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랑꽃 망울망울 되살아나는 얼굴들
글 김광원

차가운 기운이 가시지 않은 새봄이 돌아오면 나의 베란다에서는 꽃이 피어난다. ‘긴기아난’이다. 요즘 아침에 일어나면, 은은하면서도 진한 향기가 말로 표현하기 힘든 깊은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무형의 향기가 내 존재의 무의식을 자극한다. 심연에 묶여 있는 내 얼굴이 희미하게 떠오를 것 같은 느낌도 일어난다.
프랑스의 작가 쟝 그르니에(1898~1971)는 수필 ‘행운의 섬들’에서 여행지에서 절로 솟아나는 울음을 소개한다. 그건 낯선 세계에서 쏟아져 나오는 엄청난 빛, 그런 체험의 울음이다. 처음 만나는 풍경 속에서 느끼는 경이감 또는 무력감의 눈물이다. 그러면서 그는 꽃, 해초, 갈매기, 섬, 아침의 놀라움, 저녁의 희망 등을 호명하며 “오직 그대들만이 나를 나 자신으로부터 해방시켜준다. 그대들 속에서만 나는 나 자신의 모습을 알아볼 수 있다. 티 없는 거울아, 대상 없는 사랑아….”라고 글을 맺는다.
연암 박지원(1737~1805)의 ‘열하일기’에도 울음 이야기가 들어 있다. 연암은 청나라 건륭황제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한 외교사절의 일행으로 압록강을 건너고 만주 땅에 도착한다. 광활한 만주 벌판을 바라본 연암은 “훌륭한 울음터로다. 크게 한번 통곡할 만한 곳이로구나.” 하고 말한다. 갓난아이가 어머니 뱃속에서 갑갑하게 있다가 하루아침에 확 트인 세상에 나와 터뜨리는 고고성을 예로 들면서, 연암은 1200리 사방에 한 점 산도 없이 트여 있는 드넓은 땅을 바라보며 터져 나오려는 울음의 감정을 밝힌 것이다.
위의 사례에서 공통점은 물론 울음이다. 그 울음은 순수 자연의 거울을 통해 자신을 발견하는 울음이요, 긴긴 세월 갇혀 있다가 우주와 ‘나’ 사이의 통로를 발견하게 되는 순수직관의 감정이다. 이때 우리는 자신이 얼마나 왜소한 존재인가를 알게 되고 겸허해진다. ‘나’를 둘러싼 대자연의 풍경 속에서 희미하게나마 ‘내’ 존재의 뿌리를 느끼게 되고, 자신의 내부에 깃들어 있던 생명의 경이감에 눈을 뜨게 되는 것이다.
얼마 전 동창들 모임이 있어 모처럼 충청도 예산의 수덕사에 갈 기회가 생겼다. 그런데 수덕사 입구부터 그 풍경이 예전과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매표소를 지나 이응로 화가가 머물던 수덕여관과 이응로 화가의 암각화를 떠올리며 올라갔다. 아~ 그런데 예전에 우리 가족이 머물던 수덕여관은 숙박 기능을 상실한 도기념물로 지정되어 정비되어 있었고, 암각화는 낮은 울타리로 둘러져 있었다. 지금도 우리 집 냉장고에 크게 확대되어 붙어 있는 암각화 배경의 가족사진. 15년도 넘게 붙어 있는 그 사진이 눈앞에 떠오른 것이다.
갈 때마다 경건하게 느껴지는 수덕사 경내를 둘러보고 내려오는데 쇠북소리가 들려온다. 오후 6시. 이게 그 유명한 수덕사의 종소리가 아닌가. 쇠북소리는 참 무겁게 들려왔다. 내면의 저 밑바닥에 있는 단전을 묵직하게 울리는 그런 소리. 아래로는 온 중생을 향하여 내려가 끌어안는 듯하면서, 위로는 멀리 하늘에까지 오를 것 같은 묵직한 힘이 느껴진다.
그 울림은 멀리 1967년의 일명 ‘동백림 사건’을 떠올리고 있었다. 동베를린을 비롯한 유럽의 여러 지역에서 활동하던 윤이상, 이응로 등 많은 예술가와 유학생들을 간첩으로 몰아 고문하고 탄압한 역사는 고암 이응로 화가의 수덕여관, 암각화와 함께 길이길이 기억될 것이다. 그 기억의 강은 넓은 대지를 흐르며 지워지지 않을 것이고, 그들의 예술정신은 맑은 하늘에까지 올라 후세의 교훈으로 오래 남을 것이다. 동백림 사건의 엉뚱한 피해자 천상병 시인은 시대의 절절한 아픔을 녹여 다음과 같이 남겨 놓지 않았던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 ‘귀천’ 전문

예산을 다녀와 아파트 입구에 들어서니 산수유가 노랗게 팔을 벌려 나를 반갑게 맞이한다. 언제부터인가 봄이 되어 산수유가 안개꽃 같은 모습으로 피어나면, 이 땅에 머물다 안타깝게 사라졌을 얼굴들이 마치 노란 꽃망울로 되살아난 듯한 환상을 느낀다. 우리 이 땅에는 길고 긴 세월 얼마나 많은 민초들이 고통 속에 숨죽이며 살아왔던가.
수인번호 503번 그녀는 떠나고, 3년 만에 세월호가 돌아왔다. 이제 잠시 후면 노랗고 하얀 민들레가 여기저기 피어나리라. 멀지 않은 날, 미륵정토의 평화가 안개처럼 찾아오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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