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종교인의 천도재

다른 가족들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라 평소 원불교를 탐탁하지 않게 여기던 중이었다.
하지만 결국 원불교를 찾아와 재를 지내게 되었다.

취재. 정은구 기자

감옥에서도 가벼운 죄와 무거운 죄가 있듯, 사람의 업도 각기 다르다.
특히 생각지도 못한 와중에 갑작스러운 비명횡사를 당한 영가일수록 업이 두껍다고 말하는 김도진 원로교무. 그런 영가들은 삶에 대한 집착 등으로 인해 이생을 쉬이 떠나지 못하기 때문에, 더 많은 기도와 정성으로 천도를 해주어야 한다.
“사람의 성격이 다 다르듯 영가들도 달라요. 특히 업장이 두꺼우면 그것에 가려서 천도소리를 못 알아듣죠.” 스스로 생전에 기도를 많이 하고 수양을 하며 맑은 정신을 닦아 놓으면 스스로 벗어날 힘을 가질 수 있을 터. 하지만 본인이 힘이 없을 땐 주위 가족들이 법연으로 이끌어줘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천도재는 교무의 정성과 더불어 재주들의 정성이 함께해야 한다는 것.
김 원로교무가 이리교당에서 근무할 때의 일이다.
한 교도의 조카가 교통사고로 열반하는 일이 생겼다. 그런데 고모에게 조카 영가가 붙은 탓에 가족들이 고생을 하게 되었다. 교도의 다른 가족들은 모두 독실한 기독교 신자라 평소 원불교를 탐탁하지 않게 여기던 중이었다. 하지만 영가 때문에 계속 고생을 하니 결국 원불교를 찾아와 재를 지내게 되었다. 그리고 3재 때, 고모는 조카 영가가 불단의 꽃 위에 딱 앉은 것을 보았다.
“이렇게 예쁜 꽃으로 나를 천도해줘서 고맙다고 했다는 거예요. 나중에 그분들이 말하기를, 재를 지낼수록 일원상이 무섭게 느껴질 정도의 강한 기운을 느꼈다고 하더라고요.” 그렇게 천도재를 잘 마치고 나니, 나중에 친정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도 ‘재는 원불교에서 지내야 한다.’고 말했다는 그들. 이웃종교인들도 인정하는 천도재의 위력이었다.
“고창수도원에 와서도 다양한 재를 지내고 있어요. 그중에 한 교도님의 49재 땐 이런 일도 있었지요.” 서울에 있던 자식들까지 모두 내려와 함께 재를 치르던 날이다. 열반한 교도는 손녀딸을 장성하도록 키웠단다. 무용을 전공한 그 손녀딸이 할머니의 49재 때 하얀 옷을 입고 진혼무를 춘 것. 그렇게 재를 지내고 난 뒤, 손녀딸이 김 원로교무를 찾아왔다. “교무님, 제가 춤을 추고 나서 영정 사진을 보니까 할머니가 웃고 계셨어요. 교무님도 보셨어요?” 처음에는 찡그린 것 같더니, 재를 지내고 나서는 고맙다며 웃었다는 것이다. 김 원로교무는 “손녀딸이 춤을 춰주었으니 할머니가 얼마나 좋으셨겠느냐.” 하고 대답을 하면서도, 변화무쌍한 영혼의 세계에 감탄했다.
“주변 어르신들의 재를 정성스럽게 모시잖아요? 그럼 열반한 영가들이 방긋 웃어요.” 고창원광효도의집에 입소한 어르신들은 재가 있는 날이면 휠체어를 타고서라도 참여한다. 가족들이 참석하지 않더라도 그렇게 서로 기운을 하나로 모아 재를 지내주는 것.
“물론 모두가 이러한 재의 필요성과 위력을 아는 것은 아니에요.”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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