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리사랑 | 이이원

이야기 하나.
원로원과 수도원은 퇴임하신 교단의 어른들이 노년 수양을 하는 곳이다. 근엄하고 어려울 것 같지만, 선후진이 함께 만드는 마음 꽃이 화사한 곳이다.
어느 날 향산 안이정 선진이 “커피 한 잔 하시게.”라며 법산 이백철 원로교무를 방으로 불렀다. 두 분은 유일학림 1, 2기생으로 1년 선후배 사이인데, 어쩌면 커피는 핑계이고 선후진이 법담을 나누고 싶은 마음 때문일지 모른다. 향산 선진이 작은 보자기 하나를 내놓았다. 소박한 개량한복 한 벌이었다.
“자네에게 잘 어울릴 것 같아 준비했네. 그동안 한 번도 챙기지 못해 미안해서 준비한 것이니 ‘꼭’ 입어주게. 나도 입어보니 편하고 좋아.”
법산 원로는 옷이 헤지면 꿰매고 꿰매, 실올이 나풀거리거나 천이 삭아도 아무런 불편이 없는 분이었다. 그래서 ‘꼭 입어 달라’고 당부를 하였는지 모른다. 하지만 결국 법산 원로는 이 옷을 입지 않은 채 고이 넣어두고 가끔씩 꺼내보며 ‘선배님께서 주신 사랑의 증표’로 삼았다. 그리고 얼마 후 이 옷의 임자는 또 다른 후진이 되었다. 간직하는 동안 사랑을 느끼고 그 사랑을 전할 또 다른 누군가를 찾는 일을 하였으니, 은혜가 흐르고 또 흐르게 함이 아닐까. 그 한복, 지금 누가 입고 있을까?
이야기 둘.
교당 설립의 역사가 오래된 교당엔 교당 살림을 하기 위한 논밭(유지답:維持畓)이 있는 경우가 많다. 교도들 본인의 논밭보다 먼저, 함께 모여 모를 심고 거두는 우선순위의 논밭이다. 좌포교당에도 유지답이 있다. 온타원 이성로 원로교무가 근무할 때의 일이다. 교당 유지답의 일이 먼저이긴 한데, 별 수 없는 일 한 가지가 있었다. 그건 바로 논 갈기. 소가 있는 집이 아니면 순서를 정해 품앗이로 일을 할 수밖에 없었는데, 모든 사람들이 자기 논을 먼저 갈려고 하는 중에 교무가 교당 논을 먼저 갈아달라고 할 수 없었다. 소를 가지고 있던 이철규 교도가 마을 논을 순서로 갈고 있었는데, 교당 논을 가는 일이 마음에 걸렸음에도 마음대로 순서를 바꾸기는 어려웠다. 보타원 양보훈 교도가 나설 차례였다.
“교당 논을 뒤로 미루면 되겠는가? 무슨 짬을 내서라도 교당 논을 먼저 갈아주게!” 그렇지 않아도 마음에 걸리던 차에 옆에서 채근까지 해주니, 몇 날 며칠 논갈이에 피곤한 것도 잊고 더 이른 새벽에 교당 논을 먼저 갈았다. 불평하는 사람이 없진 않았지만, 논을 가는 사람이 새벽안개 속에서 “이랴 이랴!”를 외치며 환한 웃음으로 “이 논은 개인 논이 아니라 우리 모두를 위한 공중 논이잖아요. 공중 논!”이라고 말을 하니 불평하던 사람들도 머쓱해질 수밖에.
지공무사(至公無私)까지는 어렵다 해도 선공후사(先公後私)는 이렇게 웃음으로 마음 챙겨 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나와 내 가족만을 위하려는 욕심의 논밭을 갈아서 온 세상을 위한 봉공의 논밭으로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이랴 이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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