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비 내리는 가족여행

글. 이수영

가족여행을 가게 되었다.
처음에는 엄마와 단둘이 다녀오려 했던 단출한 여행이었다. 아버지는 회사일로 바빴기에 처음부터 아버지와의 여행은 생각지도 않았다. 하지만 예의상(?) 물어본 질문에 아버지가 같이 가겠다고 하셨다.
바꾸어야 할 게 한 둘이 아니었다. 우선 일본에 가서 온천도 하고 맛있는 것도 먹자던 엄마와의 계획은 아버지가 좋아하는 제주도 트레킹으로 바뀌었다. 산을 타야 한다니…. 가방에 구두 대신 운동화와 등산복을 넣어야 할 판이었다. 4박 5일 여행일정도 3박 4일로 짧고 굵게 수정되었다.
하지만 숙소만큼은 양보할 수 없었다. 바닷가 근처, 예쁜 건물의 펜션 목록을 쭉~ 뽑아 아버지에게 보내면, 아버지는 어디어디 산골짜기 실속형 펜션을 보내셨다. 몇 번의 문자와 수 번의 전화가 오가고 바닷가 근처, 올레길 옆 펜션을 예약했다.
그렇게 준비를 마치고 떠난 가족여행.
좋다던 날씨예보와 다르게 제주도는 비바람이 몰아치는 중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괜찮았다. 숙소에서 바다를 보며 따뜻한 식사를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웬 걸. 심사숙고 해 고른 예쁜 펜션에는 짐만 던져둔 채 바로 트레킹이 시작되었다. 하루 가득찬 일정을 마치고 돌아오면 깜깜한 밤. 창 밖의 경치고 뭐고 피곤해 잠들기 바빴다.
다음날도 마찬가지였다. 이른 아침을 먹은 후 제주도 구석구석을 돌고 돌아오면 저녁이었다. 식사도 갈치, 회, 흑돼지 등의 제주도 토속음식 대신 엄마가 싸 온 집밥을 먹었다. 그렇게 여행의 마지막 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사실 오랜만의 가족여행을 위해 나름의 준비도 하고 기대도 했었다. 아침이면 바다를 보며 일어나, 근처 둘레길을 산책하고 차도 한 잔하며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래서 예산보다 무리해 숙소를 잡고, 맛집 리스트도 뽑아 갔는데…. 셀카봉으로 찍은 사진은 비바람에 머리가 날리는, 산 정상에서 찍은 사진들뿐이었다.
내 희망은 여행의 마지막 날 이루어졌다. 화창하게 갠 날 드디어 부모님과 여유롭게 산책을 한 것이다. 커피도 마셨다. 물론 시간에 ?겨 공항 커피숍에서였지만.
여행 중에는 불만이 많았지만 돌아와서 보니, 이게 우리 가족답다는 생각이 든다. 눈과 비바람을 맞으며 산에서 내려와 뜨끈한 밥을 호호 불며 먹었던 것을 어찌 잊겠는가. 또 첫눈다운 첫눈도 그곳에서 보았다. 그러고 보니 우연히 들어갔던 어떤 식당은 맛집 리스트에 올라있었던 집이기도 했다.
이 모든 기억이 따뜻하게 남았으니 이만하면 만족스러운 여행이 아니었나 싶다.

텃밭에서 배우는 지혜

글. 박성철

옥정호 주변에는 나와 아내가 정성스럽게 가꾸고 있는 자그마한 텃밭이 하나있다. 내가 사는 전주에서 거의 백여 리나 떨어져 있는 먼 곳이다. 그 텃밭에 매년 배추를 심어 김장을 담가 아들딸에게도 보내주고, 서울의 사돈이나 친구들과도 나누어 먹는다. 때로는 참깨나 들깨를 심어 고소한 기름을 짜 아들딸과 같이 나누는 즐거움도 맛보곤 했다.
멀지만 그곳에 텃밭을 일구고 가꾸는 데는 이유가 있다. 하나는 텃밭이 있으므로 그곳에 계시는 부모님을 자주 대할 수 있고, 또 하나는 땅에 대한 정직함과 고마움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벌써 오십여 년 전의 이야기다. 끼니걱정을 해야 하는 집안이었지만 할머니는 쌀밥이 아니면 식사를 하지 않으셨다. 논이 있어야 쌀농사를 지어서 쌀밥을 해드릴 수 있을 것 아닌가? 어린 나이였지만 그때 번뜩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일전에 소 먹일 꼴을 베러 다니다 어느 조그마한 골짜기에 간 일이 있었다. 고랑물이 졸졸 흐르는 주변에 소먹이 풀과 가시덤불이 우거진 곳이었다. ‘그래! 이 골짜기에 논을 만들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풀을 거두고 가시덩굴은 파내는 등 며칠을 노력한 결과 제법 널찍한 논을 만들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 했던가? 비료 한 줌, 농약 한 번 치지 않았지만 농사가 잘 되어 쌀 몇 말을 오롯이 얻을 수 있었다. 그 수확의 기쁨은 나를 넘어 어머니의 몫이었다. 할머니 밥 걱정을 놓았다니 얼마나 큰 시름을 더셨을까? 어린 나이였지만 땅의 고마움과 정직함을 그때 처음 알았다.
그런데 뜻밖의 일이 발생했다. 해마다 배추를 잘 가꾸어 김장을 했는데, 엊그제 보니 잘 자라던 배추가 ‘나 죽겠다!’며 잎을 늘어뜨린 채로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가까이 가보니 두더지가 땅 밑을 파헤치고 다닌 탓에 배추가 말라죽기 직전이었다.
유기농법으로 한답시고 농약을 하지 않은 채 퇴비만 뿌렸으니 지렁이나 땅벌레들이 자기들의 세상을 만난 듯 도란거리며 살고 있었을 것이다. 지근거리에서 먹이를 찾던 두더지가 그걸 모를 리 있겠는가? 온 밭을 신나게 뒤지며 먹이 사냥을 했을 것이다. 지난해에는 멧돼지가 두더지를 잡느라 배추를 짓밟아 여러 포기를 버려야 했다. 그래서 울타리를 튼튼하게 했더니 두더지가 배추를 말라죽게 하고 있다.
이젠 옛 조상들의 지혜를 배워야 할 때인 성싶다. 옛 조상들은 땅에 씨앗을 심을 때 한 구멍에 세 알씩을 심는 지혜가 있었다. 한 알은 하늘을 나는 새의 몫이고, 다른 한 알은 땅속에 사는 미물들의 몫이며, 나머지 한 알은 씨앗을 심은 사람의 몫이라 했다. 조상들의 계산대로 하면 150여 포기 심었으니 오십여 포기만 차지하면 된다.
텃밭을 나 혼자 가꾸는 것도 아니다. 나는 오늘 텃밭에서 자라는 배추를 보며 이를 잘 자라도록 보살펴준 사은(四恩)에 감사하고, 미물과 같이 나누기 위해 한 구멍에 세 알씩의 씨앗을 심었던 조상들의 지혜를 배우고 있다.

제가 대신 내드릴게요

글. 한지원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어느 날 친구를 만나기 위해 버스를 탔다.
여느 때처럼 지갑을 꺼내서 카드인식기에 대려고 가방에 손을 넣었는데, 아무리 손을 움직여도 지갑이 잡히지 않는다. 이미 버스는 출발한 상태였고, 흔들리는 버스에서 나는 더 당황하고 있었다. 나는 운전사 뒷자리에서 털썩 주저앉아 가방을 샅샅이 뒤지며 지갑을 찾으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손에 잡히지 않는 지갑….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았다. 이 사태를 어찌해야 하나…. ‘기사님께 지갑이 없어서 그냥 내린다고 할까? 아니면 죄송한데 다음에 꼭 드린다고 하고 애원해야 하나?’ 내 얼굴이 점점 일그러지는 그때였다.
“얼마예요? 제가 내드릴게요.” 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내 눈에는 교통카드를 직접 단말기에 가져다 대며 윙크를 하는 여자분의 모습도 보였다. “어…!” 하는 순간 여기저기서 내미는 도움의 손길이 나의 불안했던 마음을 봄눈 녹이듯 녹여내고 있었다.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현대사회를 인간소외의 사회, 불신의 사회라고 하지만 아직은 믿음의 세상인 것 같았고, 어려움을 당하는 평범한 사람에게 누구나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고마운 세상이었다.
조지 베일런트 교수를 포함한 미국 하버드대학교 연구팀은 1930년대 말 하버드 대학교에 입학한 2학년생 268명의 삶을 72년간 추적한 연구를 통해 ‘행복의 조건은 사회적 계급, 돈, 명예가 아니라 인간관계’라는 결과를 얻었다. 노년까지 행복하게 살고 있는 사람의 90%가 형제자매들과 혹은 사회적으로 연관되어 있는 사람들과 원만한 인간관계를 맺은 사람들이었다는 것이다.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관계’이며, 행복에는 ‘사랑’이 깊이 개입되어 있다는 사실은 하버드대 연구팀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깨닫는 행복의 조건일 것이다.
지갑이 없어 차비를 낼 수 없어 당황했던 버스 안을 다시 생각해보면, 인간들이 쉽게 무시하는 행복은 내 주변에 있는 이웃과 함께 감사를 나누고 은혜를 갚아가는 것이 아닐까 싶다. “감사해요. 사랑해요. 잘했어요. 함께해요.”라는 말…. 자주 쓰는 말이지만 우리의 행복에 가장 근간이 되는 조건을 실천하는 말이 아닐까?
곤경에 처한 나를 위해 ‘차비를 대신 내주겠다’는 사람들이 가득했던 그날. 그 버스 안에서 나는 수도 없이 고개를 숙이며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를 연발했다. 그 말로 인해 나는 눈물이 날 정도로 행복해졌고, 내 말을 듣는 많은 사람들의 표정에는 미소가 가시지 않았다.
행복은 도움의 손길이고, 감사의 말 한 마디며, 그 공간에 함께하는 사람들이었다.

우리 강아지 왔나

글. 윤다정

자식은 부모를 닮는다는 말이 있다. 특히 딸은 엄마를 닮는다.
 요즘 나의 엄마는 거울을 보며 자신의 얼굴에서 본인의 어머니 얼굴이 보인다는 얘기를 자주 하신다. 나는 엄마의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외할머니의 모습이 떠오르는 동시에 그리움이 밀려오곤 한다.
 외할머니에 대한 내 마지막 기억은 내가 4, 5살 때이던 어느 날에 있다. 그전에도 가족과 함께 외할머니 댁에 종종 방문하곤 했는데, 나는 그날도 조금 떨떠름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당시에 외할머니는 새끼진돗개 두 마리를 키우고 계셨는데, 애꿎은 강아지들은 놔두고 자꾸 날 보고 ‘강아지’라고 칭하셨기 때문이다. 외할머니 댁에 방문할 때마다 “우리 강아지 왔나~.” 하며 반겨주시던 외할머니에게 나는 매번 조금 뾰로통해 있었다. “외할머니, 저 강아지 아닌데요! 사람인데요! 다정인데요!” 하고 의문을 제기했지만 외할머니는 아주 재미난 것을 들었다는 듯이 그저 “오냐, 오냐.” 하고 웃어넘기셨다.
 그날도 마찬가지리라 여겼다. 그러나 그날엔 그 질문에 대한 귀띔을 주셨다. “다정이는 이 강아지들을 보면 무슨 생각이 드니?” 나는 외할머니의 말씀이 무슨 뜻인지 몰라서 그저 “밥 먹고 있는데요.”라고 대답했다. 그도 그럴 것이 정말 강아지들이 밥을 맛있게 먹고 있는 중이었던 것이다. 외할머니는 웃으시면서 강아지들을 더 유심히 보다 보면 느끼는 것이 있을 거라고 말씀해주셨다.
 나는 그렇게 강아지들을 빤히 쳐다보다 나도 모르게 강아지들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맛있게 잘 먹네. 더 먹어랏….’ 그러고는 신이 나서 외할머니에게 달려가 말했다. “강아지들이 밥을 더 맛있게 더 잘 먹었으면 좋겠어요!” 외할머니는 “오냐, 오냐.” 하며 또 웃으셨다. 나는 여느 때와 같은 외할머니의 반응에 ‘이게 아닌가?’ 했지만 곧 그것에 대해서 잊어버렸다. 그저 외할머니가 내가 밥을 맛있게 잘 먹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셨나보다고 여겼을 뿐이었다.
 그 후로 오랜 시간 외할머니를 뵙지 못했다. 그리고 내가 6살 때쯤이었다. 새벽에 누군가의 전화를 받고 울던 엄마의 모습이 아직도 선하다. 보통 때 같았으면 졸린 눈을 비비다 말고 엄마더러 왜 우냐고 물어봤겠지만,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나도 모르게 멍하니 엄마를 보고만 있었던 게 기억난다. 외할머니의 부고였다.
 ‘우리 강아지’의 의미에 대해 이해할 정도로 머리가 컸을 즈음부턴 부쩍 외할머니가 생각나곤 했다. ‘내가 조금만 더 그 의미에 대해 일찍 알아챘다면…’ 외할머니에게 오해를 풀었다고 당시의 어린 마음으로 재잘거리며 말씀드리고 싶지만 이미 지나가버렸다. 아쉬움과 안타까움, 그리고 슬픔과 그리움이 아득하게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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