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참 행복하다
철원 한탄강에서

취재. 노태형 편집인

올해처럼 눈 구경하기 힘든 겨울이 있었던가요?
기다리고 기다려도 내리지 않는 뿌연 하늘을 보고, 눈이 지겹다는 어른들마저도 ‘참 이상타.’며 먼 산을 올려다봅니다.
“올해는 눈 구경한 지가 언젠지 몰라요. 겨울축제도 걱정이네요.”
겨울 일기예보 때면 으레 등장하고, ‘춥다. 춥다.’ 하면 더 추워 그 명칭을 떠올리기만 해도 한기가 들듯한 철원. 군청 공무원은 “뭐, 추위가 대수예요?”라며 일기를 알려줍니다. 하지만 혹 압니까? 마른하늘에 눈 벼락 내릴지. 그래서 무작정 철원으로 향했죠.

1억 년의 숨결을 간직한 신비의 땅.
철원을 대표하는 고석정에서 겨울 흔적을 찾습니다. 한탄강 상류 강 한가운데 우뚝 솟은 고석바위는 약 1억 년 전 중생대 백악기에 만들어진 화강암이라는군요. 이게 50만 년 전에 분출한 현무암질 용암류에 의해 완전히 파묻혔다가 침식작용을 통해 다시 지표로 그 모습이 드러났다고 합니다. 철원에는 그렇게 오랫동안 숨겨진 비밀이 많습니다.
이곳에서 2㎞ 거리의 협곡을 따라 올라가면 현무암 기암절벽이 결대로 떨어져나가며 형성된 송대소 주상절리가 탄성을 자아내게 하고, 바로 위쪽에는 일명 한국의 나이아가라라 불리는 폭 80m의 직탕폭포가 웅장한 소리를 내며 쏟아지죠. 여기에 눈 한 줌 뿌려주면 그대로 한 폭 동양화가 그려질 텐데요.
그런 역사만큼 철원은 아픔도 많답니다. 후삼국에 세워진 태봉국의 궁지가 있어 궁예의 슬픈 전설을 간직했는가 하면, 6·25 한국 전쟁 전에는 북한에 속했다가 전쟁 후에 남한 영토로 수복된 전쟁의 상처가 깊은 곳이죠. 그러기에 휴전선 철책을 마음대로 넘나드는 철새들의 울음소리를 따라가다 보면 애잔함은 더욱 가득 밀려옵니다.

그래서 겨울, 더욱 고맙습니다.
겨울이면 가족들은 따뜻한 아랫목에 둘러앉아 이야기꽃을 피우죠.
할머니는 옛날이야기를 보채는 손자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러니까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인데 말이야.”로 입을 뗍니다. 그럴 때면 손자들의 귀는 금세 쫑긋 세워지죠. “하나만 더, 하나만 더.”하고 보채면, “이제 밤이 깊었다. 자거라.”하고 이내 건넛방으로 황급히 도망가는 할머니.
눈망울이 말랑말랑한 아이는 긴 겨울밤을 쉬이 지나갈 수가 없습니다. 그럴 때는 다시 아버지 가까이로 바짝 다가서죠. “아버지는 젊은 시절에 뭐 했어요?” “앵? 그만 자지.” “이야기 딱 하나만 들려주면 잘게요.” “허허.”
그렇게 아버지의 추억 이야기가 기차를 타고 달리면, 어느새 엄마의 귀도 쫑긋 서죠. “그래서, 그래서?” 엄마의 질문에 아버지가 당황스러워 합니다. “아니, 그랬다는 거지.” “좀 구체적으로 이야기 해보라고.” “아무 일 없었다고, 그만 자자. 쟤 때문에 잘못 하면 부부 싸움 나겠네.” 물론 이런 것들은 사랑싸움이기 마련이죠. 그래도 겨울이 있기에 온 가족이 모여서 따뜻한 겨울을 지냅니다. 겨울이 가져다 준 행복이죠.
겨울 아랫목은 추워서 따뜻합니다. 겨울 산이 아름다운 건 속살을 그대로 내비치기 때문이죠. 흰 눈이라도 한 번 펑펑 쏟아지면 세상은 온통 산수화가 됩니다. 온정이 굴뚝을 타고 피어오르기 때문이죠. 계절의 시작은 겨울입니다. 겨울, 봄, 여름, 가을.
설이 가까워 옵니다. 가족 모두 행복하시길 빌게요.


사진제공 철원군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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