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개벽을 위한 ‘준비’시대의 개막
- 3.1독립운동과 소태산의 변산 입산 -

글. 박윤철

원불교 100년사 가운데 변산시대는 1919년(원기 4) 늦은 가을부터 1924년(원기 9) 봄까지 불과 5년 정도의 짧은 기간에 지나지 않으나 그 역사적 의미는 중차대하다. 변산시대는 한마디로 원불교가 비공식적 비밀결사 단계의 영산시대(1891~1919)에서 불법연구회(佛法硏究會)라는 이름의 공식적 종교단체 결성을 통한 새로운 종교운동을 시작하는 익산시대(1924~현재)를 위한 대전환(大轉換)과 대준비(大準備)의 시기였다고 요약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 변산시대는 전남 영광을 무대로 한 초기 종교운동을 총결산하고 전북 익산을 무대로 한 새로운 차원의 종교운동, 곧 새 회상(會上) 창립에 필요한 제도적 기반 조성에 몰두했던 시대였다. 영산시대에서 익산시대로의 ‘대전환’ 또는 ‘대준비’ 시대의 성격을 지닌 변산시대에 대한 총체적 이해는, 바로 원불교가 ‘불법연구회’ 라는 공식적 종교단체로서 일제의 식민지배 아래임에도 불구하고 공개적이며 합법적인 활동을 개시하는 익산시대의 역사와 그 의의를 이해하는 데 직결되는 문제이다.
우선 먼저, 변산시대의 무대인 변산에 대한 역사적 고찰을 해보도록 하자. 변산이 역사적으로 큰 주목을 받은 것은 통일신라 때였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통일신라시대 법상종(法相宗)의 개조 진표(眞表) 율사는 변산반도 안의 ‘부사의방장’(不思議方丈)에 수도처를 정하고 참선 수행을 통해 득도했다고 전한다. 그리하여 진표 율사 수도 이래로 변산은 이상향 또는 영지(靈地) 등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후 변산은 선지자들이 다투어 찾아 들었는데, 특히 이상향 건설을 꿈꾸는 도인들과 새 세상을 이루려는 혁세가(革世家)들이 다투어 몰려들었다. 대표적으로 조선후기 및 한말개화기에는 동학당, 서학당, 영학당, 활빈당 등 후천개벽(後天開闢)을 소망하는 민초들이 몰려들어 저마다의 꿈과 소망을 펼치고자 하는 변혁의 땅으로도 역할을 하였다.
또한 변산은 새로운 정신운동을 펼치고자 했던 사상가와 종교가들도 다수 다녀간 곳으로
알려져 있다. 예를 들면, 1653년부터 18년간이나 부안 우반동에 칩거하면서 실학(實學)사상을 집대성한 <반계수록>을 집필했던 반계 유형원(柳馨遠, 1622~1673) 선생을 비롯하여, 실상사 월명암 주지로 있으면서 반농반선(半農半禪)의 기치를 내걸고 근대 불교개혁운동의 선구자 중 한 분으로 우뚝 섰던 백학명(白鶴鳴, 1867~1929) 스님이 바로 변산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대표적인 사상가이자 종교가이다. 원불교 단전주(丹田住) 선법의 원형을 찾아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등장하는 이옥포(李玉圃)라는 ‘이름 없는’ 도인도 역시 부안 변산에 근거를 두었던 분이다. 
또 한 가지, 변산 땅이 지닌 위대한 가능성을 시사하는 유명한 에피소드 하나가 전해져 온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던 1891년 음력 7월 어느 날, 관변 측의 감시망을 뚫고 동학 제 2대 교주 해월 최시형(海月 崔時亨, 1827~1898) 선생이 부안에 순회포덕(巡廻布德) 차 온 적이 있었다. 옹정리(瓮井里; 현재의 부안읍 옹중리) 김영조(金永祚)라는 제자의 집에 도착해 하룻밤을 머문 해월은 “부안에서 꽃이 피어 부안에서 결실을 보리라(花開於扶安 結實於扶安).”는 말씀을 남겼다고 한다.(부안출신 동학대접주 <김낙철 일기> 참조) 한민족의 역사에서 부안이야말로 아름다운 꽃을 피워 큰 결실을 이룰  땅이 될 것이라는 예언을 남긴 것이다. 
3.1독립운동이 한창일 무렵, 소태산이 변산 입산을 결심하게 되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변산의 역사적 전통 속에 내재된 사상적, 정신적, 종교적 차원의 새로운 가능성에 주목했기 때문이라고 해도 지나친 억측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이 같은 깊고도 깊은 유래를 간직한 변산으로 젊은 소태산이 입산을 단행하게 된 직접적 배경은 과연 어디에 있을까? 교단 초기 상황을 기록하고 있는 <불법연구회창건사>에는 ‘중인의 이목을 피하기 위함’이라는 내용이 입산 배경 중 하나로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당시 시국과 관련을 암시하는 중요한 대목이다. 즉 1919년 3월 1일, 일제의 식민지배에 허덕이던 조선 땅 전역에서 자주독립을 요구하는 만세시위와의 관련을 시사하는 표현인 것이다.
널리 알려져 있듯이, 3.1독립운동 당시 전국을 뒤흔든 만세시위는 4월 말까지 무려 1,542회에 걸쳐 이루어졌고, 203만3천 명 이상이 참가하여, 7천5백 명 이상이 사망하고 1만6천여 명이 부상하였으며, 일제의 군경에 체포되거나 검거된 사람만도 4만7천여 명에 이른 전 민족적 차원의 대사건이었다.(백암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 참조) 소태산과 그의 아홉 제자가 기도결사운동에 전념하고 있던 영광에서도 만세시위는 여지없이 전개되고 있었다. 농촌지역인 영광의 경우, 4월 중순부터 4월 말에 걸쳐 면단위의 민중들이 장날 등을 이용하여 영광 읍내로 진출해 격렬한 만세시위운동을 전개하였고, 그에 따라 부상자가 속출했다. 이런 급박한 정세 속에서 당연히 간척지개척운동에 성공하고, 그 여세를 몰아 다시 기도결사운동에 전념하고 있는 소태산과 그 제자들에게 일제(日帝) 탄압의 손길이 미치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급박한 정세 전개 속에서 영광지역을 중심으로 한 소태산의 새로운 종교운동은 3.1독립운동을 전후하여 커다란 위기에 봉착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우선 그 첫 번째 위기는 당시 식민통치 권력인 조선총독부로부터 왔다. 3.1독립운동을 전후하여 소태산 대종사는 영광 경찰서에 연행되어 며칠에 걸친 조사와 심문을 당했다. 이로 인해 당연히 대종사를 중심으로 결속한 영광 길룡리 일대 민중들도 일제의 감시와 주목의 대상이 되었음에 틀림없다. 여기에 더해 영광 일대의 보수층 인사들의 대종사에 대한 비난과 질시도 도를 넘기 시작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간척지개척운동 당시 이웃의 부호가 제기한 간척지개척 허가권 분쟁사건은 그 전형적 사례의 하나라할 수 있다. 그런데, 위기는 안으로부터도 왔다. 대종사가 당초 내정했던 표준제자 가운데 1인으로 참여했던 인사가 당초의 공동 약속을 파기하고 이탈하는 사건이 일
어난 것이 그 구체적 증거이다.
그러나 1919년 3.1독립운동을 전후하여 대종사가 직면했던 가장 큰 위기는 다름 아닌 소태산 자신으로부터 왔던 것으로 보인다. 전국을 뒤흔들고 있는 3.1독립운동과 소태산 자신이 꿈꾸는 새 차원의 종교운동을 어떻게 관련지어야 할 것인지, 영광지역 보수기득권층의 반발과 비난을 어떤 방식으로 극복해야 할 것인지, 그리고 이탈자 발생에 따른 불법연구회 기성조합 내부의 문제를 어떻게 극복해야 할 지를 놓고 소태산은 커다란 위기의식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바로 이 같은 위기 극복을 위해 소태산이 내린 단안이 변산 입산, 곧 ‘봉래산 입산’이었다. 소태산의 변산 입산은 그간 영산을 무대로 전개해 왔던 운동 방식의 ‘대전환’을 의미하는 원불교 역사상 가장 극적(劇的)인 사건의 하나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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