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입 우편배달부

“당신은 우표를 붙이는 데만 쓰던 내 혀를 다른 데
사용하는 걸 가르쳤어요. 사랑에 빠진 건 당신 때문이에요!”

글. 김진실

“저기 가는 그녀는 정말 이상해. 늘 꿈속에서 사는 것 같아.”
이 짧은 두 문장은 최근에 개봉한 영화 <미녀와 야수>의 OST 중 한 곡으로, 마을 사람들이 주인공 ‘벨’을 보며 불렀던 가사다. 이것을 보고 자신도 모르게 쓴웃음을 지었다면, 분명 한번쯤 “넌, 남들과는 달라.” 혹은 “참 걱정 없이 행복하게 산다.”와 같은 코웃음을 받아본 사람일 것이다. 현실에 안주하며 사는 사람들에게 아무 이유 없이 비현실적인 사람으로 낙인찍히는 꿈꾸는 자의 억울한 현실이랄까.
나 역시 벨처럼 책에 흠뻑 빠져있었던 시절이 있었다. 흔한 로맨스 소설에 시간 가는 줄 몰랐고, 판타지 소설로 온 세상의 시공간을 뛰어넘어 다녔다. 몇 단어에 울기도 했고, 문장이 숨겨버린 의미에 흥분을 주체하지 못해 새벽을 지새우기도 했다. 그렇게 난 나의 세상 속에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삶이 순리대로 흘러간다면 평생 글 쓰는 작가로 살고 싶다는 꿈을 꾸면서.
그러나 난 꿈만 간직한 채 언젠가부터 책을 멀리하고 있었다. 이유야 너무나도 많지만, 결국 흔해빠진 변명거리일 뿐이다. 졸업 후엔 탁자에 제법 많은 책을 쌓아 올렸지만, 글자만 봐도 가슴이 뛰던 어린 시절의 나는 없었다.
그때 마리오가 떡하니 내 앞에 나타났다. 친구가 생일 선물로 준 안토니오 스카르메타의 <네루다의 우편배달부>를 일 년이 지나서야 읽은 나로서는 더욱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난 마리오의 순수하고 열정적인 모습에 깜짝 놀랐다. 네루다의 우편배달부를 하면서 네루다의 시(詩)에 매료되어 자기 삶의 모든 것을 예술로 승화시키기 시작한 마리오. 그는 먹고살기 바쁜 사람들과 달리 한 여인에게 사랑을 열렬히 고백하고, 자칫 놓쳐버릴 수 있는 일상의 순간들을 충분히 음미했다. 그는 진정한 행복과 헤아릴 수 없는 슬픔을 느낄 줄 아는 사람으로서 더 당당하게 행동하며, 말 한 마디에도 형용할 수 없는 자신만의 메타포를 뿜어냈다. 나는 그 힘이 하루를 어떻게 통째로 바꿔놓는지 잘 알고 있었다.
어떤 이들은 이 책을 정치적 혹은 혁명적으로 해석해, 민중 시인이었던 네루다의 영향력만을 칭송한다. 하지만 결말이 어떻든 나에겐 그 청년, 마리오만 가득했다. 떨림과 설렘으로 글을 쓰고 싶다는 마음을 갖게 해준 그 원초적 행위를 다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무엇보다 시집 단 몇 권에 “당신은 우표를 붙이는 데만 쓰던 내 혀를 다른 데 사용하는 걸 가르쳤어요. 사랑에 빠진 건 당신 때문이에요!”라고 소리칠 수 있는 그가 너무 부러웠다.
마리오가 떠나고 며칠이 지났는지 알 길이 없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내 옆에서 모든 메타포를 녹음하고 있다. 그날 이후 난 수많은 사람들의 신입 우편배달부로 취직했다. 
그리고 오늘도 녹음기를 들고 신입 우편배달부로서 다른 사람 옆을 기웃거리고 있다. 뭐, 난 몇 번이고 책장을 소란스럽게 넘길 것이다. 그가 부럽지 않게 될 때까지.


칼의 노래

책을 다시 읽으며 그 몇 백 년 전이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음을 느껴본다.

글. 이효은

김훈의 소설 <칼의 노래>를 다시 읽었다.
마음에 검 한 자루를 우뚝 꽂은 듯 울림을 주었던 책이었기에 이미 앞서 몇 번을 읽었다. 그 때문인지 책 페이지들이 누렇게 변해있었다. 책을 다시 읽던 중, 원고를 써달라는 연락이 와 ‘아~. 이 책의 이야기를 해야겠구나!’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순신은 오늘날에야 모든 이들로부터 가장 존경받는 위인이다. 하지만 책 속 젊은 그는 임금(인조)으로부터, 또 조정대신들로부터 핍박받고 모함을 받는다. 먼 포구에서 한양까지 불려가 주리를 틀리고 수십 대의 매를 맞고…. 허름한 주막에서 장독을 치료하는 사이 홀로 떨어져 있던 부인은 둘째 아이를 낳는다. 위인이 아닌 인간 이순신의 삶을 엿보는 것 같아 마음이 미어진다.
소설 속에선 민초들의 삶은 겨우 보리 서너 말 타작해서 죽 끓여먹으며 일 년 내내 부역에 동원되는데, 높은 장수들은 서로 우수한 전과를 올리겠다고 난리를 친다. 무능한 관리들은 민초들의 어려움을 모른 척한다. 실은 그 풍경이 소설이라고만 할 수가 없다.
책을 다시 읽으며 그 몇 백 년 전이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음을 느껴본다. 최근의 일만 봐도 그렇다. 높은 자리에 있는 이가 자신의 명을 거역할 수 없는 이에게 실천토록 강요한다. 경악스러운 사태에 입을 못 다물었지만,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일들이 일어나는 현실이다.
거의 3개월 넘게 옳고 그름이 소용돌이쳤다. 어떤 이들은 이쪽 광장으로, 다른 이들은 저쪽 광장으로 모였다. 딸의 친구네는 아버지와 자녀의 의견이 갈려 각자 다른 광장으로 나갔다고 한다. 그 엄마는 자녀와 남편에게 각각 따뜻한 물을 싸주며 조심히 다녀오라고 말했다고 한다. 서로 어디로 가는지 알면서도 모른 척하면서…. 서로의 의견을 존중하자는 암묵적인 원칙을 세우고, 집안에서는 정치적 이야기를 절대 하지 않는단다.
전라도가 고향인 시댁과 경상도가 고향인 친정. 나 역시 남편과 정치적 성향이 달라 평생 뉴스도 같이 보지 않았는데, 이번에는 매일 함께 뉴스를 시청했다. 얼마 전에는 모임에서 “결혼 40년 만에 남편과 의견이 합치했다.”며 우스갯소리를 했더니 모두 웃었다.
생각해보면 책 속이나 현실이나 언제나 저 위의 관리들보다 민초들이 더 평화적이고 현명했던 것 같다. 아마 이 혼란도 현명하게 마무리될 것이라고 믿는다.
책 속의 이순신을 머릿속으로 그려본다.
난세에 영웅이 나듯이 우리나라에도 좋은 영웅이 나오길 기다려 본다. 아니, 이순신의 지혜와 용맹함을 닮아보자고 다시금 다짐해본다.


뭐해요, 지금?

그 순간 작가의 기다림의 고통은
순식간에 즐거움으로 변한다.

글. 윤영배

평소 가까이 지내는 친구에게서 작년에 선물로 받은 책이 있다. 이석원 작가의 <언제 들어도 좋은 말>이다. 특별한 생각 없이 읽기 시작했는데, 딱 두 페이지 만에 작가에 대한 호기심이 생길 수밖에 없는 표현이 눈에 띄었다.
‘특히나 지금처럼 집필에 들어간 상황에서는 마음이 더욱 얇아져 이런 사소한 자극에도 민감해지는 편이다.’ 이 문장을 읽는 순간 ‘아, 마음이 얇다니…. 이런 표현을! 역시 작가다.’라는 생각을 했다.
이 책을 짧게 표현하면, 작가의 연애사라고 할 수 있다. 다른 사람의 연애 이야기에 내 마음이 흔들린 것은 왜일까? 고민해서 쓴 표현 때문에? 그보다는 350여 쪽에 이르는 긴 내용에 담긴 작가의 내면이 나와 놀라울 정도로 비슷했기 때문이다. ‘나만 그렇게 느끼는 게 아니었어.’ ‘나만 아픈 게 아니었어.’ 하는 공감과 함께 내 감정들을 인정받고 치료받는 느낌이었다. 마음속에 떠돌아다닐 뿐 표현되지 못했던 것들이 그 안에 있었다.
나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 때면 무조건 내게서 그 원인을 찾으려 하고, 좋아하는 사람에게서 거절당할지 몰라 두려워한다. 작가는 이런 내용을 ‘방어적 인간’이라는 두 단어로 간단하게 표현했다. 이 책에 등장하는 이야기들의 기저를 이루는 단어가 아닐까? 방어적 인간이라는 말을 작가가 좀 더 솔직히 썼다면 아마도 ‘상처받기 싫은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누군가에게 호감이 생기면, 인사도 하는 둥 마는 둥 나도 모르게 피하게 되는 모습처럼.
게다가, 나는 누군가와 친해지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곤 한다. 작가 또한 인연이 닿은 여자 주인공인 김정희에게서 연락이 올 때까지 몇 달간, 만나기 시작한 후에도 며칠을 그냥 기다린다. 심지어 헤어진 후에도 말이다. 여주인공이 작가에게 제시한 만남의 조건인 ‘나만 연락할 수 있고, 나를 다시 좋아하게 되더라도 절대 표현하면 안 될 것.’을 듣는 순간에도 작가는 그것을 승낙한다. 연락을 하염없이 기다리며 힘들어하던 못난 내 모습이 작가와 닮아 있었다. 사람을 좋아하는 데 이유가 있을까? 그냥 좋은 것이다. 이리저리 자기합리화를 하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좋은 것. 연락을 할 수 없어 답답하지만, 가끔 연락이 오면 매우 기쁜 것. 참 신기한 일이다.
여자 주인공은 대략 일주일 간격으로(물론, 자기가 원할 때) ‘뭐해요?’라는 문자를 보낸다. 그 순간 작가의 기다림의 고통은 순식간에 즐거움으로 변한다. 작가는 이를 ‘리트리버처럼’이라고 표현한다. 고개가 끄덕여진다. 좋아하는 주인이 부르면 기뻐하며 뛰어오는 강아지 리트리버. 바보 같다고만 생각했던 모습에 작가는 이렇게나 귀여운 애칭을 붙여 주었다.
책을 덮으며 ‘나를 안 부르면 어쩌지?’ 하는 불안한 그 마음, 두려움을 인정한다. 아주 짧은 말로도 마음이 기쁨으로 가득 차게 되는 그 말, “뭐해요, 지금?”이라는 언제 들어도 좋은 말을 떠올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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