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의 결은 감관 및
심관작용에 의해 깨진다


글. 김정탁

천지(天地)란 하늘(天)과 땅(地)이다.
하늘과 땅은 자연 그 자체를 의미한다. 장자에 따르면 이상적 군주는 성인(聖人)의 자질을 지녀야 하는데 성인은 합일(合一), 즉 태초(太初)의 상태로 되돌아가는 걸 추구하는 사람이다. 태초란 자연의 결이 그대로 살아있는 상태이므로 성인의 다스림은 자연의 결 그대로에 입각해 있다. 이에 성인은 직분에 맞게 적절한 자리를 제공하고, 능력에 맞게 유능한 사람을 기용하며, 일의 실정에 근거해 적당한 조치를 널리 시행하고, 언행을 자연스럽게 하는 걸 다스림의 기본으로 삼아야 한다. 이렇게 하면 천하 백성이 감화되어 어떤 조치를 힘들게 취하지 않아도 사방에서 모여든다.
성인의 다스림보다 자연의 결에 더욱 입각해 있는 게 덕인(德人)의 다스림이다. 덕인은 머물거나 움직여도 생각하거나 궁리하지 않으며, 또 마음에는 시비(是非)나 미추(美醜)의 느낌을 간직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온 세상 사람들이 함께 하는 이득, 즉 공리(公利)를 기쁨이라고, 또 함께 하는 넉넉함, 즉 공급(共給)을 편안함이라고 여긴다. 또 덕인은 평소에는 어린 애가 어머니를 잃은 듯 슬퍼하는 모습으로, 나그네가 길을 잃은 듯 실망하는 모습을 한다. 게다가 덕인의 재물은 항상 여유가 있고, 음식은 늘 충분하지만 그것들이 어디에서 왔는지 모른다.
덕인의 다스림보다 자연의 결에 더욱 입각해 있는 게 신인(神人)의 다스림이다. 훌륭한 신인은 빛을 타고선 그 모습을 감추고 있는데 이를 밝고 공허한 것이라고 말한다. 또 신인이 천명(天命)을 다하고 실정을 고루 살피면 천지가 즐거워하고, 만사가 녹아 없어지면서 만물이 본래 그대로의 자연스런 모습(情)으로 돌아오는데, 이를 어둡고 걷잡을 수 없는 혼명(昏冥)이라고 한다. 이처럼 성인·덕인·신인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자연의 결에 따라 처신하므로 나라를 다스리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사람들은 순(舜)임금을 훌륭하다고 말한다. 그런데 장자는 순임금조차 성인의 다스림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장자가 볼 때 천하가 잘 다스려진 건 순임금이 다스려서가 아니라 천하가 어지러워진 뒤에 순임금이 다스려서이다. 만약 천하가 잘 다스려져 백성의 바람대로 모든 게 잘 진행되었다면 어찌 순임금이 천하를 다스리겠는가라는 의문을 제기한다. 그래서 순임금이 천하의 부스럼을 고치려 한 건 대머리가 된 뒤 가발을 씌우고, 병이 난 뒤 의사를 불러오는 격이다.
그래서 성인은 천하를 다스리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한다. 덕(德)이 지극했던 세상에선 특별히 현자(賢)를 숭상하지 않는다. 그래서 윗사람도 높은 나뭇가지처럼 그저 위에 있을 뿐이라 여기고, 백성들은 들판에 뛰어다니는 사슴처럼 자유롭게 행동한다. 누군가 단정하게 행동해도 그걸 의롭다 여기지 않으며, 서로 사랑해도 그걸 어질다 여기지 않으며, 성실해도 그걸 정성을 다함이라 여기지 않으며, 일이 약속대로 꼭 들어맞아도 그걸 미덥다 여기지 않으며, 꿈지럭거려 남을 위해 일해도 그것을 은덕이라 여기지 않는다. 그런 고로 덕이 지극했던 세상에선 무얼 행하더라도 자취가 없으며, 훌륭한 일을 행하더라도 특별히 전해지지 않는다.
장자는 세속의 의견도 자연스러움의 발로일 수 있기에 이를 전적으로 무시해선 안 된다고 말한다. 물론 사람들은 효자가 부모에게 알랑거리지 않고, 충신이 군주에게 아첨하지 않는 게 신하와 자식의 좋은 모습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부모가 말한 걸 무조건 옳다 받아들이고, 부모가 행한 걸 무조건 좋다 말하면 그를 못난 자식(不肖子)이라고, 또 군주가 말한 걸 무조건 옳다 받아들이고, 행한 걸 무조건 훌륭하다 말하면 그를 어리석은 신하(不肖臣)라고 말한다. 그렇지만 장자는 이런 평가가 반드시 옳을 수 없다며 세상의 풍속을 예로 든다. 세상에선 그른 걸 그르다고, 좋은 걸 좋다고 하는 사람을 두고 오히려 추종하거나 아첨하는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래서 세상의 평가가 부모보다 더 엄격하고, 군주보다 더 존중받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막상 누군가 나를 추종하는 사람이거나 아첨하는 사람이라고 비난하면 우꾼하며 낯빛을 바꾼다. 그래서 비유를 그럴듯하게 늘어놓고, 말을 꾸며 사람들을 모으는데 열중하면서도 이를 허물이나 죄라고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또 멋진 옷을 입고, 거기에 온갖 치장하며 표정을 그럴듯하게 꾸미면서 세상의 비위를 맞추면서도 누군가를 추종하거나, 누군가에 아첨한다고 여기지 않는다. 또 사대부와 한패가 되어 보통 사람과 시비를 벌이는데도 스스로를 보통 사람이라 여기지 않는다. 정말로 어리석기 짝이 없다. 그래서 어리석음을 아는 사람은 크게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고, 미혹됨을 아는 사람은 크게 미혹된 사람이 아닌 것이다. 정말로 크게 미혹된 사람은 자신의 잘못을 평생 알지 못하고, 정말로 크게 어리석은 사람은 자신의 그릇됨을 평생 깨닫지 못한다.
그래서 속인의 귀에는 좋은 소리(大聲)가 들리지 않고 절양(折楊)·황과(皇) 같은 속된 노래만을 환성으로 반긴다. 고상한 말(高言)이 뭇 사람들의 마음에 머물지 않음으로 이치에 맞는 말(至言)이 나오지 않고, 속된 말(俗言)이 우세한 실정인 것도 이런 이유에서이다. 이런 속된 말이 온 천하에 우세함으로써 가려고 하는 바가 있어도 헷갈려서 도달할 수 없다. 또 가려는 바에 도달할 수 없음을 알면서도 억지로 가려는 것 또한 헷갈림이다. 그러니 억지로 밀고 나가지 않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다. 억지로 밀고 나가지 않으면 걱정할 일이 없어져서이다. 그러니 세속의 의견을 따라가며 영합하는 것도 나쁘지만 세속의 의견을 거슬러서 무리할 필요가 없다. 문둥이가 자식을 낳으면 서둘러 등불을 들고 허둥지둥하며 들여다보는데 이는 자식이 자기와 닮는 것을 두려워해서이다. 
이제 장자는 천지(天地), 즉 자연스러움을 깨뜨리는 원인이 무엇인지에 대한 근본적 질문을 제기한다. 그리고서 그 원인을 감관작용과 심관작용에서 찾는다. 먼저 감관작용은 오관의 작용으로 오색(五色)·오성(五聲)·오취(五臭)·오미(五味)와 관련이 있다. 첫째 오색, 즉 청(靑)·백(白)·적(赤)·흑(黑)·황(黃) 등의 온갖 색이 눈을 어지럽혀 우리를 밝지 못하게 만든다. 둘째, 오성, 즉 궁(宮)·상(商)·각(角)·치(徵)·우(羽) 등의 온갖 소리가 귀를 어지럽혀 우리를 듣지 못하게 만든다. 셋째, 오취, 즉 전()·성(腥)·향(香)·연(燃)·부(腐) 등의 온갖 냄새가 코를 길들여 제대로 맡지 못하게 해 우리의 머리를 무겁게 한다. 넷째, 오미, 즉 산(酸)·함(鹹)·신(辛)·감(甘)·고(苦) 등의 온갖 맛이 입을 탁하게 해 우리의 입맛을 상하게 만든다. 이런 오관 작용이 자연스러움을 깨뜨리는 원인이다. 
심관작용 역시 자연스러움을 깨뜨리는 원인이다. 이를 위해 장자는 나무의 예를 든다. 백 년이나 된 나무를 쪼개 술그릇과 술통을 만들고 남은 나무 조각들은 하수구에 버려진다. 그런데 술그릇과 술통을 만든 좋은 나무와 하수구 안에 조각나 버려진 쓸모없는 나무를 비교하면, 아름다움과 추함에선 분명 차이가 있지만 타고난 나무의 본성을 잃었다는 점에선 매한가지이다. 그러니 큰 도둑인 도척()과 공자의 제자인 증삼(曾)과 사추(史)도 행동의 의로움에선 차이가 있지만(이에 대해선 2016년 3월호 참고) 사람으로서 타고난 본성(性)을 잃었다는 점에선 마찬가지이다. 이것이 취사(趣舍), 즉 좋은 것은 취하고, 싫은 것은 버려 마음을 흐리게 함으로써 본성에서 벗어나는 것인데 심관작용의 결과이다.
홀로 고고하고자 했던 양주(楊朱)와 묵적(墨翟)은 타고난 본성에 스스로 부합한다고 여겼는데, 장자가 볼 때 본성에 부합하는 사람이 아니다. 이들의 꽉 막힌 마음이 본성에 부합한다고 말하면 새장에 갇혀 있는 비둘기와 부엉이도 본성에 부합한다고 말할 수 있다. 양주와 묵적은 특별히 좋은 소리와 색깔을 취하고, 특별히 싫은 소리와 색깔을 버림으로써 마음을 틀어막고, 또 가죽 관이나 물총새 관, 또 홀을 꽂은 큰 띠를 갖춰서 바깥을 거창하게 장식했다. 이는 둘러쳐진 울타리로서 마음을 완전히 막고, 노끈과 줄로 몸을 겹겹이 동여맨 것이다. 이런 모습을 멀리서 바라보면 몸과 마음이 점점 죄어들어가는 건데도 이들은 스스로 타고난 본성에 알맞다고 여겼으니, 안타까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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