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놀래기는 성룡(成龍)할까

힘센 자의 언저리서 눈치 보며 살아갈 궁리만 찾아선 백년하청이다.

글. 여도언

 우리는 오늘보다 내일이 조금은 더 발전되는 꿈을 꾼다. 이 같은 꿈은 사람만 아니라 일체생령 모두가 가지고 있다. 중생은 부처 되려 하고, 물고기는 용이 되고 싶어 한다. 하늘과 땅의 은택으로 살아가는 생명은 희망이라는 기(氣)로 둘러싸여 있다. 천지는 만물을 살리는 선한 존재이지, 결코 해코지하거나 멸하려는 악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생명은 그래서 희망을 담보한다. 인간·동물·식물은 천지의 지극한 보살핌이 있음을 알기에 미래를 믿고 후손을 낳아 기른다. 다음 세대엔 더 나은 삶이 보장될 것으로 믿기 때문이다.

  생명은 희망이 있어 거룩하고 아름답다. 모든 생명은 똑같은 무게의 희망을 안고 산다. 미래에 대한 기대는 사람, 고슴도치, 소나무, 들국화 사이에 차이가 없다. 천지는 태생(胎生)이라 해서 난생 습생 화생보다 더 높고 큰 희망을 안겨주지 않는다. 맹꽁이에겐 맹꽁이에게 맞게, 뜸부기에겐 뜸부기에게 어울리게 삶의 터를 제공한다. 비록 운명의 사닥다리에 놓인 위치는 다를지라도 변화에 대한 희망의 크기는 만물이 똑같다. 희망은 만물에게 공평히 선물된다. 따스한 햇살과 차가운 싸락눈이 꽃밭엔 많이 내리고 뒷간지붕이라고 적게 내리는 경우가 없다. 신분과 처지를 호리도 따지지 않는다. 자연의 시혜에 차별이란 없다. 변화에 대한 기회만 살리면 누에가 비단이 되고, 애벌레가 나비가 된다. 기회를 살리는 게 열쇠다.

  미래에 용(龍)이 되려는 물고기는 어떤 종일까. 덩치 큰 고래일까. 왜소한 피라미일까. 아니면 적당한 크기의 고등어일까. 성스런 모양을 갖춘 불가사리는 어떨까. 공중비행을 도저히 못할 것 같은 멍게와 세발낙지는 애당초부터 포기해야 하나. 천지는 기회 부여에 차별을 두지 않으니 신체로 인한 불리를 염려하지 않아도 좋을 것이다.

  청소놀래기란 물고기가 있다. 곰치나 상어의 이빨과 아가미에 낀 찌꺼기와 기생충을 청소하고 이를 먹잇감으로 챙겨 살아가는 물고기다. 작지만 몸치장이 눈에 띄게 화려하다. 입 큰 덩치물고기들에게 먹잇감이 되지 않으려는 제 나름의 생존 전략이다. 우람한 덩치들이 다가오면 “난 당신 편이니 삼키지 마세요.” 하며 호소하듯 쉼 없이 꼬리를 흔들어댄다. 대어들의 입과 몸을 깨끗하고 시원하게 처리해주면서도 불시에 죽임을 당할 수 있는 위험을 달고 산다.

  그런데 청소놀래기는 대어와 맞서 보려고 이빨을 갈아본 적이 없다. 형제들과 합력하는 방안도 생각하지 않는다. 대어 앞에서 눈치 보고 꼬리 흔드는 습(習)을 놓지 못한다. 곰치나 상어의 눈칫밥이나 보고 살아가는 녀석이 용이 되기란 불가능하지 않나 싶다.

  용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지금의 나를 변혁해야 한다. 내일은 더 나아질 수 있다는 희망을 실현할 수고가 무엇보다 필요하다. 힘센 자의 언저리서 눈치 보며 살아갈 궁리만 찾아선 백년하청이다. 자존과 기백을 잃고 눈치 보며 사는 삶이 습이 되면 상대와 어깨를 같이 할 날을 얻기는 불가능하다. 자력을 기르지 못한 처지에서는 눈치 빠른 이웃들의 도움을 얻기도 쉽지 않다. 이래선 대어의 무상시 공격을 막아내기는 힘들다.

  내일의 변화를 이끌어내려면 각고의 긴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 한 사람이 변하는 데는 그의 물리(文理)만 터지면 되지만, 나라의 변화는 국민 전체의 지혜가 발하고 드러나야 한다. 한 나라가 ‘어변성룡’ 했다는 외침이 이웃 국가에서 터져 나오게 하려면 자강이 무엇보다 절실하다.

저작권자 © 월간원광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