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실은 쉬는 시간에!

얼마나 힘들었을까 싶다. 아마 세상이 노랗게 되었을 거다.
뭐, 결국에는 참지 못하고 그 난리를 쳤지만.

글. 백지영

“선생님. 얘 똥 쌌대요.”
삽시간에 교실이 술렁거렸다. 난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뭐라구? 교실에서?” 황당하기 그지없던 그 일이 벌어진 건, 내가 초등학교 1학년 때의 일이다.
학교 화장실에서 큰일만 봐도 놀림을 받았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수업 중에 한 친구가 참지 못하고 거사를 치른 것이다. 친구는 울상이었고, 옆에 애들은 난리가 났다. 담임선생님은 부리나케 그 친구의 엄마에게 연락을 하셨다. 잠시 후 친구의 엄마는 옷가지를 싸들고 학교로 오셨고, 친구를 학교 건물 뒤편에 있는 수돗가에서 홀라당 벗기고 씻기셨다. 그때 난 다른 친구와 그 모습을 보면서 “다음주부터 쟤하고 짝꿍인데 어찌 하냐.”고 울상을 지었다. 하필 나하고 짝꿍이 되기 전에 그런 일을 벌였다니…. 그 상황이 너무 싫었다. 
지금이야 ‘그리 급했다면 선생님께 말씀 드리고 갔다 왔으면 되지 않았냐?’란 소리를 할 수 있겠지만, 초등학교 1학년 학생에겐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강력했던 담임선생님의 한마디가 있었다.
“화장실은 꼭 쉬는 시간에 다녀와야 해요.” 안 그래도 학교라는 곳이 뭔지도 모르는 어리바리한 상황 아래서, 담임선생님의 그 한마디는 뇌리에 박혔다. ‘그래, 화장실은 쉬는 시간에 가야해. 수업시간엔 절대 안 되는 거야.’
아마 큰일을 친 그 친구 역시 나와 같은 생각이었을 것이다. 선생님의 말씀이 있었기에 끙끙거리며 쉬는 시간만 기다렸을 것이다. 얼마나 힘들었을까 싶다. 아마 세상이 노랗게 되었을 거다. 뭐, 결국에는 참지 못하고 그 난리를 쳤지만. 
그래도 다행인 건 그 사건 이후에 그 누구도 그 친구를 약올리거나 괴롭힌 적이 없었다는 거다. 유치원생 티가 풀풀 나는 시점이라서 그랬는지, 아이들은 그 사건을 금세 잊어 버렸다. 나 또한 한 주가 지나 그 친구와 짝꿍이 되었을 때 별다른 말을 했던 기억이 없다.
그 사건이 있은 후 담임 선생님께선 화장실에 대한 설명을 다시 해주셨다.
“수업 시간에 누구나 화장실을 들락거리면 수업 진행이 어려워요. 하지만, 정 못 참겠으면 선생님한테 얘기하고 가도록 해요. 알겠죠?” 하지만 수업 중에 화장실을 가겠다고 얘기한 아이들은 여전히 없었다. 아마도 ‘정말 못 참겠으면’이라는 전제가 달렸기 때문에 그랬으리라. 그러면서 나와 친구들은 은연중에 지켜야 할 게 무엇인지, 그리고 어려울 땐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배우게 되었다.
교실은 수업만 하는 곳이 아니다. 학교생활을 통해 지켜야 할 질서를 배우고, 그 속에서 유연함을 찾으면서 사회에 나가기 전 준비운동을 할 수 있는 공간으로 확장되는 것이다. 그 확장된 공간에서 함께 걷고, 모르는 걸 알려주는 것은 선생님과 친구들이다.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우리 꼬마들이 교실에서 많은 준비운동을 할 수 있기를 바라본다. 물론… 나 같은 사건을 겪길 원하는 건 아니고.


조마조마 강의실 탈출기

우리는 간이 작아서 교수님 눈치만 보고 강의 전반부가
끝날 때까지 아무도 나가지 못했다.

글. 이소영

2016년, 나는 고등학교 3년 동안 쌓아온 대학 로망을 품고 새내기로 캠퍼스에 들어섰다. 그해 5월은 정신없는 각종 환영회와 술자리가 폭풍처럼 지나가고 중간고사도 지나 슬슬 대학 생활에 적응할 무렵이었다. 상상해온 대학과 실제가 다르다는 것을 느끼며 교수님의 지루한 강의와 현실에 익숙해졌다. 거기에 따뜻한 봄 날씨까지 더해지니 정신은 강의실 멀리로 도망가기 일쑤였다. 특히 지루하고 재미없는 ‘물리학 및 실험Ⅰ’은 강의 이름만 들어도 힘이 빠졌다. 심지어 수업시간마저도 오후 3시, 가장 졸리기 쉬운 시간에 있었다.
그 교수님은 우리가 휴대전화 만지는 것을 굉장히 싫어했다. 그런데 자는 것, 도망가는 것 등은 허용하는 아주 독특한 강령을 갖고 있었다. 많은 학생들이 학기 초부터 도망을 갔고, 학기를 적응할 무렵에는 거의 반 이상이 도망을 간 적도 있었다. 나는 그 수업을 같은 과 동기 친구들 여러 명과 함께 들었는데, 우리는 모두 모범생이라서 아무도 도망가본 적이 없었다. 수업 중 가장 큰 일탈은 강의실 뒷자리 구석에서 몰래 엎드려서 휴대전화를 만지는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그날은 유독 수업이 듣기 싫고 강의실 밖으로 나가고 싶은 날이었다. 수업 시작 5분 전부터 나는 동기들을 꾀기 시작했다. “오늘은 강의 자료도 출력 못 해왔으니까 출석만 하고 나가자.” 하지만 한 명은 이미 다운 받아온 드라마를 볼 계획을 세워놔서 가지 않겠다고 했다. 또 한 명은 피곤해서 자겠다고 했다. 다른 한 명은 이미 앞자리에 앉아서 공부할 준비를 끝냈다. 남은 한 명은 아무도 가지 않으니까 자리를 지키겠다고 했다. 하지만 그날따라 강의실에 갇혀있기 싫었던 나는 수업 시작 뒤 열 명쯤 강의실을 빠져나갈 때까지 포기하지 않고 계속 친구들을 유혹했다. “나가서 맛있는 거 먹자! 날씨가 너무 좋다!” 끊임없는 공략에 친구들은 동해서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우리는 간이 작아서 교수님 눈치만 보고 강의 전반부가 끝날 때까지 아무도 나가지 못했다.
‘이대로 끝까지 무의미하게 강의실 공간을 차지하고 있어야 하나.’ 싶어서 한숨이 나오려던 찰나였다. 수업이 절반쯤 지났을 때, 교수님이 “10분만 쉬자.”며 퇴장했다. 교수님이 우리의 내적 기도를 들어준 걸까! 우리는 지금이 기회라는 생각으로 짐을 후다닥 챙겨 강의실에서 나왔다. 그런데 엘리베이터 앞에 교수님이 서 계신 것이 아닌가! 평소엔 열심히 수업을 듣는 우리를 교수님이 알아보실까 싶어 가슴을 졸이며 복도에 숨어 교수님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자 교수님이 사라졌고, 우리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무사히 탈출했다.
나름 힘들게 수업을 빠졌지만 정작 우리는 특별한 일을 하지는 않았다. 간단하게 떡볶이를 사 먹고 다음 수업 강의실로 향했을 뿐.
별 것 아닌 사소한 일이지만 조마조마하게 강의실을 나섰던 소소한 추억은 지루한 대학생활에 작은 즐거움을 가져다주었다.


시간을 달리는 소녀

추억의 장소는 현재의 나에게 새로운 의미와
새로운 해답을 줄 수도 있다.

글. 오윤경

2017년 2월 중학교를 졸업한지 십 년이 다 되는 시점, 근처에서 약속이 있어 오랜만에 모교에 가게 되었다. 천진스럽고 티끌 없이 깨끗했던 중학교 시절 나를 마주하려니, 왠지 묘한 기분이 들었다. ‘현재 나는 그때에 비해 어떤 모습일까? 그때의 나와 비교해보면 차이가 더 극명해지겠지.’라는 생각을 하면 괜시리 씁쓸해지기도 했지만, 추억을 마주할 수 있다는 기쁨 또한 컸다.
학교의 정문, 교실, 급식실, 체육관…. 추억이 담긴 장소를 가는 길을 떠올릴 때마다 중학교 시절 추억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눈을 감고 학창시절을 상상만으로도 달콤하고 미소가 지어졌지만, 추억이 담긴 장소를 직접 가보는 것에는 비할 수 없을 것이다. 학교에 가까워질수록 직접 추억을 마주할 수 있다는 기쁨이 발끝으로 전해졌다. 학교로 향하는 나의 발걸음은 지난 십 년 전으로 시간을 되돌리는 느낌을 주었다. 
장소는 사람의 모든 의식과 경험으로 재구성된다. 장소에 성격이 부여되는 순간, 장소는 그 자체로 특성을 가진다. 장소를 통해서 나의 과거와 현재를 연결시킬 수 있다. 특히 학교라는 장소는 그곳에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느냐에 따라 각자에게 다양한 추억으로 기억된다. 향수가 담긴 장소에서 십 년 전의 나와 지금의 나를 비교해보고 나에 대한 생각을 정리해보려는 의도로, 그렇게 예정에는 없던 학교 방문이 시작되었다.
학교 앞 오르막길을 오르는 순간, 교복을 입고 지각할까봐 뛰어가는 나의 모습을 보았다. 오르막길을 올라 정문 앞에 다다르자, 친구들과 모여서 계단을 오르고 교실로 빠르게 향하는 나의 모습이 보인다. 복도에서 교실로 가는 도중, 그 길에서 풍기는 특유의 냄새와 공기의 흐름은 내 코를 자극시켰고, 복도를 가로지르던 추억에 흠뻑 젖을 수 있게 도와준다. 나도 모르게 빨라지는 급식실을 향한 발걸음에서, 종소리가 울리자마자 아이들과 함께 급식실로 뛰어가는 나를 또 발견했다. 5시 하교시간. 하교 종이 울리자마자 친구들과 가방을 챙기면서 뭘 먹을지 고민하는 십 년 전 나의 모습을 발견하고 있는 찰나, 거울 속에 비치는 나는 그 시절보다는 성숙한 모습을 띠고 있다.
취업을 준비하는, ‘미래의 나’를 위해 준비하는 모든 이들은, 과거보다 미래를 바라보고 미래를 위해서 노력한다. 그러다 멈추고 싶을 때, 나를 돌아보기 위한 잠깐의 시간을 갖게 될 때, 학창시절의 추억이 담긴 학교를 찾아가보는 건 어떨까. 꼭 학교가 아니라도 예전의 나를 볼 수 있는 특정한 공간을 찾아보는 것도 도움이 될 것 같다.
그 장소가 나에게 주는 의미를 정확하게 정의할 수는 없다. 누군가에게는 고통스러운 시절을 떠올리게 해서 힘이 들 수도 있고, 어떤 좋았던 기억만 되살아나 힘이 될 수도 있다. 거기에 더해 추억의 장소는 현재의 나에게 새로운 의미와 새로운 해답을 줄 수도 있다. ‘현재의 나’의 시선으로 바라본 과거는, 시간을 뛰어넘는 감동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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