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난히 추웠던 올봄

글. 박관태

 나에게 올해 4월은 뜻밖의 감사함을 느낀 시간이었다.
 지난 겨울까지 한 친구와 보낸 2년은 설렘, 질투, 집착, 사랑, 편안함과 같은 여러 감정을 느꼈던 시간들이었다. 그러다보니 결국 마지막엔 ‘이제는 쉬고 싶다.’ ‘서로에게 다른 전환점이 필요한 시기인 것 같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렇게 2년간의 만남은 단 10분도 안 되는 시간 사이에 끝이 났다. 이후에 찾아온 느낌은 공허함과 허무함 그 자체. 서로의 상황이 많이 다른데다 함께 고민한 헤어짐이라서 편하고 좋게 헤어졌지만, ‘무슨 일이든 시작과 끝은 항상 좋아야 된다.’는 말에 왜 이렇게 공감이 되지 않던지…. 외국에서는 이렇게 헤어지더라도 쿨하게, 인간관계만큼은 친구를 유지한다고 들었는데 한국의 통상적인 남녀 관계에서는 왜 이게 안 되는 걸까. 아니면 내가 그렇게 안 되게끔 관계를 만들어놨을 수도 있었다.

 여러 장소, 물건, 그리고 내 일상까지도 그 친구의 많은 것들로 물들여져 있었다. 정리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고, 그렇게 오랜만에 혼자만의 긴 시간을 보내며 무거운 마음을 다시 정리하는 시간을 가졌다. 많은 생각들로 잠을 설치기도 하고 말이다. ‘내가 도대체 왜 그랬을까.’라는 생각을 하며 후회 할수록 그 친구에 대한 원망보다는 결과에 대한 죄책감이 너무나 많이 들었다.

 이렇게 찾아온 봄은 너무나도 낯설었고 그렇게 기쁘지도 않았다. 오히려 좋아진 날씨만큼 좋았던 추억과 기억들이 많이 떠올랐다. 서로 헤어지자고 결정을 한 이유조차도 잊고, 오히려 감성에 깊게 묻혀가느라 마음이 너무나 무거웠다.

 봄이 오고, 문득 ‘헤어짐이라는 게 나만 겪는 과정이 아니고 다들 겪는 과정이니, 마음이 무겁고 힘들겠지만 생각을 달리해보자.’라고 생각했다. 이 친구도 나처럼 힘들었을 것이다. 모순적이지만, 각자의 이유로 서로의 앞날을 위해 배려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도리어 이 순간이 감사했다. 이 친구와 만나면서 다른 사람을 보는 시야도 넓어졌다. 앞으로 내가 다른 사람을 만나도, 결혼을 해서 가장이 되더라도 주어질 책임감에 대해 깊게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들이었다.

 면접에서나 자기소개서에 ‘나에게 의미 있었던 연애 2년’이라고 쓰긴 힘들겠지만, 그 시간은 정말 무엇과도 바꿀 수 없었던 경험이었다. 인생은 짧으니까, 좋고 깊은 경험을 통해서 사람은 더 많이 배워나가는 거니까. 나에게 힘들었던 올봄, 뜻밖의 감사함이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었던 시간이었지만 그동안 함께여서 너무 감사했어. 언젠간 서로 다시 연락이 닿을 땐 서로가 원했던 그런 목표와 상황들이 다가왔으면 좋겠어. 그리고 우선 행복했으면 좋겠다. 정말 고마웠어. 그리고 잊지 못할 거야, 2017년의 봄을.’

 

내가 만난 선생님들

글. 김은영

 태어나서 내가 처음 만난 선생님은 우리 부모님이다. 나에게 밥 먹는 법, 양치질하는 법, 옷 입는 법 등등 세상을 살아가기 위한 기초적인 것들을 가르쳐주었다. 물론 학교에 있는 선생님처럼 친절하거나 혹은 자상하지는 않았다. IMF를 겪느라 돈이 궁한 부모님은 늘 우울했다. 아빠는 집에서 자기에 바빴고, 엄마는 집안일하며 성질내기에 바빴다. 자기 스스로를 챙기기에 바쁜 미성숙한 그들이 내가 처음으로 만난 선생님들이었다.

 그 다음 선생님으로는 초등학교 선생님이다. 가장 기억에 남는 선생님은 6학년 담임 선생님, 은영. 12년이 지난 지금 선생님의 성은 기억나지 않는다. 뽀글뽀글한 머리에 하얀 얼굴, 부드러운 목소리를 가진 예쁜 은영 선생님은 전주도립국악원에서 단소를 배워 우리에게 가르쳐주었고, 상·벌점 제도로 아이들의 언행을 단속했다.

 내가 기억나는 한 장면이 있다. 친구들이 내 치부를 건드려서 나는 욕을 내뱉었다. 벌점을 받는 두려움보다 더한 화가 치밀어 올랐기 때문이다. 그때 은영 선생님은 내게 욕을 한 이유를 물어봐주었다. 내 잘못을 따지기 전, 내가 어떤 생각, 어떤 마음이었는지에 대해 관심을 가져준 선생님이었다. 

 그리고 중학교 때 수학 선생님, 박민영. 나는 수학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민영 선생님의 밝고 쾌활한 설명 덕분에 관심이 생겼다. 칠판에 하얀 분필로 공식을 적느라 손바닥이 하얗게 돼도 민영 선생님의 시선은 늘 우리를 향해 있었다. 학생 한 명 한 명의 눈을 맞추며 가르쳤고, 수업을 못 따라오는 학생이 있으면 옆에 가서 친절하게 설명해주기까지 했다. 나는 이 친절함을 잊지 못하고 졸업한 뒤 민영 선생님을 찾아갔다. 선생님은 그때에도 변함없는 미소와 쾌활한 목소리로 나를 반겨주었다.

 마지막으로 기억나는 선생님은 조미영. 그분은 내게 꿈을 찾게 해준 분이다. 고등학교 3학년이 된 나는 진로를 고민하고 있었다. 잘하는 게 없다고 생각한 나는 국문과를 가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나의 자기소개서를 본 미영 선생님은 문예창작학과를 추천했다. 나는 자기소개서에 강연 듣는 것을 좋아하고, 인디밴드 음악 듣기를 좋아하고, 청소년 문학을 좋아한다고 썼다. 미영 선생님은 그런 나를 알아봐준 것이다. 그 덕에 지금 나는 전주에 있는 극단 명태에 들어갔다.

 나는 살면서 다양한 선생님들을 만났다. 그들은 내게 많은 것을 주었다. 부모님은 내가 거주할 집을 선물해줬고, 은영 선생님은 내게 올바른 가치관을 알려주었고, 민영 선생님은 친절함, 미영 선생님은 꿈을 선물해주었다. 만약 이들이 없었더라면 자기를 반성하는 김은영, 환하게 웃는 김은영, 자기 꿈을 쫓아가는 김은영은 없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내가 만난 모든 선생님들에게 감사하다.



더 아래로 걸어가겠습니다

글. 장성문

 펄떡댔다.
 발목의 혈관부터 시작해 손목과 심장을 지나 정수리 끝까지 온몸이 달궈졌다. 마음이 빨개졌다. 심심했다. 내 인생이, 내 몸은 너무 고왔다. 어디 가서 생채기라도 몇 개 사와 굳은살을 만들고 싶었다. 요란할 일도 없는 천국 같은 곳에서 안정을 공부한다는 게 요란했다. 그리곤 휴학했다. ‘무엇을 위해서?’라기 보단, 그냥 해야 할 일이라는 생각이었다. 굳이 말하면 공부는 몸으로 하는 거니깐. 나를 몰아넣었다. 그 2년, 난 무엇을 배웠을까.

 고통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나를 가슴 뛰게 하던 문학과 풍요로운 인생을 위해, 스스로 채집할 지혜를 위해 무작정 상경했다. 직장과 방을 잡고 객 생활을 시작했는데, 다시 말하지만 채이고 뽑히고 굴러다녔다. 의미심장하게 몰락의 각오를 품었던 타올랐던 열정과 치기는 주관을 잃었다. 사회엔 교단과 달리 봐주는 사람이 없었다. 고상함은 부정의 단어다.
난 나름 치열했다. 상경한 목적을 읊어댔고 직면한 문제들에 대해 생각했다. 책을 읽어댔고, 시간을 정해놓고 책상에 앉아있었다. 시간도 ‘돈’처럼 아꼈다. 그간 배운 마음공부도 시도했지만 당장 달라지는 건 없었다. 외로움이 지하철이 되어 날 치고 다녔다. 하아, 어머니 성모마리아님 관세음보살님…. 캥거루가 되고 싶었다. 너른 바다 속으로 뛰어들고 싶었다. 아무라도 마음 둘 곳을, 마음의 안정을 주시길 바랐다.

 ‘기다릴 것.’
 이 생각이 든 건 그렇게 방황한 후였다. 이루려는 마음이 사그라들자 핵심이 드러났다. 실력은 부족한데 이루기에 조급했다. 좋아서 시작했던 문학은 어느새 ‘잘해서 성공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변해있었다. 당연히 집중할 수가 없었다. 돌아오니 보였다. 그건 오래 전 읽은 경전의 얼굴을 닮아있었다. ‘이뤄질 건 때가 되어야 이뤄지고, 그 때에 받아들일 실력이 중요하단 걸. 그러니 조급해 하지 않고 차분하게, 여러 갈래로 벌여가는 마음을 하나로 모아서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마음이 진정되자 난 생활을 즐길 수 있었고, 그간 내가 얼마나 교만하고 무례하고 자의식 과잉이었는지 알았다. 겸손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날 내세우지 않기로 했다. 주변에 사람들이 생기기 시작했고 그들과 ‘함께’ 하니 오히려 힘을 얻을 수 있었다.

 이젠 안다. ‘꿈은 이뤄내는 것이라기 보단 어느 순간 주어지는 것’이라는 걸. 욕심은 마음의 힘이 없으면 소화할 수 없는 것이다. 요새 난 마음이 편하고 좋아하는 일들에 바로 설 수 있다. “그래, 마음의 안정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그리고 난 기다릴 거다. 마음을 비워내고 ‘무엇’을 염두에 두지 않고, 그렇게 즐거이 살아낼 것이다. 큰 짐승을 잡으려는 사냥꾼은 작은 짐승을 보아도 능히 유연하니. 거문고 줄 당기듯 그렇게, 내 마음 줄에 운율을 실으며! “더 아래로 걸어가겠습니다.”

 바로 여기까지가 나의 실패의 경험 속에 은혜로 채워진 이야기다.



가족의 재발견

글. 남승주


 나는 부산에서 학생회와 청년회를 다녔던 모태 신앙이다.
 가만히 과거를 돌아보면 교당을 다니고 싶어서 다녔다기보다 친구와 교무님이 좋아서 다녔던 것 같다. 그래서일까. 교당 생활이 꾸준히 이어지질 못했다.

 시집가서는 아이들을 키우느라 종교 생활을 멀리 했다. 아이들을 어엿한 사회인으로 키우고 보니 내 종교 생활을 해 보자는 생각을 하게 되었지만 당장 교당을 나가지는 못했다. 하지만 마음으로는 늘 대종사님과 사은님을 외쳤고, 힘들고 불안할 때 늘 간절히 기도를 했다. 영주도 외우고 청정주도 외웠다.
 
 어느새 나이가 50 하고 중반. ‘이젠 종교 생활을 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남편에게 ‘나 원불교 나가겠다.’고 말하니 그러라고 한다. 아싸~! 기분이 좋다.

 2016년 1월 1일부터 열심히 다녀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어느 교당을 갈 것인지 갈등이 생겼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가 화곡교당으로 마음을 먹고 법회를 나간 첫 일요일. 서먹하다. 아는 이도 없고, 친구에게 왔다는 소리도 못 한 채 법회만 보고 집에 돌아왔다. 또 갈등이 생겼다. 그래서 한동안 또 교당에 안 다녔다.

 내 마음 한구석에서 ‘왜 안 다녀?’ 라며 스스로를 채찍질한다. ‘다녀야지. 꼭 다닐 거야. 그래, 다녀보자.’ 5월에 다시 다짐을 하고 교당에 갔다. 친구가 잘 왔다며, 왜 그때 이야기하지 않았냐고 한다. 나는 친구가 있는 성불단에 속하게 되었다. 내 또래도 많고, 특히 언니들이 잘해준다.

 이제는 화곡교당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역할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본다. 그렇다고 경제적으로는 넉넉하지 않기에 내가 잘 할 수 있는 것으로 봉사를 하고 싶은 마음만 막연히 있었다. 그런데 올해 새로 부임하신 교감님이 교도들과 빨리 가까워지고 싶어 하면서 단 별로 사진을 찍게 되었다. 이렇게 나의 사진 봉사가 시작되었다. 원음합창단에도 가입하고, 원사진협회 활동도 시작했다.

 얼마 전 무릎 연골이 찢어지는 아픔에 수술을 하게 되어서 교당에 못 가고 있다. 휴대전화로 소식만 들을 뿐, 함께 하지 못해 정말 미안할 뿐이다.

 시어머니는 나에게 일요일마다 교당에 가서 가족이 무탈하게 해달라고, 꼭 기도를 하고 오라고 하셨다. “어멈아 일요일 꼭 가라. 알긋제?” “네. 꼭 가서 기도  할게요. 어머님도 건강 하시라고.” “난 됐다. 니들 가족이나 건강하게 해달라 캐라~” 어머님의 응원도 받고 있는데… 교당에 못 가니 죄를 짓는 느낌이다.

 가족이라는 개념이, 반드시 우리 집 식구에만 한정되는 건 아닌 것 같다. 교당 식구들도 이젠 나의 가족이다. 교당 가족들 덕분에 행복하고, 교당 가고 싶은 마음도 나날이 더 커진다. ‘가족의 재발견’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 본다. 빨리 나아서 교당에 나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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