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해줄 수 있는 일

늦은 새벽이다.
급식 재료를 사기 위해 차를 세워둔 서울역 주차장으로 급히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발소 앞에 차량이 보도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세워둔 쇠말뚝 옆으로 낯선 물건이 보인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노숙인 한 분이 윗옷을 잔뜩 올려 머리가 안 보이도록 한 채 말뚝처럼 앉아 있었다. 약간의 술 냄새가 났다. 어떻게 움직임도 없이 저렇게 앉아서 잠들었을까. 날이 많이 풀린 덕분에 추위가 덜하기는 하지만, 걱정스러운 마음에 다가가본다. 한낮이면 걱정을 덜할 수 있을 텐데…. 사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다가갔다가, 잠깐 말 한 마디만 붙이고 떠나올 때가 많다. 내가 더 이상 해줄 수 것이 없기 때문이다.
마음 같으면 바람이 불지 않는 곳으로 옮겨드리고 싶지만 그럴 수 있는 상황도 아니다. 그저 애잔한 마음만 갖고 자리를 떠날 수밖에.
얼마 전, 거리에 있는 사람들의 자활을 도와주는 ‘다시서기종합지원센터’를 운영하는 성공회 신부님에게 주례를 부탁한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이분은 젊은 나이에 개인 사업을 하다가 사업 실패로 큰 빚을 지고 거리로 나왔던 사람이다. 다행히 그는 지금 어엿한 직장을 가졌지만, 노숙인 시설을 이용한 과거 때문에 여러 불이익을 겪거나 퇴사를 당하는 사람들이 사실 더 많다. 그렇기에 신부님이 “결혼식에서 주례를 맡게 된 인연을 이야기하다 보면 자연스레 과거 이야기가 나올 텐데 괜찮겠냐?”는 이야기가 오갔다. 그 사람은 이미 배우자와 양가 부모들에게 그런 사정을 다 말한 상황이므로 괜찮다고 했다. 하객들에게는 굳이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좋겠다고도 했다. 결국 신부님은 주례를 해주었다.
그는 비록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노숙의 길에 들어왔지만, 그 삶 속에서 자신의 삶을 충실하게 살았다. 그랬기에 부끄러움보다는 당당함으로 배우자와 양가 부모에게 자신의 과거를 밝힐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을 때 손 내밀어준 다시서기종합지원센터와 신부님에게 감사와 아울러 앞으로는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지켜봐달라는 의미로 주례사를 부탁했을 것이다.
거리에 있는 사람 중에는 이렇듯 말 못 할 사연을 지닌 채 거리에 들어와 사는 경우가 많다. 수중에 돈 한 푼이 없기에 단돈 7천 원만 있으면 몸을 눕힐 수 있는 쪽방을 바라보며 잠을 청하지만, 그중에도 열심히 노력해서 새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문득 식사대용으로 주머니에 두유를 넣어 온 게 생각났다. 미안한 마음으로 웅크린 그를 나직이 부르니, 놀라는 목소리와 함께 눈을 뜬다. 두유를 얼른 전해주고 급식 재료를 사기 위해 다시 출발했다. 오늘은 더 싱싱하고 맛있는 재료를 구입해, 밥 한 끼로 힘든 삶을 벗어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작지만 따뜻한 힘이 돼주고 싶다고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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