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옥추경>을 한글로 번역했나?

글. 이정재

 소태산이 어떤 정황에서 <옥추경>을 참고했는지를 살피기 위해서는 불법연구회 소장본을 세밀히 살펴야 한다. 다행히 연구회는 이에 해당되는 자료를 온전히 보관하여 전해 주고 있어 큰 도움이 된다. 이 소장 자료는 옥추경 참고의 전후 사정을 이해하는데 신뢰할 만한 자료적 가치를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앞선 호에서 살핀 결과 그 대강의 특징을 보면 다음의 몇 가지로 정리된다.

1. 전하는 옥추경은 여러 권으로 전해진다.
2. 한문본에서 한글화로 진화한 과정이 있었다.
3. 음부경은 옥추경과 합철의 형태로 존재한다.

 원불교교사에 보면 <음부경>과 <옥추경> 두 가지가 소태산이 참고한 도가계 경전이다. 그런데 음부경에 대한 연구와 평가는 그나마 사상적 상관성에서 이루어진 바 있었지만, 옥추경의 경우는 그렇지 못했었다. 불법연구회 소장본을 검토하면 옥추경을 음부경보다 더 중요시했거나, 적어도 더 많이 활용했다는 정황을 확인할 수 있는데도 말이다.

 앞선 호에서 보았듯이 <옥추경>과 <음부경>의 합철본 4가 연구회 소장 유일한 음부경본이다. 음부경만을 전하는 독본은 존재하지 않는다. 반면에 옥추경의 경우는 전혀 다른 양상이다. 독본만으로도 여섯 권에 이르고 종류도 다양했다.

 합철본 4를 펼쳐보면 음부경이 옥추보다 앞에 위치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본래 이 경이 중요했다는 점을 반영한 배열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불법연구회의 자료는 반대의 정황을 보여준다. 합철본이었던 한문 원본(옥추보경(玉樞寶經, 합철(合綴): 음부경해(陰符經解))에서 순 한글본 <옥추보경주해(玉樞寶經註解)>로 전개되었던 진화는 앞서 보았듯이 일목요연한 순서를 밟았고, 그 과정이 모두 남겨져 전해지고 있다. 옥추경 가치의 재평가가 요구되는 요소다.

 불법연구회 시기에 옥추경 이본이 많아진 것은 한글 번역으로의 과정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결국 한글로의 번역이 쟁점이었다. 그런 과정이 필요했던 이유는 어디에 있었던 것인가.

 소태산 자신은 옥추경을 한문 원문으로 읽는데 아무 불편이 없었을 것이다. 그의 제자들도 모두 이 정도의 원문을 읽고 해석하는 데는 큰 어려움이 없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뒤에 합류하게 되는 여성 제자들의 경우에는 상황이 다를 수 있다. 추정컨대 한글본이 필요했던 이유는 여기에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 경우도 생각할 점이 있다.

 여성제자들이 모여든 시기는 대각 후 수년이 지난 다음의 일이다. 그럼 이 시기에도 옥추경을 활용하였던가 하는 점과 어떤 용도로 사용하였던가 하는 점이 야기된다. 이는 당시 이미 제정된 교서의 편찬 및 그 활용과 배치의 시기 때문이다(<수양연구요론>, <보경육대요령>, <보경삼대요령> 등). 또 소태산 대각 후 참고로 잠시 읽어봤다는 교사의 기록과도 배치되는 내용이다. 대각 후 십수 년이 지난 다음에 여성만을 위해 한글화를 했던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이런 것이 아니라면 초기 구인제자들과의 상관성을 생각해볼 수 있다. 이들은 충분한 한문 습득력이 있었기 때문에 굳이 번역이 불필요했을 것이다. 혹시 제자 중 실력이 미진한 사람이 있었다고 해도 교육을 통해 충분히 해독할 수 있는 정도의 기본 실력은 갖추고 있었을 터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대해서 알 수 있는 기록이 없어 추정하여 밝히는 도리밖에 없으나, 확실한 것은 옥추경이 참고한 정도의 경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충분히 활용을 하였고, 또 소태산에게만 한정된 것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일관된 한글본으로의 작업 과정은 소태산 자신은 물론 구인제자를 위한 독해용은 아니었다. 이후 여성 제자들에게로 이어질 가능성은 있겠으나 시간적 간격차이가 문제다. 이 즈음에 살펴볼 자료가 하나있다. 소태산이 지은 <조선불교혁신론>의 4장 ‘외방의 불교를 조선의 불교로’에 이런 구절이 눈에 띈다.

 “조선 사람이 일반적으로 배우기도 어렵고 알기도 어려운 한문으로써 경전이 대개 되야잇는 고로 그 경전을 조선 사회에 내여놓고 유무식 남녀노소를 망라하야 가르쳐주기가 어려울 것이니 우리는 인도불교에도 끌리지 말고 중국불교에도 끌리지  말고 조선 재래불교에도 끌리지 말고 … 조선 명사와 숙어와 조선 문자에 혹 한문을 가하야 교리와 제도를 정선하여 일로써 초등 교과서를 정하고….”

 <조선불교혁신론>은 1935년에 출간되지만 1920년대부터 초안하였다 하니, 소태산은 한문 경전의 한글화에 대한 생각은 일찍부터 해왔음을 알 수 있다. 옥추경의 한글화를 추진하였던 바는 이와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한글화가 하필 옥추경인가 하는 점은 설명이 안 된다.

 앞서 언급했듯이 옥추경의 조선 후기 활용전통이 그것이다.  이 부분도 그 정황을 포괄적으로 살핀 연후 설명해야 하지만 대개 옥추경은 독경 용도로 쓰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독경은 도를 이루는 염원으로부터 소소한 일상적인 일의 해결까지 두루 해당되던 식자층 필수서였다. 특히 옥추는 귀신을 녹이는 경으로 유명하여 구한말기 국혼상실기 민중들이 크게 의지하였던 경이었다. 아울러 일체의 부정적인 것을 제거하고 초복의 영험함을 실현하는 민간신앙계의 대표 경이었던 것이다. 물론 그 신앙적 대상은 도교의 신관과 관련이 있는 ‘옥황상제’ 혹은 ‘구천응원뢰성보화천존’이 그것이다.

 이런 조선 전통의 연장선에 신종교가 위치해 있었고 정역 대종교 동학 등을 거쳐 증산대에 적극 활용하였고 이어서 소태산도 이를 응용하였던 것이다. 둘 간에 보여지는 차이는 당장 한글화라는 것이고, 그에 따른 독경의 양상도 자연 달라졌을 것이나, 어떤 정황이었는지는 역시 후에 더 살펴야 할 부분이다. 불법연구회의 옥추경이 독경용이었을 것이란 점은 불법연구회 소장 자료가 두루 보여주는 내용이다. 음부경과 합철되었던 곳에서 옥추경만을 따로 떼어냈고 이어 한문을 빼내고 결국 순한글 옥추경을 만든 이유는 독경 전용으로 사용하기에 편한 편집 과정이었음에 틀림없다.

 그리고 5번 한글본의 경우 이미 주어졌던 장절의 구분이 재조정되어 있는 흔적이 보이는데, 이는 어느 한 사람을 위한 경책이 아니었던 것을 추정케 하는 대목이다. 즉 옥추경 독경은 개인뿐만 아니라 다수가 활용하였을 가능성이 추정된다 하겠다. ‘독경’의 전통은 오늘도 원불교의 중요 의식 중 하나이다. 이 전통은 전래 독경신앙의 연장선에 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 매개는 옥추경 독경신앙이 역할하였음을 알 수 있겠다.

 용어 ‘독경’이 나왔으니 법회나 의식때 들어가는 ‘반야바라밀다심경’에 대한 언급을 다시 하지 않을 수 없다. 앞서 보았듯이 어려운 한자를 피하고자 했던 소태산의 정신에 따르면 원문 독경은 수정되어야 한다. 번역본 독경으로 고쳐야 한다. 자고로 독경은 다분히 주술적인 기능을 강조하여 원문을 그대로 사용하는 것이 선천시대의 상례였다. 독경쟁이들이 원문을 외워 읽고, 스님들이 금강경 등의 장경을 원문 그대로 읽었던 것도 이런 전통에 의거한 것이다. 그러나 소태산은 이것을 바꿨다. 시대가 바뀌었기 때문이다. <원불교교전>의 불조요경을 보면 ‘반야심경’을 이미 번역해 놓았다. 그런데도 지금 우리는 그 본의를 간과한 채 퇴행적 주술문을 여전히 외고 있다.

 이를 만든 불교에서도 지금은 번역본으로 대체하고 있는 중이다(조계종 등). 소태산은 민간의 독경도 잘 활용하면 쓰임새가 있음을 먼저 보여주었다. 혁신불교 생활불교라 자칭하는 원불교는 뜻도 모르는 ‘밀다경’을 여전히 고집하고 있다. 언제까지 지속될지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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