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접지몽만 알아도…


만물은 변화해도 본질은 똑같아… 인생은 원가로착이고 새옹지마

‘인생지사 새옹지마(塞翁之馬)고, 원가로착(寃家路窄) 한다. 호접지몽(胡蝶之夢)인데 오월동주(吳越同舟)든 어떠랴.’ 이런 자세로 세상을 살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그렇지 못하다.
얼마 전 매우 소중한 경험을 했다. 예전에 머물던 회사에 나와 관계가 매우 나쁜 상사가 있었다. 10여 년이 지난 지금 돌이켜보면 나의 잘못도 있었지만, 당시엔 그 상사 때문에 상처를 많이 받았다. 스트레스는 당연히 덩달아 따라왔다. 그로 인해 술도 많이 마셨다. 그 상사는 누구보다 일을 열정적으로 했다. 상대방의 의중을 꿰뚫고 있는 듯했다. 어디를 짚으면 뭐가 나온다는 사실을 정확히 파악할 정도로 흐름의 맥도 간파하고 있었다. 마치 세상이 그의 손바닥에 있는 듯이 행동했다. 열정이 지나치면 이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하지만 그 열정과 흐름을 간파하는 맥락이 지나쳐서 너무 정치적이라는 평판을 받았다. 그는 어떤 사건이 일어나면 이어질 다음 사건의 정치적 영향까지 정확히 파악하면서, 그 흐름에 직접 관여하려는 작업을 했다. 급기야 퇴직하자마자 실제로 정치권에 발을 담갔다. 만약 그가 정치에 죽기 살기로 달려들었다면 운명이 또 어떻게 달라졌을지 모를 일이지만 세상은 그것을 허용하지 않은 듯했다. 그는 어느 날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다. 정말 너무 어이없고 황당했다. 고혈압이 조금 있긴 했지만 그렇게 쉽게 가리라고는 아무도 생각지 못했다. 안타깝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감정이 쌓였던 터라, 조문을 가지 않았다. 죽기 전에도 ‘서로 안 보면 되지, 뭐.’라고 생각할 정도로, 보고 싶지 않던 상대였기 때문이다. 마음 한 구석이 조금은 꺼림칙하기도 했지만 끝내 조문의 발걸음을 떼지 않았다.
그러다 몇 년이 흘렀다. 난 회사에서 이런저런 사업기획을 하며 일거리를 만들었다. 나이 들어 심심하기도 하고, 관련 되는 일은 회사에서도 비용 부담이 없으면 해보라고 권장했다. 여행 관련 일도 그 중의 하나다. 여행업계 베테랑 직원을 뽑고, 내가 기획을 하여 여행 일을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한 중년부인이 본인의 남편이 내가 소속한 회사의 대표를 했었다며 누구라고 말했다. 바로 그 죽은 상사의 부인이었다. 뭔가로 머리를 한 방 맞은 기분이었다. ‘아, 사람을 이렇게도 만날 수 있구나.’ 그날 정말 많은 상념에 젖었다.
옛날 중국 북방에 한 늙은이가 말을 기르고 살았다. 어느 날 그가 기르는 말이 도망쳐 국경 너머로 가버렸다. 마을 사람들이 위로하자, 그 늙은이는 “이것이 또 무슨 복이 될는지 알 수 없잖나.”라고 대응하며 조금도 낙담하지 않았다. 그러자 몇 달 후 도망갔던 말이 오랑캐의 좋은 말 한 필을 데리고 돌아왔다. 마을 사람들은 일제히 축하했다. 그 늙은이는 그때에도 “이것이 또 무슨 화가 될는지 누가 알겠나?”라며 마치 예언이라도 하듯 시큰둥하게 반응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변고가 일어났다. 승마를 좋아하던 늙은이의 아들이 그 말을 타고 달리다 떨어져서 다리가 부러진 것이다. 이번에도 마을 사람들은 아들의 다리가 부러진 것을 위로했고, 늙은이는 예외 없이 “그것이 혹 복이 될지 누가 알겠나?”라고 응수했다. 얼마 후에 전쟁이 발생했다. 오랑캐들이 쳐들어오자 장정들은 모두 전쟁터로 나가 싸웠다. 대부분이 전사했지만 늙은이의 아들만은 다리가 부러져 전쟁에 나가지 않았고, 무사할 수 있었다.
중국 <회남자(淮南子)>의 ‘인간훈(人間訓)’에 나오는 이야기며, 인생지사 새옹지마를 가리키는 이야기다. 한자의 뜻은 ‘변방에 사는 늙은이의 말’이란 의미다. 세상은 길흉과 화복이 반복되어 일어나기에 예측할 수 없다는 교훈을 준다.
원가로착도 있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는 말이다. 세상을 살면서 아무리 안 볼 듯해도 나중에는 다 외나무다리에서 만나게 돼 있단다. 이승에서든 저승에서든 간에.
인생은 정말 호접지몽이다. 살아가면서 이런 사실을 파악하고 실천하기란 쉽지 않다.
장자가 어느 날 꿈을 꾸었다. 나비가 되어 즐겁게 꽃들 사이로 날아다녔다. 그러다 문득 꿈에서 깼다. 본인은 장주(장자의 본명) 그대로였다. 그런데 꿈속에서 장주인 자기가 나비가 된 것인지, 아니면 나비가 꿈에 장주가 된 것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꿈이 현실인지, 현실이 꿈인지, 도대체 그 사이에 어떤 구별이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결국 그는 장주와 나비 사이의 피상적인 구별과 차이는 있어도 본질적 차이는 없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장주가 곧 나비이고, 나비가 곧 장주였다. 눈에 보이는 것은 만물의 변화에 불과하다. 이처럼 피아(彼我)의 구별을 잊는 것, 또는 물아일체의 경지를 비유해 호접지몽이라고 한다. 인생의 덧없음을 비유하고, 물아일체 하나의 경지인 무위자연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가르친다. 때로는 ‘호접몽’이라고도 한다.
죽은 상사의 부인과 대화하는 것은 꽤나 신경이 쓰였다. 혹 이런 감정이 얼굴에 나타나지 않을까 걱정도 됐다. 다행히 무사히 넘기고 “너무 즐거웠다.”며 헤어졌다. “다음에 기회 있으면 꼭 다시 오겠다.”는 진심 어린 말까지 들었다.
‘안 보면 되지.’란 생각을 가졌던 그 상사에 대한 감정은 다소 누그러졌다. 그러면서 ‘아, 내가 옹졸한 생각을 갖고 있었구나. 그 당시 불편한 감정을 그때 바로 풀었어야 했는데, 무슨 억하심정이라고 지금까지 갖고 있었단 말이냐?’ 등 온갖 상념들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그리고 앞으로 남은 삶은 그런 불편한 관계를 절대 맺지 말아야겠다는 다짐까지 하게 됐다.
인간의 생이 얼마나 되는가. 겁(劫)에 비하면 한 점조차 되지 않을 정도로 미미하다. 그 점 속에서 온갖 일들이 일어난다. 사람들이 호접지몽과 새옹지마 정도만 깨달아도 훨씬 좋은 관계와 좋은 세상이 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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