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벽회상의 터전
- 월명암과 <부설전> -

글. 박윤철

지난 호에서는 ‘천부보찰’의 땅 변산을 집중 조명한 바 있다. 이번 호에서는 ‘천부보찰’의 땅 변산 가운데 ‘보찰’(寶刹) 월명암(月明庵)에 대한 심층 탐구를 통해 개벽회상 원불교의 ‘오래된 미래’를 확인해보기로 한다. 널리 알려져 있듯이, 소태산 대종사는 변산 입산 직전인 1919년 음력 3월에 9인 제자 가운데 1인인 사산 오창건을 대동하고 월명암에 행가(行駕)하여 10여 일을 머물다 돌아오신 적이 있다. 또한 같은 해 7월에는 수제자 정산 송규를 월명암으로 보내 학명 스님의 상좌로 3년여를 머물게 한 바도 있다. 뿐만 아니라, 같은 해 음력 10월 20일에는 아예 대종사 스스로 석장(錫杖)을 변산으로 옮겨 월명암 주지인 학명 스님 등과 교류하면서 새 회상 원불교 창립을 위한 제반 준비 작업에 착수하셨다.
그렇다면 대종사께서 석장을 변산으로 옮기실 무렵의 월명암은 어떤 상황에 놓여 있었을까? 전승되는 기록에 따르면, 월명암은 691년(통일신라 신문왕 11)에 재가(在家) 수행으로 유명한 부설(浮雪) 거사가 창건하였으며, 조선 선조 때 고승인 진묵(震默) 대사가 중창하여 17년 동안 머물며 많은 제자를 양성하였고, 1863년 성암(性庵) 스님이 중건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1908년에 화재로 소실되어 1915년에 학명 스님이 중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월명암은 호남의 사찰과 암자 가운데 대둔산의 태고사와 백암산의 운문암과 함께 ‘산상무쟁처’(山上無諍處), 곧 뛰어난 경치와 신령스런 땅 기운으로 인해 스스로 번뇌와 분별이 끊어지고 가라앉는 장소, 다시 말해 영지(靈地) 중의 영지로 꼽히던 곳이었다. 따라서 근대의 고승들인 학명,
용성, 고암, 해안, 월인, 만허, 소공 스님 등이 모두 월명암에서 정진했으며, 일찍이 학명 스님이 개설한 바 있는 봉래선원(蓬萊禪院)은 현재 사성선원(四聖禪院)으로 이름을 바꿔 수좌(首座)들의 정진적공에 이바지하고 있다. 
여기서 월명암과 관련하여 반드시 기억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의미심장한’ 역사가 또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월명암이야말로 ‘미래의 종교’로서 원불교가 지향해가야 할 이상(理想)인 ‘중생의 삶을 떠나지 아니한 생활불교’와 재가 수행의 모범(模範)이 이미 제시되고 있기 때문이다. 앞에서 설명했듯이, 월명암은 부설거사가 창건한 암자로써 이곳에서 부설 거사는 부인 묘화(妙花), 아들 등운(登雲), 딸 월명(月明)과 함께 재가(在家) 수행을 통해 불지(佛地)에 오른 곳으로 유명하다. 사성선원의 ‘사성’은 바로 부설거사를 비롯한 일가족 4명이 모두 불지에 오른 것을 기념하여 붙인 이름이다. 부설거사의 재가 수행의 경지를 짐작하게 해주는 내용을 <부설전(浮雪傳)>(저자  보응당 영허대사 해일=海日, 1541~1609)에서 인용한다.

거사의 몸은 비록 속세에 힘썼지만 마음은 물외(物外)에 머물러 삼업(三業; 삼학)을 부지런히 닦아 육도(六度)를 자유하여 내외를 두루 통하니 말과 글에 막힘이 없었다. 그래서 사방의 이웃들이 기뻐하며 찾았고 먼 곳의 사람들도 감화되었다. 의왕(醫王=부처)을 찾는 지식인들이 바람처럼 몰려들고, 선약(仙藥; 부처의 가르침)을 얻고자 하는 이들이 폭주하여 어리석음을 끊고 깨달음을 얻으니, 마른 지푸라기를 적시듯 법보시(法布施; 교화)를 널리 베푼 것이 어언 15년이나 되었다. (중략)
도란 ‘검은 비단을 입느냐 횐 옷을 입느냐’에 있지 아니하며, ‘꽃밭에 있어야 하느냐 들판에 있어야 하느냐’ 에도 있지 않다네. 모든 부처님들은 방편으로써 오로지 뭇 생명들을 이롭게 하는데 뜻을 두었다네.
    
공산 백낙청 교수는 월간 <원광> 창간 50돌 기념 대담에서 “원불교와 관련해서 재미있는 결론이 나옵니다. 즉 생활불교, 과학과 양립하며 그리스도교와도 회통하는 불교, 모든 종파불교를 간명하게 통합하는 불교, 이게 바로 원불교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백낙청 회화록> 4, 창비, 2007, 208~209쪽) 라고 설파한 적이있는데, 백 교수가 강조하는 생활불교로서 원불교의 이상은 통일신라시대 부설거사의 재가 수행의 전통까지 거슬러 올라갈 정도로 그 연원이 깊다고 봐도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끝으로, 독자의 읽는 재미를 위해 부설거사의 재가 수행과 성도(成道)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부설전>의 전승 과정을 약기(略記)한다. <부설전>이 일반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913년 <조선불교월보>(朝鮮佛敎月報) 16~17호에 게재되면서부터이며, 오래도록 월명암에 전해져오던 것을 옮겨 실었다고 밝히고 있다. <조선불교통보>에 게재된 부설전은 다시 1918년에 간행되는 <조선불교통사>(朝鮮佛敎通史)에, 1932년에는 다시 국문판 <부설전>이 김태흡 스님 이름으로 불교시보사(佛敎時報社)에서 간행된다. 이어서 1972년에는 단국대학교 국문학과 답사단(단장 황패강 교수)이 월명암에 전승되어 오던 필사본 <부설전>을 발굴하여 학계에 소개하였다. 그런데 1972년까지만 해도 <부설전>의 저자가 누구인지, 월명암에 전해져 온 필사본 외에 따로 원래의 판본(板本)이 존재하는지는 전혀 알려져 있지 않았으나 1975년에 불교학자 김영태(金煐泰, 1933~현재) 교수에 의해 부설전의 저자가 보응당 영허대사 해일(海日) 스님이라는 사실과 함께 해일 스님의 문집 <영허집>(暎虛集) 권3에 부설전이 실려 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김영태 교수의 논구에 따르면, 영허대사는 1589년에서 1605년 사이에 <부설전>을 저술했다
고 한다. 임진왜란이라는 전대미문의 대전쟁의 참화 속에서 영허대사는 이상적인 불교로써 ‘재가불교’의 이상을 <부설전>을 통해 드러내려 했음이 틀림없으며, 그 이상은 마침내 소태산 대종사의 원불교를 통해 활짝 개화(開花)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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