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은 누구?

글. 이주경

초등학교 1학년이었을 때, 반 아이들 대부분이 교회에 다녔다. 그런데 나는 원불교에 다니다보니, 아이들과 종교적인 문제로 다툼이 많았다. 그러던 어느 날 ‘왕’ 이야기에 대한 다툼이 일어났다. 아마 그 당시 가장 크게 일어난 종교 다툼 같다.
그 ‘왕’ 다툼은 이렇게 시작된다.
그때는 ‘그리스 로마 신화’라는 만화가 꽤 인기가 있었다. ‘그리스 로마 신화’라면 당연히 그리스의 신들이 나온다. 그 그리스 신들의 ‘왕’ 이 제우스인데, 어떤 남자애가 그 책을 읽고는 “하느님이랑 제우스랑 싸우면 당연히 하느님이 이기겠지? 하느님은 모든 신들의 왕이니까.”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무슨 소리야. 그리스 신들의 왕은 제우스고, 천사들의 왕은 하느님이지.”라고 말했다. 그 순간, 모든 아이들의 시선이 나에게로 쏠렸다.
아이들은 계속 나한테 “모든 신들의 왕이 하느님이야!”라고 말하며 나의 주장을 꺾으려고 했다. 하지만 나는 나대로 아이들의 주장을 꺾고 싶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는 수없이 많은 종교들이 있는데 하느님이 모든 신들의 왕이라면, 모든 종교의 왕이라는 소리가 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제우스는 그리스 신화의 왕이고, 하느님은 교회의 왕이고, 부처님은 불교의 왕이고, 대종사님은 원불교의 왕이지, 하느님이 모든 왕인 건 아니야!”라고 말했다. 그러나 애들은 막무가내로 우겨댔고, 결국 선생님께서 이 소동을 말려주셨다. 그 후로도 아이들은 하느님이 왕이라고 우겨댔다. 나는 사람 수에 밀려서 어떻게 해도 아이들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나 법회를 보러 교당에 갔다. 나는 아이들의 생각을 꺾지 못했다는 것과 교회에 다니는 아이들에게 졌다는 마음에 눈물이 나와서, 법회가 끝난 후 혼자 법당에 앉아 울었다. 지금 생각하면 왜 울었는지 잘 모르겠지만, 아마도 교회 다니는 애들을 이기지 못했다는 게 너무 슬프고 대종사님께 죄송해서 그랬던 것 같다.
초등학교 6학년이 된 나에게는 그 일이 벌써 옛날 일이 되었고, 지금은 종교적인 문제로 아이들과 싸우지 않는다. 요즘엔 오히려 아이들이 원불교에 관심을 갖는다.
그러나 그때 이기지 못한 것은 아직까지 너무 후회된다. 지금이라면 당당히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적어도 나한테만큼은 ‘소태산 대종사님이 제일 센 왕’이라고 말이다.

기적은 가까이

글. 박경례

젊어서부터 일찍 부동산을 접하다보니 경제적으로 그리 어렵지 않게 살았다. 그러던 중 남편이 사업을 하다가 부도를 낸 적이 있다. 그가 나를 속인 것에 대한 원망과 미움, 그리고 경제적인 절망감 때문에 무척 힘들었다. 남편의 잘못된 선택으로 우리 가족은 벼랑 끝에 설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나에게는 사랑스러운 두 딸과 아들이 있다. 내가 이 세상에서 살아 움직이며 행복감을 느낄 수 있게 해주는 존재들이다. 그래서 나는 그 아이들이 경제적인 어려움에 내몰리지 않도록 정말 열심히 일을 했다. 부동산 계약을 한 개라도 더 하기 위해 무던히 애를 썼고, 결국 아이들을 우려하던 어려움에서 내가 원하던 대로 건져낼 수 있었다. 어떤 때는 고객의 마음이 변할까봐 밤 열두 시경까지 기다렸다 사인을 받아 오기도 했고, 어떤 때는 새벽 다섯 시에 계약을 진행한 적도 있다. 그런 덕분에 아이들은 잘 커줬고 엄마를 무척 아끼며 존경한다.
그렇지만 정작 나는 내 몸을 돌보지 못했고, 많이 혹사시켰다. 그렇게 무리하게 몸을 아끼지 않은 탓에 삼 년 전 유방암 3기 선고를 받았고, 방사선 치료를 받고자 용인에서 삼성의료원까지 가기 위해 매일 6시에 집을 나섰다. 그리곤 곧바로 병원에서 사무실로 직행했었다. 당시 몸무게가 8kg 정도 빠졌다.
그러나 돈을 벌면서 규모가 커진 가계를 꾸려나가기 위해서는 부동산 운영을 그만둘 수 없었다. 수입이 많아진만큼 지출의 규모가 커져 있었고, 남편의 능력만으로는 해결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오전 여섯 시에 출발해서 방사선 치료를 받고 사무실로 출근하기를 삼 개월 정도 계속했다. 그리고 일 년 후, 몸에 또 이상이 생겨서 위의 종양을 떼어냈다. 그렇게 내 몸을 보살피지 못하면서 삶에 지쳐갔고 무언가 돌파구를 찾고 싶었다.
돈을 벌면서 해결책을 찾다가, 우연히 <이젠 책쓰기가 답이다>라는 책을 읽게 되었다. 책을 읽고 일일특강을 들으면서 인생이 바뀌었다. 선배 작가님들의 사례를 들으면 심장이 울렸다. 가슴이 너무 쿵쾅거려서 글쓰는 것이 정말 답이라는 것을 확신했다. 누가 시켜서 카페에서 글을 쓰는 것이 절대 아니었다. 글을 쓰면서 스스로를 위로하고 위로받기 위함이었다. 그렇게 글을 쓰면서 다른 사람들과도 서로 아픈 마음을 위로해주고 감사일기로 동기부여를 주고받곤 한다. 
6월 정도면 나의 글이 책 한 권으로 나올 예정이다.
요즘 하루하루가 행복하다. 글을 쓰면서 새삼 새로운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되었다. 기적을 멀리서 찾기보다는 내 삶에서 찾아가고 있는 중이다.

증조할머니의 손길 

글. 김수민

믿기지 않았다. 증조할머니가 편찮으시다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시골로 향하는 길, 그 짧은 시간 만에 증조할머니는 병을 이기지 못하고 운명하셨다.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마치 생각의 시간이 정지한 것만 같았다.
증조할머니는 일찍이 남편을 여의고 혼자서 온갖 힘든 일을 마다하지 않으며 집안을 꾸려 나갔던 분이다. 손주와 증손주 모두를 직접 그 손으로 먹이고 입혔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근면한 분이었다. 증조할머니께서는 맞벌이하는 부모님을 대신해 어린 오빠와 나를 돌봐주셨다. 증조할머니가 없었다면 가정이 이렇게 이루어질 수 있었을까. 증조할머니는 우리 가족의 가장 애틋한 존재였다. 언제나 사랑이 가득한 증조할머니의 따뜻하고 쪼글쪼글한 손이 그렇게 좋을 수 없었다.
가족들은 증조할머니가 200살까지 살 거라며 우스갯소리를 하곤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가 철이 들기도 전에 증조할머니는 이미 90세에 가까운 연세였다. 지긋한 연세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건강하고 총명한 증조할머니의 모습에 우리는 그 우스갯소리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어머니께서 말해주신 일화가 생각이 난다. 아주 어릴 적 오빠와 내가 갓난아기 때 증조할머니께서는 우리를 돌봐주셨다. 증조할머니가 식사를 할 때면 걷지도 못하는 아기였던 우리는 증조할머니가 흘리던 밥알을 주워 먹었다. 그 밥알을 보물찾기 놀이하듯 주워 먹던 우리는 정말 말썽꾸러기였다. 연세가 연세인지라 힘에 부치던 증조할머니께서 꾸벅꾸벅 졸면 우리의 말썽은 시작되었다. 케첩과 마요네즈를 들고 집안에 그림을 그린다든지 하는 온갖 일들을 저질렀다. 얼마나 증조할머니를 힘들게 했던지, 증조할머니의 구부러진 허리는 우리 탓이 분명했다.
그렇게 철이 들기 전부터 증조할머니는 우리와 동고동락하며 사랑을 가르쳐주셨다. 한 성질 하는 오빠도 증조할머니 앞에서는 순한 양과 다름이 없었다. 사랑으로 가득 차 베풀어주기만 하시던 우리 증조할머니. 여행을 잘 가지 않던 가족들은 명절 때마다 증조할머니를 위한 여행계획을 짜곤 했다. 받은 사랑을 다 보답하기 위해 무던히 애를 썼지만, 시간은 기다려주지 않았다.
장례식이 시작되고 많은 사람이 다녀갔다. 저마다 증조할머니를 추억하며 이야기했다. 하나같이 증조할머니가 얼마나 됨됨이가 좋고 어진 사람이었는지를 말했다. 복을 뿌리고 다니던 분이었다고 기리었다. 절차가 차근차근 진행되면서 입관식이 시작됐다. 드디어 염원하던 증조할머니의 얼굴을 볼 수가 있었다. 마지막으로 그 손을 잡아보았다. 증조할머니는 생전 안 하던 화장을 한 상태로 고운 모습으로 누워 계셨다. 장례식이 마무리되고 무덤 앞 비석에 증조할머니 이름 석 자가 새겨졌다.
여전히 증조할머니의 사랑과 추억이 가슴에 남아있다. 많은 사람에게 사랑과 은혜를 알려주신 증조할머니가 오늘도 보고 싶다.

돌아오는 학생들

글. 김학선

“혹시 누구 ○○이와 연락되는 사람 있니? 요즘 어찌 지내는지 근황 좀 알려줄래?”
○○이 소식이 유난히 궁금해지는 요즈음이다. 그럴 땐 확인해 보는 것이 상책이다. 이유 없이 어떤 사람이 궁금해지지는 않는다는 게 살면서 얻게 된 지혜이다.
“○○이 오빠요? 저희가 가끔 보는데요.” “그래? 어떻게 지내는 것 같아?” “정식직원이 된다는 거 같았어요.” “힘들지만 월급이 적지 않으니까요. 지난 번에 저희 밥도 사주셨어요.”
아직 학교 때 인연들과 만나고 있다는 이야기는 위안이 된다. 하지만 정식직원이 된다는 소식은 앞으로 점점 돌아오기 어려울 수도 있다는 말처럼 들린다. 다시 온다면 지금이라는 생각이 든다. 결정되기 전에 빨리 연락을 해서 점검을 해볼 일이다.
“○○이 이제는 학교 돌아와서 졸업하고 면허증 따고 그랬으면 싶은데, 한번 만나서 이야기 좀 해보면 어떨까?” “안 그래도 지난번에 복학이 복잡한지 얼핏 누군가한테 묻더라는 것 같았어요.” “그래? 그럼 빨리 움직여보면 좋겠구나. 나도 연락을 하겠지만.”
나는 메시지를 보낸다. ‘○○아. 시간될 때 한번 보자꾸나. 내가 긴히 할 이야기가 있는데.’ ‘교수님, 안녕하세요. 제가 다음 주 수요일에 오프(off)입니다. 그날 찾아뵐까요?’ 이렇게 반가울 수가. 호출에 응하는 건 일단은 좋은 징조이다.
“교수님, 그동안 안녕하셨어요?” 사회생활을 해서 그런가 훨씬 더 어른스러워진 모습의 ○○이가 친구 두 명과 함께 감자탕집에 나타났다. 축구동아리 지도교수인 K교수가 함께 앉아있으니 더 신난 모습으로 그쪽에도 인사를 한다.
“그래 어찌 지내고 있니? “뭐, 그런대로요.” “애들이 그러던데 정식직원 제의를 받았다면서? 그러면 좋은 거 아닌가?” “아, 네, 교수님. 그건 그래요.” “능력이 있다는 것이니 반가워해야 할 일이기는 한데 나는 어째 두 마음이더라. 정식직원이 된다면 복학하는 건 더 어려워지는 게 아닐까 싶어서.” 슬쩍 문제를 꺼내본다.
“안 그래도 요즘 그 문제로 고민을 많이 했어요, 교수님.” 딱 부러지게 안 돌아오겠노라고 말했던 학생이 고민을 했다니 이건 참으로 희망적인 이야기다. 모두가 젓가락질을 멈추고 ○○이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멋진 반응이고 신나는 일이다. 어쩌면 모두가 같은 마음으로 이 자리에 왔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나나 K교수나, ○○이의 친구들이나.
“저….” 쑥스러워하는 표정이다. 그렇다면 답이 무언지 알겠다. 친구 두 명이 젓가락으로 테이블을 두드린다. 친구가 돌아온다 하니 엄청 신나는가보다.
개학이 다가올 무렵 복학신청이 잘 되었다는 전화를 받았다. 그리고 강의실 맨 뒷자리에 앉아있는 ○○이를 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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