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주 한 잔

말은 꼬였고, 창문에 놓인 장식도 빙빙 돌았다.
아니, 세상이 빙빙 돌았다.

글. 이성원

대학교 신입생 때다.
19살, 20살, 그리고 다른 대학에 다니다 들어온 22살 언니. 꽃피는 3월, 그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우린 친구가 되었다. 수업시간에 옆자리에 앉고 밥을 같이 먹었지만, 아직까지는 어색한 기운을 숨길 수 없었다.
술 이야기는 그 즈음 나왔다. “술집에 가봤어?” “술 먹어봤어?” 나름 모범생이었던 우리에게 술은 수학여행 때 한 모금 정도 먹어본 게 전부였다. 하지만 대학생활을 해봤던 언니는 달랐다. 당시 유행하던 과일소주부터 맥주, 소주…. 어떤 술에는 어떤 안주가 어울린다는 이야기까지, 모르는 게 없었다. 언니는 “역시 어른은 달라.”라며 감탄하는 우리에게 은총을 내리듯 말했다. “그럼 가보자!” 지금 생각하면 술집에 가는 것이 뭐 그리 어려울까 하겠지만, 교복을 막 벗은 새내기들에게 술집은 왠지 어색하고 쭈뼛거려지는 공간이었다. 더구나 우리는 대학생이긴 했지만 성인이 되지 않은 나이기도 했다.
디데이는 며칠 후로 잡혔다. 기숙사에 살던 언니와 나는 다시 한 번 기숙사 점호시간을 확인했다. 다른 한 친구는 부모님에게 기숙사에 사는 친구 방에서 자고 온다는 말까지 해놓았다. 장소는 예전부터 눈여겨 본 정문 앞 술집으로 정했다. 준비는 완벽했다.
우리는 수업이 끝나자마자 술집으로 달려갔다. 쭈뼛대는 우리를 대신해 언니가 앞장섰다. 그리고는 텅 비어 있는 가게 구석에 앉아 메뉴판을 폈다. 안주는 돈가스! 그리고 호기롭게 레몬소주 한 병을 시켰다. 술은 강한 것부터 배워야 한다고 언니가 말했다.
배운 대로 첫잔은 원샷! 우리는 동시에 술을 들이켰다. 레몬소주는 술맛이 안 날 정도로 달콤했다. 한 잔, 두 잔…. 그러다가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누구에게도 해본 적 없는 속 이야기를 시작했다. 마음 아팠던 이야기, 가족 이야기 등등…. 한 친구가 눈물을 터트렸고 우리도 따라 울었다. “괜찮아, 괜찮아. 우리가 있잖아.” 말은 꼬였고, 창문에 놓인 장식도 빙빙 돌았다. 아니, 세상이 빙빙 돌았다. 그래도 좋다고 웃음을 터트렸다. 이 우정 변치 말자는 맹세도 했다.
그날 우리가 어떻게 기숙사까지 걸어왔는지에 대한 기억은 없다. 하지만 확실한 건 다음날 엄청난 숙취에 시달렸다는 것. 그리고 그날을 계기로 우리가 친한 친구가 되었다는 것이다.
지금도 가끔 그날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얼굴이 벌게져 나온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따뜻한 바람이 부는 비, 봄비였다.


아낌없이 아껴야 하는 날들

손으로 굳은 흙을 부수고 어루만지면, 흙은 씨앗을 품어 길러내는
한없이 자애로운 어머니 같아진다.

글. 안혜경

토마토 모종을 심기로 한 이른 아침, 우리는 따로 약속을 하지 않고도 모였다. 함께 농사를 짓기 시작한 지 벌써 몇 년째, 우리는 처음보다 더 많은 우리가 되어 농사의 시작인 토마토 모종을 심는다. 더불어 행복하자는 마음을 서로 알게 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고, 그 믿음으로 돈독해지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한두 마디의 말이나 한두 번의 실수로 오해하거나 미워하지 않을, 터무니없는 오해나 실수라도 이해하려 노력할 내 편인 사람들. 이웃으로 만난 고맙고 귀한 인연이다. 우리들은 ‘토마토가 잘 돼서 농사지어 먹고사는 근심을 덜어주자.’는 마음으로 토닥토닥 응원하듯 모종심기를 마쳤다. 때마침 봄비도 비닐하우스 천장에 부딪히며 토닥토닥 소리를 낸다. 천지에 응원소리가 가득했다.
일을 마치고 돌아서는 사람들의 뒷모습은 해를 거듭해도 무뎌지지 않을 먹먹한 감정이 들게 한다. ‘단풍잎이 내려앉으면 멋지겠다.’ 싶던 목공그네에는 영출 씨가 앉아 담배를 피우고, 큰 덩치로 잔뜩 쪼그려 일하느라 고단한 기색의 주필 씨와 한결같은 마음으로 지지를 아끼지 않는 란희가 마당에서 한숨 돌리던 순간은 사진처럼 내 마음에 남아있다. 아껴 두어야 할 것들, 아껴 두어야 할 말들이 있었던가. 우리가 여기에 함께하는 동안을 아낌없이 아낀다.
그렇게 심었던 토마토는 어느새 엄지손톱만한 열매를 달기 시작했다. “토마토 꽃과 맺힌 토마토가 마당에 심었던 꽃보다 더 예쁘다.”던 대장농부의 말이 생각난다. 그 말을 듣고 ‘에이, 그럴 리가.’ 싶었는데, 이제 나도 조그맣고 푸른 열매가 예쁘게 보인다. 꽃들이 앞다투어 피어나고 벌들이 분주하게 날아드니, 곧 푸른 열매들이 조랑조랑 맺힐 것이다.
봄비 오는 날, 마당을 가로지르는 쌈채밭을 만들었다. 꽃밭이 자리잡아야 할 자리에 꽃밭 아닌 꽃밭 같은 텃밭을 한 이랑 일구었다. 봄비가 솔솔 내려 겨우내 얼었던 땅이 녹아내리고 푸르른 기세를 돋운다. 삽으로 갈아엎고 쇠스랑으로 부수고 고루 펴면, 작은 쌈채밭 한 이랑이 생겨난다. 손으로 굳은 흙을 부수고 어루만지면, 흙은 씨앗을 품어 길러내는 한없이 자애로운 어머니 같아진다. 씨앗을 그 품에 흩어 뿌리면 그 뿐…. 그 흙의 자애로운 결실을 먹는 사람으로서 그 품성을 닮아가야 함을 생각했다.
호미를 들고 봄비를 맞으며 마당 한 바퀴를 돌아 냉이 한 소쿠리를 캤다. 봄이니까, 농부니까, 이렇게 맛으로 향으로 봄 멋을 내본다. 올해도 이렇게 시작이다. 마음을 지금 여기에 두고 최선을 다하는 그 일, 농사가 시작되었다.
빨아도 깨끗해지지 않고 더러워져도 더럽지 않은 흙이 묻어나는 작업복을 빨래하며, 불볕 같은 열기에 뚝뚝 굵은 땀을 흘리며 올해도 그렇게 지내게 될 날들을 아끼며 살아야겠다.


봄날, 새로 돋아난 새싹처럼

그날 이후 낯선 것이 항상 두렵지만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글. 김민지

대학교를 졸업하고 나니 하루하루가 스쳐 지나가는 날의 일부라고 여겨지는 요즘이지만, 이제 막 새 학기를 시작하는 것처럼 보이는 학생들의 설렘 가득한 모습을 목격할 때면 지난날 부끄러움이 떠오를 때가 있다.
나의 생활 반경은 집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다닥다닥 붙어사는 서울 생활이 대부분 그러하듯, 학교와 친구들은 늘 가까운 곳에 있었고 놀러 다녀봤자 서울 밖을 벗어나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런 나에게 20년 동안 살던 도시를 벗어난다는 것은 대단한 도전이었다. 내가 고른 학교였으며 한 번쯤 가족의 품을 벗어나 혼자 생활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결정한 일이었지만, 낯선 동네에서 가족 없이 생활해야 한다는 스트레스는 열병을 앓게 할 정도였다.
기숙사 입사 당일. 온 가족이 나서서 몇 박스나 되는 짐을 옮기고 나니 거의 저녁이 되었다. 2월의 해는 가족들에게 ‘어서 돌아가야 된다.’며 닦달이라도 하듯 빠르게 지고 있었다. 그런 풍경이 내 마음을 울적하게 할 즈음, 평소 나와 서먹한 관계였던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무언가 건네는 모습을 보았다. 하얀 봉투. 나는 그것이 나를 위한 것임을 눈치챘다. 그 순간 울컥하고 눈물이 치솟았다. 기침을 하는 척 부산스럽게 움직이며 시선은 발끝에 두었다. 부끄러움과 고마움이 한데 뒤엉킨 마음을 갈무리하려고 노력하는 나에게 봉투가 전달되었다. 그리고 잘 지내라는 어머니의 말에 “응.” 하며 짧게 대답했다. 하지만 눈물 젖은 말투는 감출 수 없었다. 가족은 내 일그러진 표정을 보고 놀려댔지만 곧 걱정스러워 했다. 가족을 태우고 떠나는 차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꽤 오랫동안 울었다. 그 순간에도 창피함이 먼저여서 기숙사 건물 구석에서 눈물을 닦았다.
가족들을 보냈지만 시련은 끝이 아니었다. 밥을 먹는 문제가 남아있었다. 나는 그때까지 혼자 밖에서 밥을 먹은 적이 없었다. 아직 친구를 사귀지 못해 밥을 혼자 먹어야 했지만, 차마 그럴 용기가 나지 않았다. 밥을 혼자 먹는 것이 무서워서 이틀을 굶었다. 그러나 배고픔은 결국 두려움을 극복하게 했다.
비가 오는 둥 마는 둥 내리는 저녁, 식당으로 들어갔다. 곳곳에서 혼자 밥을 먹는 사람들을 봤을 때 느꼈던 허탈감은 지금도 생생하다. 밥을 먹으면서 헛웃음이 나왔다. 이 쉬운 것을 그렇게 머리 싸매고 고민한 이틀간의 나 자신이 너무 한심했다.
식사를 마치고 식당을 나왔을 때, 비는 내렸지만 춥지는 않았다. 혈기가 돌아서일 뿐만 아니라 두려움을 극복했다는 사실에 기뻤기 때문이다. 내가 그동안 얼마나 좁은 생각 안에 갇혀 살았는지 알았다. 그리고 그날 이후 낯선 것이 항상 두렵지만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부슬비는 새로운 봄의 땅을 굳게 했고, 순진하게만 살았던 내 인생에 새로운 시작을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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