지 말고 넉넉하게 비워두고 살라는 뜻일 터이다.
엊그제 넘치는 것들을 털어버리고 분갈이를 한 ‘긴기아난’은 다시 몇 년 동안은 편안하게 뿌리 내리며 살아가게 될 것이다. 평소 없는 듯이 조용히 있으면서도 주인이 때를 놓치지 않고 어쩌다 한 번씩 물만 준다면, 이 화분은 지상의 가장 아름다운 향기를 해마다 집안 가득 뿜어낼 것이다. 한 달 가까이 봄날의 축제를 만들어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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