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빛 머리카락 사내아이

‘그 아이가 어쩌면 외계에서 온 외계인이 아닐까?
머리카락이 그 증거가  아닐까.’ 하는 생각에 아이를 유심히 쳐다보곤 했다.

글. 유은선

“오늘은 이시환 님의 생일입니다. 축하 메시지를 남겨주세요.”
밴드에 생일 알림 메시지가 뜬다. ‘이시환’은 큰이모의 둘째 아들, 내 외사촌 동생이다.
36년 전 그날 새벽이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나는 건, 아기가 태어나는 것을 처음 본 데다 그 모습이 어지간히 충격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요즘은 집에서 아이를 낳는 일이 거의 없지만, 내가 어린 시절에는 조산원에서 아이를 낳거나 집에서 조산사를 불러 아이를 낳는 일이 흔했다.
그 무렵, 이모는 첫째 아이를 혼자서 낳았다. 그리고 둘째를 연년생으로 가진 이모는 혼자 아기를 돌볼 수 없어 둘째를 낳으러 친정에 와 있었다.
그날은 외할머니께서 늦게 돌아오신 날 밤이었다. 큰이모, 막내이모, 나 셋이서 작은 방에서 자고 있는데 잠결에 큰이모의 신음소리가 들렸다. “옥아, 가서 엄마 좀 깨워라! 아기가 나오려고 한다. 옥아! 옥아!” 몇 번을 부르는 소리에도 막내이모는 깨어나지 않았다. 큰이모의 신음소리는 곧 죽을 것처럼 들렸지만 나는 너무 무서워서 일어날 수가 없었다. 두 눈을 꼭 감고 자는 척하면서도 이모가 곧 죽을지 모른다는 공포감에 몸이 얼어버렸다.
한참 후 큰이모는 더 이상 못 참겠는지 더 큰 소리를 냈다. 그러자 옆방에서 주무시던 외할머니께서 달려오셨다. 허겁지겁 우리를 깨우시는 외할머니 손에 일어난 나는 아기 머리가 나오는 모습을 보고 너무 놀랐다. 외할머니의 재촉에 쫓겨 방을 나오면서 본 아기의 검은 머리카락 사이로 황금빛 머리카락 몇 가닥이 보였기 때문이다.
마당으로 나온 나는 생애 처음 본 모습과 비릿한 피 내음, 그리고 큰이모의 곧 죽을 것 같은 신음소리에 대한 충격으로 구토를 했다. 그날 새벽, 마당에서 본 밤하늘은 너무 맑고, 별들은 초롱초롱했으며, 또 겨울바람은 혹독하게 시렸다. 온몸을 휘감는 압도적인 감각에 나는 그 자리에서 한참을 바들바들 떨었다.
그날 그렇게 태어난 아이가 바로 내 이종사촌동생 ‘시환’이다. 내가 왜 외가에서 자게 되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날 이모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와 아이의 머리카락이 빛났던 모습은 아직도 생생하다.
어린 나는 ‘그 아이가 어쩌면 외계에서 온 외계인이 아닐까? 머리카락이 그 증거가  아닐까.’ 하는 생각에 아이를 유심히 쳐다보곤 했다. 나는 시환이를 볼 때면 시환이의 머리카락이 황금빛인지 확인하곤 했다. 
시환이의 머리 뒤쪽에는 아직도 주변 머리카락 색보다 밝은 머리카락 한줄기가 있다. 그것을 볼 때면 그날의 기억이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그 동생은 지금 두 아이의 아빠가 되어있고, 이 나라를 지키는 직업군인으로 열심히 살고 있다.


할머니 딸

“반년 밖에 안 남았다고 했는데 1년을 넘게 살았다.”며
‘덤’인 인생이라고 말했다. 이모부도, 사촌언니도 울지 않았다.

글. 안혜영

이모가 암이라는 소식을 전해들은 건 2년 전 즈음이었다.
어렸을 적에는 이모집에 놀러도 가고 사촌언니와도 어울려 놀았지만, 커서는 1년에 몇 번 보는 게 고작이었다. 그래서였는지 한동안 보지 못한 이모의 소식은 충격보다는 담담함이 컸다.
“이모는 어때?” 안부 속 이모의 건강상태는 점점 안 좋아지는 듯했다. 수술을 하고, 항암을 하고, 입퇴원을 반복했다. 하지만 나는 바쁘다는 핑계로 매번 문병 가는 것을 미루고 있었다. 솔직히 마주하는 게 무서웠다. 기억 속 젊었던 이모, 또 활달하면서 깐깐했던 이모의 모습이 시들어 가고 있을까봐 겁이 났다. 눈치 없이 눈물이 나버리면 그것도 곤란했다.
하지만 그날은 더 이상의 핑계거리가 없었다. 엄마에게 끌려 병원을 향해가면서 몇 번이고 다짐했다. ‘울지 말자!’ 울지 않기 위해 엘리베이터 거울 속을 한참 째려보았다.
이모는 담담했다. “괜찮아. 더 이상 바라는 게 없어. 괜찮아.” 병원 자원봉사자가 곱게 칠해준 매니큐어가 반짝반짝 빛났다. 아기는 잘 크는지, 회사는 잘 다니는지, 아무 일도 없는 듯 이모는 안부를 묻고, 나는 답했다. 이모는 밝아보였다.
문병을 다녀온 후로도 변한 건 없었다. 여전히 바쁜 일상 속에 이모를 잊었다가, 다시 생각나면 엄마에게 안부를 묻곤 했다. 이모는 그 사이 몇 번의 수술을 더 했고, 병원으로부터 더 이상 치료할 것이 없으니 호스피스병원으로 옮기라는 권유를 받았다고 했다.
그리고 얼마 후, 이모부로부터 이제 마지막 인사를 해두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연락이 왔다. 이모는 몰라보게 수척해져 있었다. 그때처럼 밝게 이야기를 하지는 못했지만, “처음 진단을 받았을 때는 반년 밖에 안 남았다고 했는데 1년을 넘게 살았다.”며 ‘덤’인 인생이라고 말했다. 이모부도, 사촌언니도 울지 않았다. 
곱고 똑똑했던 멋쟁이 이모. 그래서 언제나 외할머니의 자랑이었던 딸이었다. 그런 이모가…. “다음에 또 올게요.”란 인사를 하고 병실을 나왔다. 마지막을 앞둔 이모의 모습은 왠지 돌아가신 외할머니와 닮아있었다.
그 후 이모는 잠에 빠졌고, 그렇게 며칠 후 우리 곁을 떠났다.
추운 겨울, 장례식장으로 가려고 버스 정류장에 서자 눈물이 났다. “외할머니, 외할머니가 제일 사랑했던 딸이 갔어요. 마음이 아파서 어떻게 해요. 외할머니 속상해서 어떻게 해요.” 외할머니가 어디선가 슬퍼하고 있을 거 같아 눈물이 흘렀다.


그래도 난, 손자였구나

두 번의 짧았던 애정표현들이 감사했고, 더 소중하게 느껴졌고,
함께하지 못했던 것이 아쉽게 느껴졌다.

글. 석찬홍

나는 친할아버지와 정서적, 신체적 교류가 얼마 없었다.
일찍 돌아가신 것은 아니지만, 오래전부터 미국에 거주하셨기 때문에 자주 만날 수 없었다. 나에게 할아버지는 어색한 존재였다. 그리고 내 기억으로 할아버지는 무뚝뚝하신 분이었고, 나 또한 낯을 가리는 성격이라 몇 번의 만남만으로는 살갑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기억을 더듬어 보았을 때, 할아버지께서 나에게 애정을 아예 표현하지 않았던 건 아니었다. 내가 11살 때에 미국을 방문했을 때, 공항에서 할아버지가 말없이 내 손을 잡아주고 함께 걸었던 순간이 기억에 남는다. 그리고 고등학교 3학년 때, 할아버지께서 잠시 한국을 오셨던 적이 있었다. 그때 처음으로 친할아버지와 추석을 함께 보냈고, 함께 큰집에 가서 제사를 지냈다. 명절에 항상 부모님과 친척집에 갔었던 나에겐 특별한 경험이었고, 행복했던 기억이다. 할아버지께서는 추석을 지내고 미국으로 돌아가셨고, 공항으로 출발하기 전 내 머리에 손을 얹고 축복기도를 해주셨다. 전혀 예상치 못한 행동이었기에 나는 당황했지만, 행복했다.
하지만 그해가 할아버지와 보냈던 처음이자 마지막 한가위였다. 할아버지께서는 건강이 악화되어 더 이상 한국에 오기 어려워졌고, 나는 입대를 하게 되었다. 나는 몸 건강히 제대해서, 늠름한 성인의 모습으로 할아버지를 찾아 뵐 계획이었다. 미국에 가서 할아버지께서 지난 날 살아오셨던 이야기들을 듣고, 삶 속에 축적된 지혜들을 듣고 싶었다. 하지만 전역 2개월을 앞두고 있을 때다. 의료사고로 인해 할아버지의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었고, 내가 전역하기 하루 전날 결국 돌아가셨다.
할아버지의 임종 소식을 간부를 통해 전해 들었을 때, 나는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살아생전 많은 시간을 보내지 못했기에 크게 슬퍼할 힘이 없었다. 그저 아쉬운 점은 군인의 신분이었기에 미국에서 할아버지의 임종을 보지 못한 것과,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못했다는 것, 그리고 할아버지로부터 사랑을 받았다는 순간이 너무 짧았기 때문에 좀 더 확인 받고 싶은 마음이었다. 아버지는 홀로 미국에 가서 장례에 참석하셨고, 할아버지의 방을 사진으로 찍어서 보내주셨다. 사진 속에는 술 취하지 말라는 글이 적힌 액자가 걸려있었고, 서재 책상에는 나와 여동생의 사진이 담긴 액자가 올려 있었다. 그 사진을 보자 어릴 때부터 다른 친척동생들이 큰할아버지, 작은할아버지들로부터 귀여움 받았던 것들을 부러워했던 것과, 나를 귀여워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할아버지에 대한 서운함이 사라졌다. 그리고 두 번의 짧았던 애정표현들이 감사했고, 더 소중하게 느껴졌고, 함께하지 못했던 것이 아쉽게 느껴졌다.
‘할아버지, 비록 살아계시는 동안엔 많이 보지도 못하고 손주 노릇도 많이 못해드렸지만, 천국에서 다시 만날 땐 어리광도 부리고 얘기도 많이 나눠요. 감사하고 사랑해요.’

 

저작권자 © 월간원광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