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로교무들의
‘더 재미난’ 인생 이모작

고창수도원 24시

취재. 김아영 기자

아직 가을 하늘의 어스름이 가시지 않은 새벽 5시.
건물 밖, 원로교무들이 찬 공기를 마시며 입선에 든다. 김도진, 이수진, 박영창, 최덕신, 전귀원, 허정지 여섯 명의 단출한 식구지만 그들이 외는 독경과 선에는 묵직한 기운이 담긴다.
“총부가 있는 익산 지역 외에 또 다른 수도원이 있는지 몰랐지요? 잘 왔어요. 여기가 봉사로 제2의 인생을 살고자 모인, 고창수도원이에요.” 선으로 침잠했던 원로교무들이 미소를 짓는다. 

인생 이모작 선언!
널찍한 평야 한 가운데 자리한 고창수도원.
하지만 이곳이 처음부터 수도원이란 호칭을 가졌던 것은 아니다. 5년 전, 퇴임 후 수도원에 들어가지 않고 ‘손길이 필요한 곳’에서 봉사를 하며 제2의 인생을 살겠다고 선언한 김도진, 이수진, 유경희 원로교무. 1943년생, 동갑내기 동창인 세 사람의 ‘인생 이모작’ 선언은 그야말로 획기적인 일이었다. 교단의 반응은 딱, 반반. “특별하게 따로 행동하려 하느냐?”는 우려와 “그래, 잘 생각했다. 이제 다양한 퇴임 후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 개척해봐라.”는 호응이었다.
“저희 소식을 접한 한 원로님은 ‘너네는 고사가 한 줄 더 들어가겠다.’며 응원을 보내주셨어요. 우리가 또다른 수도도량에서 일과를 지키며 봉사하고 살면, 그곳이 곧 수도원이라고 생각했지요.”
사실 퇴임 전부터 “제가 퇴임하면 전지가위를 사 주세요.”라고 말했던 김도진 원로교무. “총부의 나무라도 전지하겠다.”라는 말이 우스갯소리 같았겠지만, 퇴임 후에도 봉사하며 살겠다는 확실한 의지 표명이었다. 또 틈틈이 원광디지털대학교에서 차를 공부하며 인생 이모작을 준비한 이수진 원로교무도 있었다.
“의지는 확고했고, 장소는 ‘도움이 필요한 곳’이라면 어디든 상관없었어요. 처음 가는 길이라 개척할 것도 많았지만, 그것 또한 즐거웠습니다.” 더구나 ‘원로교무들이 퇴임 후 봉사할 수 있는 수도도량을 만들어 교단에 기여하고자.’ 한 정상훈 교무(당시 고창지구장)가 ‘우리 시설에서 함께하자.’고 제안하면서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그러니 봉사거리 많은 고창원광효도의집에 터를 잡게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 그렇게 고창수도원이란 새로운 이름을 갖게 된 것이다.
“그렇게 시작한 게 5년이 되었네요.” 그 사이에 수도원이란 이름도 얻고, 실무에 바쁜 현직교무들을 대신해 시설의 기도와 천도재, 요가수업 그리고 어린이집의 다도수업까지 진행했다. 그사이 새 식구도 4명이나 늘었는데…, 셋이기에 시도가 가능했다는 김도진, 이수진 원로교무가 “시간이 참 빠르다~.”며 그 세월을 꼽는다.

개미부처님~ 진딧물을 옮기지 마세요
“이제 우리가 차밭에 나갈 시간인데, 같이 가보겠어요?”
한참동안 지난 이야기를 나누던 원로교무들이 밭에 나갈 채비를 한다. 바삐 걸음을 옮기지만 기껏해야 오전 10시가 못 된 시각. 시설 안의 차밭은 원로교무들이 공동경작으로 자력생활을 하는 터전이기도 하다.
“‘올해 차 농사는 이것이 끝이겠지.’ 하면 또 연한 순이 올라와 차를 만들 수 있어요. 봐요. 또 이렇게 순이 올라왔잖아요.” 경험이 많은 이 원로교무가 작업의 선봉을 맡아, 다른 교무들과 함께 7~8번의 공정을 해낸다. 완전한 수작업이기에 작업량이 많진 않지만, 귀한 손님에게 대접하고, 선물로 내기에는 충분. 나머지는 판매를 하는데, 올해는 “차 맛이 좋다.”는 소문을 타고 그마저도 모두 품절되었다.
“돈을 벌자고 하는 게 아니니 더 욕심내지 않아요. 이익금은 후진들을 위해 고창수도원 기금으로 만들고, 공동행사 때 헌공금으로 쓰지요. 그러니 이만하면 되었어요.” 좋은 사람과 나누고자 했던, 그 첫 번째 마음을 잊지 않는 그들. 수도원이 이만큼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것도 그런 ‘내려놓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차 농사와 함께 고추농사도 지었어요. 농사는 처음이었지만, 무엇이라도 보은하고 싶은 마음에 시작했죠. 공양할 것이라는 생각에 농약도 전혀 사용하지 않았고요.” 눈을 뜨자마자 하우스로 달려가 고추부처님에게 문안을 하고, 손으로 직접 벌레를 잡았다는 그들. 진딧물을 옮기는 개미에게 “이것은 공양할 것이다.”라고 말을 걸며 기도했더니, 다음날 개미들이 줄지어 이사를 가기도 했다. 덕분에 주렁주렁 열린 오이고추를 여러 기관과 교당에 공양할 수 있었는데…. “3년째에, 제가 원로교무님들을 말렸어요. 시간만 나면 그곳에 가서 계시니, 이러다가 병이 나실 것 같더라고요.” 정법일 고창원광효도의집 원장의 말처럼 봉사에 대한 열정이 얼마나 대단했던지, 정말로 나무 전지가위를 사서 시설 내 소나무를 다듬었다는 원로교무들.
“왜냐하면…. 흙을 만지고 농사일을 하면서, 일 속에서 일심을 기르는 공부가 살아났어요. 인생 이모작이 더 재밌더라고요. 하하. 바쁜 와중에도 사경을 일곱 번 했지요. 주위 사람들도 우리가 이곳에서 더 젊어지고 건강해진 것 같다고 해요.”

인생은 내가 만드는 것
바쁜 일정에 아플 시간도, 늙을 시간도 없다는 원로교무들. 실제로 시설의 천도재 독경과 기도, 몇 가지 수업을 진행하고 나니 오후를 훌쩍 넘긴 시각이다. 새벽만큼이나 어둠이 깔린 수도원 다실에 원로교무들이 다시 모였다.
“이번 달 말에 고창교당에서 문화법회를 보는데, 그동안 배운 판소리 솜씨를 보여주기로 했어요. 연습을 해야지요.” 고창 효도의집에서 판소리를 배우고 있는 김도진, 이수진, 최덕신 원로교무. 그런데 이 솜씨가 만만치 않은지, 지역 교당은 물론 다른 지역에서도 재능기부 공연이 연이어 들어온다는 것이다. 5월 5일, 어린이날 고창군 어린이민속큰잔치 행사에서는 전통차 체험관을 맡아 외빈들을 응접하고, 어린이들에게 우리 차를 알리기도 했다. 어떤 원불교 광고보다 효과적인 홍보가 된 건 말할 필요도 없었다.
“시설에 원로교무님들이 계셔서 좋지요. 기도와 천도재로 봉사해 주시고, 시설 곳곳의 어려운 일을 살펴 주시니까요. 그렇게 직원들의 모범이 되어 주시죠. 복지시설이지만 늘 목탁소리가 들리다보니, 수도도량의 향기가 납니다.”라는 정 원장. 지역 교당의 의식과 행사에도 손을 거드니 큰 힘이 아닐 수 없다.
“우린 이렇게 살고 있어요. 우릴 찾는 곳이라면, 아니 그전에 우리가 먼저 손 넣어 살피면서요.” 이 나이에 새로운 도전을 하는 것이나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가는 게 두려울 수도 있지만, 인생은 자기로 인해 만들어진다고 말하는 원로교무들. ‘건강할 때 좀 더 봉사하겠다.’는 이들의 한 생각이, ‘퇴임 후 수도원’이란 공식을 깨고 새로운 수도문화를 만들어 냈듯이 말이다.
“우리는 행복해요. 바람이 있다면, 우리로 인해 퇴임 후 다양한 수도문화가 만들어졌으면 좋겠다는 거예요. 기관이나, 교당 등에서 봉사를 하며 역할을 할 수도 있는 거고요. 지금의 길 외에도 얼마든지 다양한 길이 있으니까요.”
전무출신을 서원하며 세웠던 부처가 되는 그 길을 지금도 가고 있어 행복하다는 그들. 인생의 제2부가 더 아름다울 수 있음을 원로교무들을 통해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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