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착을 내려놓으면
만족·감사생활로 행복해져… 自性도 더 가까이 다가올 듯

글. 박정원  월간<산>부장·전 조선일보 기자

인간은 생활하면서 수많은 집착을 나타낸다. 연인이나 친구에 집착하기도 하고, 특정 물건에 집착을 보이기도 한다. 다만 집착을 긍정 에너지로 발산시키면 좋으련만, 문제는 대부분 비극적 말로로 끝난다는 것이다. “헤어지자.”는 연인을 납치해 인질극을 벌인다든지, 스토킹으로 시시각각 상대방을 괴롭히는 등의 사례는 우리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모두 비극적인 결말로 막을 내렸다.
집착만큼 사람을 괴롭히는 것도 없을 것 같다. 집착은 때로 욕심보다 더 큰 화를 불러들인다. 대인관계에서, 연인관계에서, 부부관계에서, 친구관계에서, 나아가 일에서도 집착을 가지는 경우가 많다. 어떻게 보면 인간은 집착의 동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
집착, <불교 시공사전>에는 ‘허망한 분별로써 어떤 것에 마음이 사로잡혀 헤어나지 못함. 그릇된 분별로써 어떤 것을 탐내어 그것에서 벗어나지 못함.’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원불교 대사전>에서는 ‘착심을 떼지 못하면 죄업의 바다에 빠지게 된다. 착심 떼는 공부가 생사해탈 공부다. 견성을 했어도 번뇌와 착심은 바로 없어지는 것이 아니며, 점차로 노력하고 수행해야 없어지게 된다. 평소에 좌선 등을 많이 해야 착심이 줄어들거나 없어지게 된다.’고 설명한다. 요약하면, 분별심을 제대로 작동하지 못해 일어나는 번뇌와 그로 인한 괴로움 정도로 풀이할 수 있겠다. 그 해결 방법은 좌선을 많이 하면 줄어든다고까지 적시해놓고 있다.
사람은 누구나 집착을 가진다. 얼마나 적게 가지고 많게 가지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성품이 나타나기도 한다. 필자도 지난 시절을 되돌아보면 집착이 조금 강한 편이었다. 원불교를 알고 나서, 가끔씩 좌선과 명상을 하고부터는 어느 정도 내려놓은 줄 알았다. 그런데 얼마 전 ‘아직 그러지 못했구나. 아직 한참 멀었구나!’ 하는 느낌을 강하게 받은 사건이 있었다. 아주 사소한 사건이었다.
아내와 함께 제주도로 며칠 간 여행을 갔다. 올레길을 걷기도 하고, 맛집을 찾아다니기도 하고, 차를 렌트하지 않고 그냥 시간 가는 대로 다녔다. 그리고 호텔로 돌아와서 사우나에 갔다. 평소 하던 대로 냉온탕과 반신욕을 30여 분 하고 나니 슬쩍 면도를 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면도기를 챙겨오지 않았다. 면도기를 가져오지 않았으니 다시 호텔방으로 돌아가서 면도를 하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계속 ‘면도를 해야 하는데….’라는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혹시라도 누가 버리고 간 1회용 면도기가 있을까 싶어 주변을 둘러보기도 했다. ‘버려두고 갔으면 뜨거운 물에 소독해서 한 번만 더 사용하면 되지.’라는 생각에까지 이르렀다.
그 순간 ‘내가 왜, 아직까지 이런 집착을 가지고 있나?’라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내가 아직 이 정도밖에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아, 아직 한참 멀었구나, 이런 사소한 집착까지 버리지 못하고 있구나.’
반신욕을 하면서 집착에 관한 생각과 전체 상황을 다시 한 번 냉정하게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져봤다. 애초에 면도를 할 생각이 없었기에 면도기를 가져가지 않았다. 그러면 안 하면 된다. 그런데 사우나에 와서 보니 면도를 하고 싶어졌다. 하지만 면도기가 없었다. 호텔방에는 있었다. 면도기가 없으면 호텔방으로 돌아가서 하면 된다. 그런데 그 집착을 못 버려 몇 분 동안 누가 버려두고 간 면도기가 없는지 주변을 어슬렁거린 내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내가 지금 뭐 하고 있지?’ 면도기가 문제가 아니고, 그 사소한 면도기에 집착을 버리지 못한 내 자신이 더 한심하고 미워졌다.
밉고 부끄러운 나를 돌아보면서 다음 날 면도기를 들고 다시 사우나를 찾았다. 전날 가졌던 사소한 집착을 다시 한 번 떠올렸다. 사소한 ‘면도기 사건’은 나에게 큰 교훈이었다. 옛날에는 느끼지 못했지만 지금은 이 정도라도 느낄 수 있는 것은 내가 그만큼 수양을 했다는 긍정적인 의미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이를 계기로 더욱 수양해야겠다는 다짐과 함께 ‘면도를 하면서 그 사소한 집착까지 전부 깎아버려야겠다.’는 느낌이 들었다. 쉽게 되지는 않겠지만.
그 집착이 어디서 올까? 욕심이다. 욕심은 어디서 올까? 욕심과 집착을 버리면 인간 마음의 본성을 볼 수 있을까? 욕심과 집착을 버린 본성은 어떻게 생겼을까? 자성(自性)의 자리는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겠지만, 그리고 언제 도달할지 알 수 없지만 욕심과 집착을 버리면 더 가까이 있을 것 같기는 하다.
‘행(幸)’이란 글자를 파자(跛字)하면, 양(羊)이 땅(土)을 머리에 이고 있는 형상, 즉 양이 땅을 떠받드는 모습이다. 양이 땅에서 난 풀을 먹고 자랄 수 있게 해준 데 만족하고 감사한다는 의미다. 행복이란 의미는 만족하고 감사할 때 복이 따라온다는 뜻이기도 하다. ‘행’은 또한 수갑, 족쇄에서 풀려나 기뻐하는 마음을 담고 있다고 한다. 행은 구속에서 풀려났을 때의 감정 상태를 말하며, 운은 정지하는 것이 아니라 움직이는 것이다. 따라서 행복은 어떤 특별한 것을 얻는 데 있지 않고, 물적·심적 집착과 구속의 상태를 벗어났을 때 가질 수 있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욕심과 집착은 만족과 감사의 대립어다. 욕심과 집착이 있는 한 만족과 감사는 있을 수 없다는 맥락과 통한다. 행복은 결국 욕심과 집착을 버리고 만족과 감사하는 생활을 할 때 비로소 오고, 그 자리가 바로 자성의 자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집착을 버리자. 지식으로부터의 집착, 사랑으로부터의 집착, 음식으로부 터의 집착, 물건으로부터의 집착, 대인관계로부터의 집착, 사회현상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벗어나 있는 그대로의 형상을 통찰하자. 원래는 아무 것도 실체가 없었다. 사랑이 실체가 있나? 대인관계는 또한 어떤가. 모두가 인간의 감정이 만들어낸 허상에 불과하다. 그 허상을 인간이 만들고, 거기에 또한 집착한다. 모든 것은 실체가 없다. 부처님도 제법무상(諸法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라고 말씀하지 않았나.
욕심과 집착을 내려놓으면 만족과 감사생활을 할 수 있고, 행복이 다가오고, 더욱이 자성도 멀리 있지 않을 것 같다.

저작권자 © 월간원광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