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깨를 기대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공간, 고물상
다복다복 모여 살다

취재. 정은구 기자 

캄캄한 새벽, 적막한 도로변이지만 신월동 은혜고물상 앞은 북적북적하다.
사람 체구의 서너 배는 족히 됐음직한 폐품들이 수북하게 쌓인 리어카들. 묵직한 리어카를 바닥에 설치된 저울 위로 올리면, 깜빡거리던 숫자가 정확한 무게를 가늠한다. “40!” “예!” “347!” “오라이!” 저울에 올라가는 각양각색의 짐들을 보며, 고물상 주인인 김진택 씨의 손도 바쁘게 움직인다. 종류에 따라 가격이 다르니 주의 깊게 무게를 재고 분류해야 하기 때문이다. 리어카에 옹골차게 담아온 것들을 하나하나 내리면 온갖 물건들이 나온다. 신문, 종이, 캔, 이불, 옷가지, 고철….
무게를 재고나면 안쪽으로 이동해 고물상 직원들의 도움을 받아 폐품 분류를 시작한다. 그렇게 리어카를 비우고서야, 아주 잠깐 숨 돌릴 시간이 있다. 줄을 선 리어카들의 무게야 100kg이 넘는 경우가 심심찮게 보이지만, 막상 손에 들어오는 지폐는 몇 장 되질 않는다. “약값은 안 나오겠네….” 할머니가 혀를 차며 걸음을 돌린다. 그나마 김 씨가 챙겨준 믹스커피와 종이컵은 추운 새벽 공기를 달래줄 몇 안 되는 온기. 따뜻한 커피를 손에 쥐고 사무실 옆 찌그러진 양철박스에 걸터앉으니, 줄을 서던 아저씨가 너스레를 떤다. “쏠쏠하겠소. 돈 주지, 커피 주지.” “커피 먹는 재미로 내가 이걸 하잖아.” 껄껄 웃는 할머니의 손에는 7천 원이 쥐어져 있다.



“고물 값이 너무 내렸어. 여기 목매고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한숨 섞인 말이 괜한 것은 아니다. 종이가 1kg 당 80원이다 보니, 100kg을 모아와도 기껏해야 수중엔 8천 원의 돈이 남기 때문이다. “이불값은 안 오른데. 이제 주울 것도 없네.” 모아서 주는 사람이나 있으면 다행한 일. 버리지도 않은 물건을 훔쳐다가 파는 사람들까지 있을 정도니, 길에서 차곡차곡 주워 모은다는 건 어려운 일이다. 그렇다고 일을 그만두자니 그도 안 될 일이다. 5.18 광주민주화운동 때 맞아서 평생 굽은 허리로 살게 된 어르신이나 아들이 시골 땅을 다 팔아버려서 술로 밤을 지새웠다는 어르신, 홀로 손자만 키우며 사는 어르신에 사업이 망한 어르신까지. 하나하나 기구하기 짝이 없는 삶들을 짊어지고 사는 까닭이다. 물론 그렇다고 겉모습만 보고 괄시하면 곤란하다. 고물상을 찾는 사람들 중에는 부자도 제법 많다. 늦은 나이에 돈 버는 재미를 느끼고 고물을 수집하는 어르신도 심심찮게 만나볼 수 있다.
보통은 두어 마디의 푸념을 뱉다가 빈 리어카를 끌고 나서지만, 간간히 오래 머무는 이들도 있다. 마침 방금 정산을 받은 아주머니가 빗자루를 들고 고물상 이곳저곳을 쓸어낸다. 워낙 고물상 일이 힘드니, 객들이라도 이렇게나마 잠깐씩 손을 돕고 가는 것이다. 정수기 옆 싱크대에선 또 다른 아주머니가 아예 팔을 걷어붙이고 설거지를 하는 중이다. 그렇게 일을 돕고도 생색내지 않고 슬그머니 떠나버리는 손님들.
고물상을 찾는 건 폐품을 줍는 사람들뿐만이 아니다. 누군가가 필요 없어서 버린 물건들 중엔 용케 쓸모 있는 게 많아서, 종종 헌책이나 라디오, 전화기 등을 사가는 사람들이 있다. “여기 있으면 별게 다 나와.” 쌓인 폐품을 뒤적이던 아저씨가 감탄사를 내뱉는다. 그는 막 쓸 만한 예초기를 발견한 참이다.



날 밝도록 이어진 행렬에 폐품은 금방 한가득 쌓였다. 그러니 크레인으로 틈틈이 치워야 한다. 크레인이 한 움큼 담아 가면, 리어카며 트럭으로 배달된 고물이 또 한 움큼 쏟아져 들어온다. 새벽 일찍 비웠던 리어카를 다시 그만큼 채워서 오는 사람도 부지기수. 저기 들어오는 93세 할아버지 역시 오늘만 해도 벌써 세 번째 방문이다. 리어카를 비우고 고물상을 나서는 할아버지를 얼른 따라간 김 씨가 할아버지의 손에 커피를 쥐어준다. “한 잔 더 드셔. 그래야 백 살 채우지.”
김 씨가 신월동에서 은혜고물상을 30여 년 지켜오며 깨달은 게 있다면, ‘서민들은 착한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사는 게 어려운 와중에도 리어카를 밀어주는 사람에게 고맙다는 말을 잊지 않고, 누군가 힘들어 보이면 기꺼이 먼저 다가가 도와주는 이곳. 김 씨 역시 명절이면 단골손님들에게 설탕 한 포라도 챙겨주며 마음을 나누고 있다. 어르신들이 고물을 싣고 다니는 유모차 바퀴가 고장 나기라도 하면 선뜻 나서서 고쳐주고, 바퀴 바람도 넣어주고…. 고물상 주인과 손님의 주고받는 마음이 여간 따뜻한 게 아니다.
높은 산의 맑은 물은 가장 낮은 곳으로 흐른단다. 그러니 이렇게 맑은 물 같은 사람들이 올망졸망 흘러와 살아가는 것일 테다.

저작권자 © 월간원광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